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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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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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7-09-29 22:3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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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끙끙 앓는 하나님”(꽃자리 간, 2017년)을 읽고 목사로 사는 것이 오늘처럼 비극인 시대가 또 있을까 할 정도로 비루하다. 신문 지상과 여론에서 들추어내는 목사의 속살은 더 이상 벗길 것이 없을 정도로 새까만 때로 둔덕져 있다. 때를 벗기고 또 벗기면 이제는 더 이상 벗길 것이 없는 맨들맨들 한 속살이 나올 뻔한 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끝이 어디인가를 모를 정도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오늘 목사의 자화상이다. 그래서일까! 목사로 살아야 하는 현장을 떠나 있으면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심호흡이 가능하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고, 이런 참담함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된 것이 아닌데 자괴감이 있다는 페러디를 SNS 상이 올려놓았다가 치도곤을 당했던 기억이 불과 얼마 전이다. 해서 이제는 글쓰기도 두렵다. 그렇다고 목사라는 신분을 숨기지도 못하겠고 이래저래 곤혹스럽다. 한 영혼 때문에 한없이 울었다. 너무나 많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 한 자매가 있다. 1년 전, 방광암이 발병하여 치열하게 투병했는데 그럼에도 이제 그녀의 호흡이 서서히 꺼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이 있는 목사라면 누구든지 그러겠지만 믿음의 실상으로 달려간 지난 1년 동안, 그녀와 함께 하며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주군께 엎드린 제목은 기적적인 회복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왜 그렇게 했을까? 제일 먼저는 섬기는 지체를 잃고 싶지 않은 목사의 욕심(?)인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하나 목사로서의 직업의식이라고 할까! 자매를 놓치면 하나님의 권위가 실추될 것이라는 염려도 작용한 것 같다. 세간에서 흔히 하는 말처럼 도대체 너희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에 대한 비아냥이 듣기 싫어서 일 테다. 그런데도 현실은 자매를 잃어야 할 것 같다. 하나님, 참 치사하다. 그렇게 절규했건만 결국은 데려가실 것 같으니 말이다. 예레미야를 읽을 때마다 평자는 20:9절을 절절하게 떠올린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언젠가 한세대에서 교수하고 있는 친구가 이 구절을 가지고 평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말씀사경회를 인도하면서 ‘흔들림의 영성’이라는 제하로 강의했던 기억이 있다. 친구는 예레미야의 이 구절의 정황을 도리어 긍정으로 변역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레미야 20장의 시대적, 현장적인 상황을 놓고 볼 때 친구의 해석은 과유불급처럼 보인다.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린치 하는 폭력을 가했다. 더불어 조선시대 역모를 꾀하던 자들을 저작거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참수한 머리를 걸어놓아 경종했던 것처럼 예레미야를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어 사람들에게 수모를 준 뒤 방면한 기록을 예레미야서 기자는 기록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를 경험했던 나약한 인간인 예레미야에게 왜 자괴감이 없었겠는가? 예언자는 이 수모를 경험한 뒤에 20:7절에서 대단히 민감했던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여과 없이 토로한다. 이 토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을 향한 고발의 성격이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저자는 이 구절을 설명한 글에서 아주 명쾌한 웃픈 해석을 남겼는데 탁월하다.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의 순화시킨 번역이다. ‘권유하셨다’고 번역한 ‘파타하’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p,224.) 평자는 저자의 이 해석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니다. 차준희 교수가 ‘예레미야 다시 보기’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는데 저자와 동선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했었기 때문이다. “파타하‘는 ’유혹‘ 또는 ’후리기‘(남의 것을 갑자기 빼앗거나 슬쩍 가지다.)를 뜻하고, ’하자크‘는 ’강간‘을 뜻한다.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그것은 ’유혹의 달콤함‘과 ’강간의 난폭함‘을 나타낸다.” 차준희, “예레미야 다시보기”, (서울: 프리칭 아카데미, 2009년),p,219. 저자는 예레미야가 당한 고통을 머금으며 그가 얼마나 힘든 과정을 보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예언자가 직접 된 것 같은 감정이입으로 하나님을 향한 예레미야의 대항함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듯하다. 