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엔도 슈사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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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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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7-05-30 17:3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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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창비 간, 2014년) 을 읽고 ‘독약’이 아니라 ‘바다’에 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p, 270)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작가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레비가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는 제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독일인들이 전범으로서 자책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인 죄를 저지른 아우슈비츠에서의 만행을 직시하는 것에서 빗나가지 않는 역사의식을 갖고 전 세계인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이미 독일 용서했고 그들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반응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참 멋있는 피해자의 용서의 미학을 보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히틀러 하에서 자행된 독일의 죄를 용서하는 일련의 일들은 단순히 레비만의 일은 아니다. 엘리위젤도 독일인을 용서한다는 메타포를 이렇게 표했다. “내가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고통을 줄 권리는 나에게도 없다.”(엘리위젤, ‘이방인은 없다.’, p,169) ‘죽음의 수용소’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 박사도 나를 비롯하여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나는 나를 이렇게 진인하게 짓밟은 너희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임을 책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의미심장하다. 세계 바둑 랭킹 1위인 커제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에게 단 한 국(局)도 이기지 못하고 참패했다. 인간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기계적인 매커니즘들에게 정복당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 것에 대한 불안증이다. 평자도 이 점에 대하여 인정한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런 비극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비극이 현실로 드러나면 인간에게 있어서 종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유는 알파고와 같은 컴퓨토피아의 세계에서 주도권을 갖는 기계들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용서와 같은 정서적 기제는 아예 탄생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용서를 비는 것과 용서를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행위요 삶이다. 그 용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가는 많은 지식인들의 연구 대상이지만 아주 단순하게 접근한다면 용서는 분명 감각에서 시작되는 기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감각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도구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피력하면 과유불급일까?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반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담론이지만 왠지 평자는 이 정의를 지지하고 싶다. 왜? 이 말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감각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죽은 것이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리듬에 맞춰 귓가에 계속 읊조려댔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까’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와 마음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 사라졌다. ‘맞아.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주머니가 죽을 때도, 이번에도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거야”(p,164)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포로가 된 미군 병사를 마취시킨 뒤 생체 실험을 하는 현장에서 있었던 의학도 스구로의 독백이다. 스구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생체 실험실 안에 있었지만 그는 도무지 그 범죄 행위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전시(戰時)라는 긴박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는 양심상 명령이었던 그 임상 실험에 동참할 수 없어서 실험 팀 뒤에 빠져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방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이라면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패악한 죄악을 묵과하고 있는 공범이라는 죄책에 빠져 몸부림치는 자에게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이 실험실에는 스구로의 친구인 토다가 있다. 그는 스구로와는 정 반대로 생체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미군 병사의 마취를 맡은 스구로가 하달 받은 명령에 머뭇거리자 토다는 스구로를 닦달하며 이미 공범자가 된 것을 인정하라고 소리치며 생체 실험대상자에게 아무런 가책 없이 마취제를 폭력으로 주입하는 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다. 마취제 주입에 망설이는 스구로에게 전한 토다의 말을 들어보자. “등신 같은 뭔 소리를 하니? 