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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82년생 김지영2024-06-11 09:28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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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조남주
ㆍ출판사 민음사
ㆍ작성일 2017-07-12 12:13:00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간, 2017년) 을 읽고



    하버드대학 성서해석학 교수로 재직한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교수는 그의 역작인 ‘동등자  제자직’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지성사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가부장적 지배 세력이 학계의 주도권을 영속해 온 데 근본 원인이 있다.”(E.S 피오렌자, ‘동등자 제자직’, 분도출판사, 1997년,p,16)

읽었을 때, 여성신학자이기에 페미니즘 차원의 여성 옹호 발언정도로 치부하기에는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느꼈다. 왜? 이런 가부장적인 지배의 분위기가 지성사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평자는 알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탄생 자체부터 별로 축복받지 못한 일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 사회적 구조의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지금이야 여성들의 인권 향상에 따라 남성 차별을 이야기하지만 아직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수많은 자료와 데이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얼마 전에 이렇게 평자에게 질문해 왔다.

“아버지, 여성 가족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세요?”

    복선이 있는 질문이다. 아들은 90년생이다. 88만원 세대를 넘어 열정 페이(pay) 운운하는 대한민국의 청년 사회를 몸소 느끼고 있는 한 복판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아들은 사회적 경향에 대하여 예민한 편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이 살아야 필드인 교회는 열정 페이보다 한 술 더 떠 사역자의 헌신을 매개로 더 희생을 요구하는 교회 공동체에 있기에 아마도 더 남녀에 대한 평등의 소신이 더 민감한 듯하다. 물론 극히 개인적인 시각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여성가족부가 존재한다면 마땅히 남성 가족부도 존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아들의 반문에 내 세대와는 다른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발견하고는 필자도 놀랐다. 이 질문을 받고 아들의 질문에 답하기가 나름 궁색해져서 화제를 돌렸지만 오늘을 사는 20대, 30대들의 치열한 전쟁 같은 대한민국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작가의 소설 전개는 특히 오늘을 사는 여성들에게는 우울모드이다. 작가는 주인공 강지영을 너무 평범한 30대 중반의 가정주부이자. 아내이자. 엄마로 등장시켰다. 문제는 정확한 진단을 그렇게 내리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해리성 장애로 보이는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로 주인공 지영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친정 엄마의 정체성으로 이입된 발언들을 거침없이 내뱉는 이상행동들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녀가 이런 질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까?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1987년생의 젊은 작가 반열에 있는 조남주의 장편이다. 1987년생 그러니까 소설 속의 주인공보다 다섯 살이나 적은 패기만만의 작가라는 말이 된다. 저자는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우울모드를 감정이입하여 표현한 듯하다. 3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에 걸쳐 있는 세대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과거지사들을 82년생 김지영을 투사하여 풀어헤치고 있다.
    김지영은 아주 평범한 공무원인 아버지와 아들 선호 사상으로 인해 제 때 공부를 하지 못해 포기했다가 그래도 뒤늦게 독학으로 공부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억척순이인 어머니 오미숙 사이에 2녀 1남 중, 중간에 태어난 샌드위치 아이였다. 할머니 고순분 여사는 남존여비사상이 투철해 김지영보다 5년 뒤에 태어난 손자를 끔찍이 아껴 손녀들인 김은영, 김지영은 구경도 할 수 없었던 분유를 독차지하게 할 정도로 엄했다. 이로 인해 항상 지영은 남동생에게 치이는 치사한 것들을 경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를 정신장애를 앓게 할 정도의 가정적인 문제의 요인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면에 있어서는 부모의 사랑과 관심 속에 무난히 성장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여자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당시 남성 중심적인 구조가 마뜩하지는 않았고, 더불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여자 됨의 육체적인 신호인 생리적인 고통들이 때로는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 순응하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녀를 심각한 정신병적 질환자로 만드는 요소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김지영은 무난히 성장기를 보냈다. 이후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까지 하게 되는 평자가 생각해 볼 때 82년 생 치고는 그러지 못한 또래 집단의 여성 그룹에 비해 그런 대로 괜찮은 청년기를 보냈다고 해도 불편하지 않다. 허나 대학을 졸업하고 드디어 남성 구조적 사회 체계 안에서 경험하는 성 차별의 불합리들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여러 차례 입사 지원의 실패 끝에 극적으로 들어간 홍보대행사에서의 직장 생활 중에 경험해야 했던 여성이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운명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한계들, 입사 동기인 남성들에 비해 이유 없이 덜 받아야 했던 연봉, 상품개발부라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영역에서 홍보부라는 얼굴 마담식의 홍보와 접대를 해야 하는 부서 이동으로 인해 당했던 성적 수치들이 지영을 서서히 심리적, 육체적으로 멍들게 했다.
    여성이라면 삶의 최대의 난관이 결혼이라는 근래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결혼 자체가 주는 부정적 수식어가 너무 많아진 탓이다. 결혼하면 압박이 들어오는 퇴사 스트레스, 임신으로 인해 당하는 수많은 육체적인 고통, 출산 후에 다가오는 양육의 부담, 이후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삶을 살아야 하는 괴리감, 자기 개발이나 자기만족이라는 삶의 기쁨과는 요원해지는 자괴감, 이런 심리적 박탈로 인해 항상 불편한 남편과의 관계 등등, 이것을 지영은 고스란히 경험하게 된다. 어떤 이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여성이라면 출산하면서 시작되는 모성애라는 가장 위대한 감성을 지니게 되고, 가정을 일구어 가는 기쁨이야 말로 또 다른 감격이 아닌가!”
그건 당신이 남성이기에 할 수 있는 소리이다. 또 다른 폭력이 있다. 아마도 이건 같은 여성들이 하는 더 아픈 소리들이다.
“우리 때는 아이 열 낳고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어!, 우리는 아이 낳고 한 달도 안 되어 물로 기저귀 빨래, 시부모 공양 다했어!, 우리 때는 세탁기, 청소기, 김치 냉장고 이런 가전제품 꿈에 꿀 수 없었는데 요즈음에는 기계가 다 해주는 데 뭐가 어렵다는 거지! 등등”
    작가 조남주는 소설을 전개해 나가면서 주인공 지영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단락을 나누었다.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2015년의 현 상황을 시작으로, 1982-1994년의 유년 시절, 1995년-2000년의 청소년 학창시절, 2001년-2011년까지의 대학 및 직장인 시절, 2012년-2015년까지의 전업주부의 삶을 그린다. 작가가 이렇게 주인공의 삶을 구분한 것은 아마도 한국현대사라는 시대적 상황을 전 세대의 여성들과 차별화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하는 나름의 동의를 평자는 한다. 그러기에 주인공 이전 세대의 여성성이나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동일시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총을 쓰지 않는 폭력임을 저자는 시사하고 있다. 이 소설을 해설해준 여성학자 김고연주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다양한 정체성들 중에서도 자기정체성의 핵심은 ‘성’(GENDER)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주목하면 한국인의 절반은 같은 상당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등의 모든 공적 영역에 작동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p,180)

