ㆍ지은이 |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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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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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7-03-25 21:3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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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공터에서’ (해냄 간)를 읽고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었을 때 온통 색깔이 검은 색이었다.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을 읽었을 때는 붉은색으로 도배를 했었다. 본서를 읽고 나서의 색깔은 온통 잿빛이었다. 그런데 반전은 있다. 잿빛이었지만 아주 작은 블루 톤의 사람냄새가 나는 희망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강력한 소회가 스며들었다. “참 비루하고 온통 비정상적인 삶의 이력들 속에서 정상적이고자 하는 꿈틀거림으로 인해 행복해 지는 감동” 한국의 근대사를 살아온 마동수, 이도순 부부는 어떤 의미에서 내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복사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불편했지만 공감했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평자의 부모 세대 중에 조국의 광복 이후 질퍽한 인생을 살아내지 않고 승승장구 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청산 대상인 친일파들이 보란 듯이 여전히 득세하는 말도 안 되는 모순의 시대에 그쪽 아류들과 기웃거렸거나, 친정부적인 야합꾼들을 제외하면 그 시대를 안락하게 산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후 알지도 듣지도 못한 좌우익이라는 이념 싸움으로 인해 원치도 않은 죽음과 고통, 고난을 당해야 했던 참 억울한 세대가 근대사를 살아온 부모들의 세대였다. 반면 현대사의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 각기 다른 길을 가는 군상들이 그려진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의 아들들인 상징적 인물인 마장세와 마차세의 삶이다.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색채를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들을 통해 작가는 오늘의 시대 역시 결코 녹록하지 않은 시절임을 작품에 녹아지게 하고 있다. 동시에 그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오늘의 ‘나’처럼 느껴지도록 작가는 글을 써 내려갔다.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평자가 인정하는 최고의 글쟁이다. 그래서 평자는 그의 작품들을 섭렵할 때마다 너무 부럽고, 행복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로 인해 수치스러운 감정도 갖는다. “바다는 늘 새 바다네.”(p,187) “시간은 생명을 가지고 놀면서 조금씩 뜯어가고 있었다.”(p,244) “화장장에서 내려오는 언덕에 억새가 피어서 바람에 흔들렸다. 억새꽃이 부풀었고, 그 석에 가을빛이 자글거렸다.”(p,311) 김훈만이 쓸 수 있는 이런 류(類)의 글말들을 보고 있노라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수 년 전, 남한산성에 올랐을 때 비참했다. 칸이 인조의 이배를 받고 삼배를 받으려는 순간, 일산 밖으로 나가 오줌을 갈기는 장면에서 나는 그 오줌을 내가 맞는 것 같았다. 그 글의 필채가 얼마나 살아 움직이든지. 독서를 하며 이 수모를 다 겪고 난 뒤에 이런 사족을 책에 기록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오늘 이 나라의 또 다른 수모가 왜 이리도 지지한지.” ‘칼의 노래’ 에 담긴 글이다. “적은 죽음을 가벼이 여겼고 삶을 가벼이 여겼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적은 죽일 수 있었고 삶을 가벼이 여기는 적도 죽일 수 있었다.”(p,242) 글체가 비장하다 못해 시리다. 왜? 단지 전쟁터에서의 살육의 묘사로만 이 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평자는 1592년, 임진년 조정은 무능력 자체였다. 이로 인해 죽음이라는 무게가 무겁든 가볍든 예외 없이 피아를 살육해야 하는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원흉이라는 말로 이 글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격변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흙 수저 출신의 한 가정 이야기를 통하여 아주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는 인생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평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남루하지만 몇 몇 재벌들처럼 전혀 천박하지 않은 인간사의 한 단면을 보는 아름다운 교훈 받았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몇 몇 특별한 금수저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민초들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비극의 시기와 한국 전쟁, 그리고 밥 먹고 살기 어려운 지난했던 가난의 시절을 지냈다. 어떻게 하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고 베트남이라는 남의 나라의 전쟁터로 나가 이유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무모함도 경험했고, 우리들의 누나와 언니들은 유럽의 먼 나라로 날아가 시체를 닦으며 돈을 벌었고, 우리들의 아버지와 형들은 열사의 나라인 중동에서 땀 흘리며 달러를 벌며 자신들의 몸을 불사른 존재들이 베이비부머들이라는 서민이요, 민중들이었다. 정치적으로는 4,19와 5,16 그리고 5,18과 6,29 등등을 거치면서 단 한 가지 민주주의라는 열매를 피우기 위해 피 흘린 끝에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이 땅의 민초들이었다. 그런데 2017년은 아프고 또 아프다. 재론하지만 작가는 이런 역사의 굴레 전체가 공터와 같았음을 시사한다. 마치 피하고 싶었지만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공간 말이다. 현대사의 주인공 형제들의 굴곡진 삶 그리고 그 형제들의 삶이 왜 그렇게 치열할 수밖에 없는지를 서늘하게 펼치는 장면에서 평자의 청소년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근대사 주인공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그 아슬아슬한 삶 살아내기를 따라가면서 때로는 슬프기도 했지만, 그래도 소설 내내 흐르는 부모 세대의 잿빛 여운 속에서 왠지 모르게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입이 되어 행복한 독서 여행을 했다. 소설가 김훈은 이 소설을 통해 오늘에 살아남은 자들의 살아남음이 남루하고 때로는 비루했지만 그들의 삶이 곧 나의 삶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분명함 목적이 있었음을 독자인 평자는 발견했다. 독서라는 것이 무엇인가? 독자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먼저 생각한 저자의 진솔한 글을 통해 발견하는 대리만족의 여행이지 않은가? 그래서 언제나 독서라는 여행은 엄청난 매력이 있다. 글은 목적을 갖고 저자가 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독자들과 공유하게 될 때 저자는 행복하다. 아마도 김훈은 이 일을 벌써 성취한 것이 분명하다. 왜? 평자는 저자의 글 맥을 이미 공유했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에서 이렇게 자신의 독서법을 소개했다. “배우고, 외우고, 나아가 깨닫기”(읽는 인간, p,187)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독서의 양이 늘면 늘수록 더 더욱 절감하고 공감하는 것은 ‘나아가 깨닫기’이다. 개인적으로 작가 김훈의 글들은 평자에게 아주 좋은 ‘나아가 깨닫기’로 인도해 주는 좋은 길벗이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는 예비일, 글 마감을 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 이 글을 함께 읽는 모든 독서 동역자들에게 사순절 피정의 은혜가 넘치기를 두 손 모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