이어지는 구절이 그것을 증언한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렘 20:8) 평자도 아주 가끔은 예레미야의 심정을 동일하게 갖고 하나님께 대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목회를 하는지 아세요?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과 수모를 당하며 목회 현장을 떠나지 않는지 아세요? 먹고 사는 문제라면 벌써 나는 이 현장을 떠났을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못 떠나는 거예요. 뭘 아시기는 아시나요?” 목회가 너무 힘들고 어려운 막장까지 다다랐을 때, 하나님께 분풀이 하는 셈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분기탱천하여 대들고 난 뒤에 언제나 평자는 다시 눈물을 흘린다. 왜? 난 주님이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 분이 아니며, 나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아셔서 언제나, 항상, 늘 곁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으신 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그도 그랬다. 저자는 예레미야 20:7-8절에서 대듦의 예레미야를 지지하지만 곧바로 예레미야 20:9절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살붙인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에게 달콤한 시간은 지나갔고 소태처럼 쓴 시간이 다가왔다. 대중들의 귀에 단 말을 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그래서는 그는 다시는 여호와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호와의 말로 인해 빚어진 현실이니 그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으면 괴로움의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다. 예언자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pp,225-226) 평자는 저자의 글을 빼놓지 않고 읽는 독자이자 팬이다. 왜 나는 저자의 글에 끌릴까? 그와는 면식을 단 한 번 경험 한 것이 전부인 별로 친분이 없는 관계인데도 난 그의 글에 감동을 받는 것일까? 성향이 비슷하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다. 초록이 동색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의 글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예레미야의 외침이 그의 글 속에서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할 때가 종종 있다. 그의 메시지에 미가와 아모스의 소리가 담보되어 있는 것 같아서이다. 객담(客談)이다. 소문에 의하면 대한민국 교계에서 가장 따뜻한 메시지를 주는 대명사로 인식해도 괜찮을 선한 목자 교회의 담임인 유기성 목사와 저자는 신학교 동기라고 한다. 헌데 같은 70년대 중후반 즈음에 공부한 동문수학인 두 사람의 길이 참 다르다고 평자는 이해한다. 한 사람은 가장 안정적인 보수적 교회의 틀을 다지며 승승장구한 반면, 저자는 진보적 틀의 구조 안에서 비평적 성찰의 사역을 감당해 온 그래서 경우에 따라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목회를 해 온 것을 평자는 인지한다. 가끔 유 목사의 설교를 텔레비전과 SNS 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접할 때가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설교를 만나면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끝까지 들어보려고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고 위로를 받는지 나도 한 번 위로를 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유 목사께서 섬기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뜻한 톤의 목소리, 온유한 마스크의 외모, 지성적인 외형과 더불어 감성적인 터치에 있어서 선천적, 후천적 장점들을 고루 갖춘 정말로 괜찮은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들을 때마다 이 생각이 든다. 그렇구나. 바로 이것이었구나. 대도시에 있는 지성적인 신자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동의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유 목사께서 전하는 메시지로 논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시지라고 하지만 내가 평신도라면 난 그 교회에 나가지 않을 것 같다. 왜? 같은 목사로서 난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일까? 그렇게 몰고 가면 할 수 없지만 난 그건 아니다. 그런데 왜? 이유는 간단하다. 난 그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하다. 위로는 받는데 반면,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살아냄의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만들어낼 수 없다. 그 삶의 굴곡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스티그마와 오늘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 스티그마를 지속적으로 새겨내는 삶을 살지 않는 자는 말을 통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보는데 난 그것을 전술한 두 목회자의 설교에서 발견한다. 