    평자는 김고연주의 통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성(GENDER)이 체제라는 말이 남성이 나에겐 아주 이론적으로 혹은 지성적으로 수용하는 정도의 갈파라고 고개를 끄떡이는 정도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처럼 여성으로 태어나 자신의 정체성이 여성이라는 성의 감옥 안에 갇혀 궁극적으로 정신적인 질병을 앓아야 하는 지경까지 추락(?)하는 상황에 직면한 일체의 여성들의 입장이라면 이 땅에 수많은 김지영이 존재하는 것은 남성 모두가 공범의 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이 든다. 그러기에 친정 엄마의 모드로 자신의 아픔을 대변하는 정신적 한풀이(?)는 어떤 면에서 치료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을 아닐까 하는 궁색한 남성의 변을 남겨 본다.
    이 글을 공개하면 남성들의 폭력적 댓글이 수없이 달릴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왠지 김지영의 편에 평자는 서고 싶다. 박사과정 코스워크 할 때 읽었던 ‘에코페미니즘’에서 인도의 환경 운동가인 저자 반다나 시바가 했던 말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문장이 충격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근대 민족국가가 시작되면서 여성들은 식민화되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가 여성의 성과 출산력, 작업능력 및 노동력을 필연적으로 통제했다는 뜻이다. 이 식민지 없이는 자본주의도 근대국가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시민사회’ 로 불리는 것의 기초를 이류는 것이 바로 여성 식민화이다.”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공저, ‘에코페미니즘’, 창작과 비평사, 2003, p,155)

왠지 글을 마치는 데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어머니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
 

2017년 7월 12일, 수요일 오후 12시 1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