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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2024-06-11 09:29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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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엔도 슈사쿠
ㆍ출판사 해냄
ㆍ작성일 2017-06-14 15:11:31

 

품음의 영성



“바루크 아타 오도나이…… 세헤카누 베키마무 베히기하누 라즈만 하제!” (생명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셔서 오늘까지 살아 있게 해 주신 하나님, 축복 받으소서!)

이 히브리어 기도문은 1986년 노벨평화상 수락을 하면서 연설한 엘리위젤이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드린 기도문이다. 위젤은 이런 기도를 드리며 연설을 시작한 뒤에 연설 말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제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가 창조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행동도 불가능합니다.” (엘리 위젤, ‘나이트’,p,206)

    엘리위젤의 이 글을 읽다가 유대인들의 소름끼치는 정신을 보았다. 주지하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위젤은 본인이 살고 있던 시계트가 독일에 의해 점령당하자 가족들과 함께 그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를 비롯하여 부나, 부헨발트 수용소에 수감되어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곳에서 나치에 의해 자행된 가장 비인간적인 범죄 행위들을 경험한 위젤은 훗날, 독일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자유의 날에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일념을 갖고 살아남은 자의 일기이자 고발기록인 ‘나이트’를 저술했다. 서평자는 이 책에 기록된 글 중에 피페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연합군에 의해서 부나 공장이 폭격을 당할 때 배고픔에 지친 수감자들이 음식을 훔쳤다. 피펠도 함께. 그들은 발각되었고, 곧바로 1만 명의 수감자들 앞에서 본보기로 교수형이 집행된다. 두 명은 건강한 남자였고, 또 한 명은 어린 소년 피펠이다. 교수형이 집행되자 두 명의 건강한 남자는 곧바로 숨을 거두었지만 몸무게가 가벼운 피펠은 숨이 넘어가지 않고 30분이 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는 고통을 당한다. 이것을 본 아우슈비츠의 한 유대인 수감자가 ‘자비로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한다. 바로 그 때 엘리위젤은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술회하는 글이 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엘리위젤, “나이트”,예담 ,pp,122-123.)