거절할 거면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충분히 시간이 있었을 텐데. 지금 여기까지 와 버린 이상 너는 이미 절반을 와버렸다고.”(p,149) 토다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현실이었다. 그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철저한 냉소적 현실주의자였다. 그런 그에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양심은 이미 접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토다는 항상 이렇게 독백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내게 양심의 가책이란 타인의 눈이나 사회의 벌에 대한 공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p,130) 이렇게 양심이 마비된 자로 살고 있는 토다를 저자는 그냥 버려진 양심의 소유자로 소설에서 매장시키지 않는 여운을 남겼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하다. 불과 약 2시간 전에 살아 있었던 미군을 의도적으로 생체 실험을 해서 죽인 뒤, 그의 간을 꺼내들고 이동하면서 독백한 대목은 이 소설의 압권이었다. “검붉은 피로 탁해진 액체에 담긴 이 암갈색 덩어리,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게 아니라, 자신이 죽인 인간의 신체 일부를 보고도 거의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는 이 섬뜩한 마음이다.” (p,170) (중략)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가책이었다. 가슴의 격렬한 통증이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후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다.”(p,171) 도대체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토다는 양심이라는 것을 완전히 회복 불응으로 잃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은 일말의 부분이라도 남기고 있는 것일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리라! 엔도 슈사쿠는 생체 해부학 실험실에 또 다른 인물을 등장시킨다. 생체실험의 총 집행자인 하시모또 교수, 그를 어시스트하고 있는 시바따와 아사이 조교수, 그리고 우에다 간호사외 등등이다. 이들의 조목조목의 행위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저자의 의도를 평자는 보았다. 등장한 인물들이 보편타당한 죄악을 자기에게 이롭게 주관화시킴으로 얻어지는 부수익(副收益)을 챙긴 자들의 군상 말이다. 의사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윤리인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일이라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화시키는 일이라든지(하시모또), 조직에서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의사로서의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리는 비인간적인 선택을 한다든지(시바따와 아사이), 혹은 본인에게 임한 현실적인 불행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상징적인 인물(우에다)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이라는 독특한 이기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이들 인물들의 행위들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인간의 생명을 물화(物化), 혹은 타자화(他者化)시켰다는 반칙이었다. 이것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인 감각을 무감각화시켰다는 점에서 돌이켜 보아야 할 인간의 죗성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이 책을 1980년대에 처음 읽었다. 그리고 당시의 얄팍한 지식으로 받아 담은 것은 양심마비라는 중대한 결함에서 오는 비극이 충격적이라는 정도의 수확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한 번 읽은 이 책은 나에게 더 중요한 독서의 수확을 주었다. 다음과 같은. 엔도 슈사쿠는 이 책의 제목을 ‘바다와 독약’이라 했다. ‘독약’의 의미는 수긍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체의 양심 포기 혹은 무감각을 의미하는 단어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긴장하는 것은 ‘바다’의 메타포이다. 저자는 ‘바다’를 왜 소설의 제목으로 정했을까? 창비에서 출간된 본 책의 역자인 충남대 일문과 교수인 박유미 교수는 이렇게 갈파했다. “바다의 의미는 은총의 바다라고 해도 좋고 사랑의 바다라고 해도 좋지만 인간 내부에 담아져 있는 독약의 대치어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p,190) 일견 동의한다. 저자는 고향인 나가사키의 바다를 보고 자랐을 터이다. 그는 자라면서 그가 소유했던 가톨릭 신앙에서 지고지순하게 견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혹시 바다로 대치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이다. 일체의 모든 것을 담수(潭水)하는 바다, 그것이 혹시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저자는 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바다는 도무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마비된 양심마저도 내치지 않고 품는 하나님의 품은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재론하지만 신학교 시절에 읽었던 ‘바다와 독약’에서 평자는 인간 양심 마비에 천착하고 그 마비됨의 상징인 ‘독약’을 힐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다시 읽은 ‘바다와 독약’에서는 ‘바다’에 더 많은 방점을 찍으며 독서했다. 그 바다는 인간의 극단적인 망가짐(양심마비)까지도 품는 것임을 인지하면서. 근래 복음적인 기독교계에서 여지없이 강조하는 영성의 기치는 마비되고 상실된 양심을 회복하라는 고전적 틀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평자는 한 번 뒤집어 보았다. 엔도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붙들었던 것은 그 양심마저도 담수하려는 하나님의 용서 즉 바다였다. 용서의 미학이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용서는 알파고가 절대로 갖지 못할 인간의 무기이다. 그러기에 오늘 기독교가 정말로 회복해야 하는 영성의 기치는 용서의 영성이리라.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이 있는 나가사키 돌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는 것은 우연일까?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파랗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