아마 이런 맥락 같다. 언젠가 이동원 목사의 설교를 평한 정용섭 박사의 말이다. “이동원 목사는 설교의 교과서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도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도 하고 모델링하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설교의 교과서인 그에게서 난 은혜를 받지 못한다.” 나도 안다. 정 박사의 평이 너무 주관적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 주관은 도무지 바뀌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난 정 박사의 일갈을 이해한다. 김기석의 글을 읽다보면 화가 날 때가 있다. 나보다 뛰어난 지성적 능력 때문이다. 그는 물론 평자보다는 선배이다. 하지만 선배라는 것이 내가 그에게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자위하게 하지 못한다. 평자 역시, 책을 손에 들고 있지 않으면 금단 현상이 나타날 정도도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선배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화가 나지만 한 편으로 너무 좋다. 너무 단세포적인가?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 있다는 고백이. 또 하나가 있다. 난 그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가 섬기고 있는 교회는 큰 교회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목사가 섬기고 있는 교회인데 웬일이지? 할 것 같을 정도로 평범하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링크되는 그의 설교 원문과 그의 칼럼은 평자의 자양분이다. 먹을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글 올리기는 감사의 조건이다. 정말 저자는 읽을거리를 주는 좋은 사람이다. 일본 지성의 대가로 자리 잡은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렇게 직설한 적이 있다. “책에 쓰여 있다고 무엇이건 다 믿지는 말라. 자신이 직접 손에 들고 확인할 때까지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 이 책도 포함하여”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이언숙 역, (서울: 청어람 미디어, 2014년.),p,286.
대단한 직설이며 자신감이지 않은가? 읽을거리를 주는 책이 얼마나 대단한가? 평자는 김기석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믿게 된다. 그것은 그를 추종하는 맹목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속에 담겨 있는 지난함 때문이다. 진정성 때문이다. 영혼의 두레박으로 건져 올리는 깊은 샘을 맛보기 때문이다. 오래 전, 김근주 교수의 ‘예레미야 특강’(IVP 간)을 읽었을 때 진보적인 예언자의 설파를 배웠다. 하지만 목사로서 느끼는 아쉬움은 그의 주석적 특강이 매력적이었지만 어느 한 편으로는 목양의 지형을 너무 무시한 해석이 아닌가 싶은 소회였다. 차준희 교수의 ‘예레미야 다시보기’(프리칭 아카데미)도 접했다. 그에게서 나름 목양의 현장을 생각하고 배려해 준 균형의 주석적 성찰을 배웠다. 하지만 그의 글을 통해서 주석적, 학문적, 예레미야 공부에는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석적 연구들이 치열한 목양의 현장에서 본문 설교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기에는 2%의 부족함을 느꼈다. 반면, 저자의 본 책은 주석적 해제가 빈약하지 않은 신학적 내공과 더불어 수록되어 있는 17편의 메시지가 앞 선 두 학자들의 신학적 풍요로움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현장 목사만이 느끼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통찰을 줌으로 허전함을 채워주는 공급의 역할을 해 주고 있어 독서 내내 행복했다. 물론 저자의 글 역시 그렇다고 이해가 쉽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책을 선택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싶다.(ㅎㅎ) 저자의 책 평은 이 정도로 약한다. 실질적인 도전은 책 속에 무궁무진하게 담겨 있는 그의 신학적, 목회적 고민을 직접 만날 때가 가능하기에 독자들에게 이 행복의 미끼를 던지는 것으로 평을 마친다.
평자는 이번 서평이 김기석 목사의 저서로는 16번째에 해당된다. 그가 발간한 책으로는 이제 한 권이 남아 있다.(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믿는 자들에게, 꽃자리 간) 졸필로 내 놓은 평자의 첫 번째 책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읽기’(동연 간, 2016년)에 세 편의 서평을 수록해 놓았다. 이후 조금 나태함이 있어 저자의 서평 쓰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지금 김기석 목사의 14편의 글 모음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 중이다. 해서 정리가 끝나면 다시 두 번째 서평집으로 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글은 평자는 물론, 많은 이가 함께 나누고 싶은 강추의 글이다. 평자는 누구를 칭찬하는 데 인색한 편이다. 그래서 저자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무척이나 어색하다. 그러나 그의 글은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같은 하늘에서 읽을거리를 계속해서 주고 있는 저자가 건강하기를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