    이 일을 경험했지만 위젤은 교수형 이후, 강하게 하나님을 거부하였다고 술회한다. 도리어 이때부터 위젤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의도적으로 항거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도 싸늘하게 하나님에 대하여 반감했던 위젤은 그로부터 약 40년 뒤,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자리에서 히브리어 기도문을 먼저 외우고,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천명했으니 말이다. 위젤의 이러한 심경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서평자는 그것을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위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성적인 합리화로 인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되새김질한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적인 인식 아래에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침묵 속에 있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위젤의 사고를 바꾼 침묵하시며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추적에 나서 보자.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서평자에게는 있다. 불과 얼마 전에 개봉된 마틴 스컬세이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는 시각적인 침묵의 이해를 도와주었다. 어떻게 보면 훨씬 더 감각적인 효과를 준 것이 영화인데 서평자는 엔도의 필채로 만난 ‘침묵’에서 얻었고 만났던 감동에 비해 만족도가 그리 크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만의 이유는 책을 통해 처음 만난 당시의 충격은 처음 충격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복음주의적이라고 자부하는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공부한 서평자에게 ‘침묵’은 신선했다. 당시 신학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틀에 짜여 있는 조직신학적인 이해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불온시하였기에 ‘침묵’에 나타난 하나님의 침묵하심을 접하는 것조차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던 분명한 분위기를 생생히 기억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옆에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시고, 말씀해 주시고, 속전속결로 만사형통하게 하는 좋으신 하나님의 상이었다. 그 분은 부르면 언제나 오시는 분이었고, 그것도 지체하지 않고 오시는 하나님이셨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하나님은 늘 우리들 편에서 보면 5분 대기조에 편성된 응답자이셨다. 그러나 진짜 그런가? 하나님은 그렇게 즉각적으로 달려오시는 하나님이신가? 현장에서 목회를 해온지 30년, 다시 말해 현장 체험의 산증인으로 살아온 30년을 반추하면 하나님은 즉각 달려오신 것보다 지금도 묵묵부답하시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서평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지금 암 투병 중에 있는 지체가 세 명이나 있다. 평자는 이들의 발병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이들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 기도를 생략한 적이 없다. 기도의 요청문은 당연히 완전한 치유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들은 힘겨운 암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어떤 지체는 더 악화되기까지 했다. 목사로서 참 부끄럽지만 기도를 하면서 매달리고 있는데 저들의 호전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 것에 어떤 때는 분노가 일 때가 있다. 더불어 더 힘들고 지치게 하는 점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평자에게 내가 그들을 치료하겠다. 혹은 그들의 치료는 내 뜻이 아니라고 선명하게 조명해 주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학교 시절, 데모에 앞장서던 친구들이 불렀던 ‘혀 잘린 하나님’이라는 민중 복음성가가 있었다. 당시 부르는 자들은 불순분자 A급들이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있을까/쓰레기 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지금 가만히 곱씹어도 참 참람한 가사니 불순한 것이 아니라 그때에 이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의 심정이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헌데 이 가사가 불경한 가사인가? 역사의식이라고는 있는 자들의 사치라고 믿었던 철없었던 당시의 평자의 수준으로 이 가사는 참 불경스러운 가사였지만, 오히려 목회의 현장에서 정말로 가슴 아프고 이해가되지 않는 성도의 고난을 목도할 때, 더군다나 그 고난을 이기기 위해 진솔하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묵묵부답하는 하나님을 볼 때 오늘, 내가 이 노래를 부르고 싶은 심정일 때가 많다.
    엔도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별 다름이 없는 것 같음을 평자는 이 소설에서 경험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절정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로드리고 신부의 배교 종용의 압박 부분에서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로드리고는 이렇게 절규한다.
“주님, 당신은 이제야말로 침묵을 깨셔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옳고, 선하고, 사랑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당신이 엄연히 있다는 것을 이 지상과 인간들에게 명시하기 위해서라도 무슨 말씀이든 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p,290)
주인공의 이 절규를 만나면서 감정이입이 되어 무척이나 힘들었다. 왜? 이렇게 절규하는 소설속의 주인공은 로드리고가 아니라 오늘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초기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목사의 의무인줄로만 알던 그 시절, 이런 류의 기도를 드렸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값싸고 천박한 복음으로 중무장했을 때, 분명 이런 의도가 다분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선택은 옳았다고. 내가 택한 하나님은 정답이라고. 이것을 무시하는 일체의 것들에게 하나님이 본때를 보이실 것이라고. 아니 본때를 반드시 보여주어야 한다고.”
막스 피카르트는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한 인간의 내부에 침묵하는 실체가 존재하고 있을 때, 그의 모든 특성들은 그 실체 속에 중심을 두게 된다.”(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p,79)
    그래서 그랬나 보다. 내 안에 실체하고 계시는 지존자가 그 지존하심을 보란 듯이 보여주기를 기대했던 얄팍함이 내게 있었던 이유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침묵하고 있는 실체가 나를 위한 이기적 실체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폭력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평자에게 바장이며 다가온 밑절미가 있었다. 무엇인지 아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침묵하셔야 한다는 역설이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들이 이기적으로 원하는 대로 반응해야 한 존재라면 아마도 이 세상의 참 비극의 현장이 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다. 로드리고가 원했던 하나님의 일하심과 나타나심은 끝내 침묵으로 응답되지 않게 엔도는 소설에서 그렸다. 역설인가? 아니면 반항인가? 그래서 평자는 엔도를 높이 평가한다. 엔도는 로드리고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으로 전인격적 존재를 펼치신 하나님을 그렸다. 배교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인 후미에 판을 밟으라는 압박에 갈등하는 로드리고에게 들린 소리가 흡사 엘리위젤이 피펠의 교수형에 들은 소리와 흡사하게 들린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p,302)
    주님의 존재방식은 언제나 이렇다. 형식의 틀에 묶여 있는 존재하심이 아니라 그 형식의 틀을 부수고 품어주시는 존재 방식 말이다. ‘품어주심’ 의 영성은 그래서 평자가 정의하는 ‘침묵’의 메시지이다. 평자는 품어주심의 영성을 배교자 기치지로에게서도 본다. 상황과 여건에 따라 배교를 밥 먹듯 한 기치치로는 형식의 틀로 볼 때는 그는 영락없는 가롯 유다이다. 헌데 엔도는 이렇게 비열한 인간인 기치치로의 손을 놓지 않는다. 본인이 고발하여 갖은 고난과 결국은 배교하도록 로드리고를 무너뜨린 장본인 기치치로가 소설 말미에 로드리고에게 와서 고해성사를 하며 던진 말이 무겁다.
“이 세상에 약자가 있습니다. 강자는 그 어떤 고통에도 굽히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겠지만 저 같은 태어나면서부터 약자는 성화판을 밟으라고 관리들이 고문하면….”(p,328)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 중에 기치치로와 같지 않은 자가 누구일까? 오히려 기치치로임을 인정하는 것이 도리어 더 주님께 가까이 가 있는 신앙적 존재는 아닐까, 주님의 품으심은 바로 이런 존재인 인간을 품으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대단히 중요한 그림이 그려질 것 같다. 차별하지 않는 품음의 영성을 오늘 나와 너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내침은 기독교의 영성이 아니다. 품음이 기독교의 영성이다. 
미국 여성 환경 운동가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레베카 솔닛이 이렇게 말했던 촌철살인이 가슴에 남아 밑줄 쳤다.
“사람들이 얼마나 진실에 굶주려 있는가를 볼 때, 바로 그때 희망이 생기지요. 사람들은 그 진실을 건네주면 그걸 움켜잡으니까요.”(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p,163) 

기독교가 건네줄 희망이 무엇일까를 참 많이 고민하며 산다. 고민을 할 때마다 가슴에 다져지는 것이 있다. 그 진실은 형식과 틀이 아닌 품음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