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엔도 슈사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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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바오로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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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7-06-01 16: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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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바오로딸 간, 2015년)를 읽고 ‘곁으로’의 영성
“고난은 하나님의 멀어짐(Gottesferne)이다.”(본회퍼, ‘나를 따르라’, p,99)
이 글을 처음 만났을 때 깊이 동의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던 주님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온 세상의 고난을 친히 짊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는 완전히 멀어져야 했던 그 아픔이 내게 인격적으로 밀려왔다. 이 감격을 어찌 이론으로 논할 수 있을까 싶다. 주님은 그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니까. 그러나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신앙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는 것, 너무 당연하고 소박한 소망이다. 이런 이유로 신앙인들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종교적인 행위들을 수용한다. 기도, 예배, 찬양 등등. 물론이다. 어떤 면에서는 신자들의 공격적인 행위들은 그래서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이 반응하는 일체의 신앙적 행위들보다 더 전제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나와 멀어지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내 곁으로 가까이 오시기를 기대하신다는 바로 그것 말이다. 이것을 기독교적인 언어로 평자는 ‘은혜’라고 표한다. 작가 김응교는 본회퍼를 높이 평가한다. 바로 ‘곁으로’의 영성을 추구한 가장 이상적인 실천적 목회자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본회퍼는 고통 곁에서 떠나지 않는, 고통 곁으로 다가가는 삶을 ‘값비싼 은혜’(expensive grace)라고 불렀다.”(김응교, ‘곁으로’,p,44.)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 평자는 ‘곁으로’의 영성을 독서 중에 찾아내는 소득을 올렸다. 평자가 얻는 여행의 소득을 추적해 보자. 본서를 보수적인 성향의 독자가 읽었다면 아마도 두 가지의 반응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⓵ 아주 불온한 나쁜 책 ⓶ 이래서 가톨릭은 이단이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개신교 신앙의 전통이 예수에 대한 신성을 건드릴 경우 가차 없이 이단으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는 가톨릭 신앙의 전통위에 서 있는 작가이며 조금 더 비판적인 의미에서 그를 평가하자면 범신론적인 가톨릭 신자에 가깝다고 평자는 개인적으로 정리한다. 이것을 전제한다면 개신교적인 전통으로 그를 수용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를 그렇게 흑백논리로 편 가르기 하며 정죄하는 것은 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조금은 유치하다. 신학은 개방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사해 부근에서’도 신학적인 포용성을 무시한 채로 매도하고 공격하는 것은 무리수가 있어 보인다. 주인공 ‘나’와 가톨릭 계통의 대학 친구인 ‘도다’는 대학을 졸업한 뒤, 20여년 만에 예루살렘의 한 초라한 호텔에서 재회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나’는 일본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영세를 받았지만 그건 순전 부모와의 원만한 관계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영세를 받은 교인이었지만 전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건너간 이유는 ‘도다’ 때문이었다. 그는 9년 전, 이곳으로 유학을 와 히브리어와 성경학을 전공한 터라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 스스로가 갈등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회의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 말이다. 그러나 그 기대감은 물거품이 된다. ‘도다’ 역시 예루살렘으로 넘어와 성경학과 히브리어를 공부했지만, 더 깊은 공부 끝에 ‘도다’가 얻는 결론은 회의주의라는 두께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행적은 후대인들에 의해 조작되었고 그가 방문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의 흔적들 역시 철저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기에 말이다. “나는 도다에게 물었다. 지금도 성당에 다니나? ‘나의 질문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나를 살피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젠 안 다녀. 신앙을 버렸나? 그는 침대에서 발을 내리더니 멀리 벗어던진 구두를 찾으면서 말했다. 자넨 이 나라에 왜 왔나? 우린 이제 이삼십 대가 아니잖나.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엔 나이를 먹었고 게다가 인간이 정열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네. 그래서 잊어버린 그 사나이의 족적을 다시 따라 걸으면서 결판을 짓고 싶어졌네. 나는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게 멋쩍고 부끄러워 그 사나이라고 했다. 어떤 예수인가? 교회 예수인가? 자네 예수인가? 그는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나의 예수겠지.”(pp,35-36) 조금 더 나아가 보자. “나는 도다에게 물었다. 자네도 예수를 버렸나?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라네. 자넨 왜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한 건가? 글쎄. 그래서 예수를 잃어버린 지도 모르지. 이곳에 성경학을 공부하러 온 한 사나이기 있었네. 그는 예수의 생애도, 모습도 성경에 쓰인 그대로라고 믿고 있었지. 그런데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성경에 묘사된 예수의 생애도 말씀도 사실이기 보다는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신격화하여 지어낸 사실이란 걸 알게 되었네. 그는 후세에 신앙이 만들어낸 성경의 예수상(像)을 정중하게 옆으로 밀어놓았네. 그리고 진짜 예수의 생애를 발견하려고 이 나라로 온 거라네.”(pp,71-72) 믿음이 좋은(?) 개신교 신앙인의 귀로 여기까지의 두 사람 간에 진행된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불온하기 그지없는 신앙 없는 자들의 투덜거림으로 비판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긴장했으면 좋겠다. 왜? 이 두 사람의 종교적인 갈등은 적어도 피리어드를 찍은 것이 아니라 콤마를 찍었다는 점 을 주목해야 하기에 말이다. 또 한 가지 이들의 이 갈등과 도전이 결코 천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나’가 진술한 대로 결판을 내든지 ‘도다’가 말한 대로 진짜 예수상을 추적하든지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사해 부근을 중심으로 예수께서 가셨던 길들을 따르며 두 사람의 관찰과 해석을 통해 21세기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평자와 독자들의 천로역정들을 재해석할 수 있는 기막힌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이처럼 행복한 여행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중 플롯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소설은 도다와 ‘나’의 사해 부근 여행기와 시간의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 주후 1세기의 사해 부근에서의 예수의 행적이라는 두 테제가 교차되면서 전개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전자는 두 사람이 방문한 장소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그 장소에서 주후 1세기 예수의 행적을 저자는 그리고 있다. 이런 이중적인 플롯을 취하면서 저자가 시사하고자 했던 소설의 목적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독자들은 이 대목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사해 부근에 등장하는 예수는 의외의 인물이다. 왜? 그는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와는 아주 다른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무기력한 예수이다. 갈릴리 근처의 호숫가를 비롯하여 막달라, 가버나움, 벳세다를 두루 다니셨던 예수는 그곳에 거주하는 민초들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체휼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전하는 세간의 소문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증언되었는데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고지한 메시아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전해진다. 이로 인해 사해부근에 살고 있었던 민중들에게 예수는 참 기대되는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예수가 각 마을에 들어가서 보여준 것은 무기력함과 실망감뿐이었다. 메시아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예수는 마을에서 쫓겨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를 배척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말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곁에 함께 있습니다.”(p,95) 아마도 엔도 슈사쿠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로서 발휘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철저히 이 소설에서 배제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왜 이런 위험한 시도를 했을까? 평자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곁으로의 영성’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라고. 평자의 이 대답은 이중 플롯 형식으로 전개되는 도다와 ‘나’의 사해 부근 여행기에서 피력하고 싶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소설의 말미에 ‘쥐’에 대한 결론적인 행적이 묘사되어 있다. ‘쥐’는 도다와 ‘나’의 대학시절 미사를 돕던 수사의 별명이다. 쥐의 행적을 추적하던 두 사람은 그가 유대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그곳 가스실에서 죽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죽어갈 때의 정황까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쥐와 같이 있었던 동료에게서 들은 바, 그는 가스실로 끌려갈 때 죽음의 공포 때문에 오줌을 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헌데 주목할 것은 증언자가 본 또 다른 사람이었다. 쥐가 그렇게 공포로 걸어가던 가스실로 쥐처럼 비틀거리며 함께 걸어갔던 사람이 있었다는 증언이었다. 오줌을 질질 싸면서 말이다. 저자는 소설의 말미에 쥐의 행적을 소개하면서 대비되는 성경의 한 사건을 소개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한 명의 이야기를. 그 죄수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천국에 가면 잊지 말아 주시오.” 예수는 곧바로 응대했다. “언제나…그대 옆에…내가 있겠다.”(p,382)라고. 사해 부근에서의 마지막 클라이맥스는 감동이다. 도다와 ‘나’는 사해 부근에서의 기행을 마치고 작별하게 된다. ‘나’는 도다에게 헤어지면서 물었다. “정말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을 건가?” 당분간은 안 될 것 같다는 도다에게 마지막으로 ‘나’는 묻는다. “예수가 여전히 자넬 따라다니나?” 침묵하는 도다의 말을 대신하여 ‘나’는 내레이터가 되어 이렇게 독백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대학 기숙사 시절부터 삐걱거리는 성당의 문을 열던 그 때부터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는가? 그런데도 나도 도다도 여전히 예수한테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언제나 네 곁에 내가 있다.”(p,385) 21세기 변증학자로 알려진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관계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특정한 것을 믿으며, 이런 점에서 믿음에는 분명한 내용이 있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 변증”, p,200) 맥그래스의 이 글을 접하다가 스스로 자문하고 자답한 것이 있다. ‘분명한 내용’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게 응대했다. 그 분명한 내용이란 ‘하나님이 나와 가까이 계시겠다는 의지’를 믿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이 구절에서 특히 애정이 가는 대목이 있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영어성경 NRSV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He has put a sense of past and future into their minds.” 아마도 직역하면 이런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미래와 과거의 감각을 두게 하셨다.” 평자는 이 번역이 마음에 든다. 하나님께서 이 감각을 인간에게 주신 이유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인간 곁에서 관계를 갖고 싶어 하시는 인격적 주군이시다.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영성이 종교적 행위로 접근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쩌면 외형적인 요식 행위에 지나는 것일 수 있다. 정작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성은 내가 언제나 늘 항상 너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관계성의 회복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시인 박노해가 읊조린 구절이 마치 성경 말씀처럼 들린 것이.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pp,289-200)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 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내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