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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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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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7-06 12:4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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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광야에서 길을 묻다.’(꽃자리, 2015) 를 읽고 2016년의 엑소더스 신학교 시절은 국가적으로 우울했다.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서울의 봄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더 춥고 거슴츠레한 동토의 왕국이 새롭게 시작되는 夏時節(하시절)이 펼쳐졌다. 입을 열 때에 조심해야 했다. 알고 있는 지인들 중에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남영동은 그 시절, 신군부의 또 다른 막장이었다. 교단을 대표할만한 선배는 그 때 그 시절, 막장의 주인공을 높여줌으로 승승장구했다. 거의 대부분의 메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아부와 타협을 했다. 정말, 살얼음판을 걷던 시절이었다. 이 기막힌 시대에 서평자는 신학교를 다녔고, 졸업했다. 보수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던 모교는 이 시대에 암묵적으로 침묵했다. 바로 그 시절, 당시 대한기독교서회 주간으로 있었던 선배가 졸업반 신학교 강의의 커리큘럼에 들어 있는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쳤다. 그 강의에서 서평자는 처음으로 신세계를 보는 경험을 했다. 상당히 진보적 시각을 갖고 있는 선배의 강의록에 담겨 있는 내용은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목이 몇 개나 되는 사람처럼 보였다. 새로운 동토의 시대를 연 국가에 대하여 거침없이 내 뱉는 그의 독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대리적인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기독교윤리는 당시 서평자가 속해 있는 신학교에서는 변 방에 있는 학문이었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던 과목이었는데 선배가 강의하는 강의에 열광하여 때문에 신학교 동기생들 중에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전공한 친구들이 지금도 꽤 되는 걸 보면 당시 선배의 가르침은 상당한 신선함과 도전을 준 것이 분명하다. 선배는 당시 출애굽 사건을 해방신학적 윤리적 이슈로 해석했다. 그 동안 신학교에서 배운 출애굽 사건은 유월절의 기초, 광야에서의 고난, 성막의 제조, 시내산 율법 수여 등등으로 연결시키는 해석이 주류적 해석이었다. 이런 해석은 신약적인 해석의 틀을 자연적으로 제공했는데 애굽은 죄의 노예 상태인 우리들의 영적 상태를 의미하며, 홍해를 가른 하나님의 기적은 죄인 된 자들의 세례를 의미하고,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사건으로 연결되고, 40년간의 광야에서의 고난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반드시 겪게는 되는 이 땅에서의 고난이고, 가나안으로 입성은 성도들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틀로 해석했다. 이것은 공식이었고, 이외의 그 어떤 해석도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헌데 선배의 강의법은 달랐다. 애굽은 불의한 정권이었다. 노예인 이스라엘은 오늘 신군부 정권에 의해 짓밟힌 민중이었다. 그곳에서의 탈출은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루는 해방이었다. 하나님은 그 민중과 함께 하신다. 광야에서의 고난은 지속되는 불의한 자들로 인한 핍박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누가복음 4장에 기록된 주의 은혜의 해가 선포될 때 일어나는 해방의 땅이었다. 지금이야 이 해석은 공유되는 하나의 신학적 틀이지만 당시는 목숨을 건 해석이었다. 표출할 수 없는 시대, 힘이 없어 돌 이외는 던질 수 있었던 것이 없어 돌을 들었던 그 시절에 이와 같은 출애굽기에 대한 해석학적인 접근은 상투성에 함몰되어 있었던 서평자에게도 불을 질렀다. 물론 나는 돌을 던질 용기도 없었던 비겁자였지만. 그렇게 세월이 흘러 3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이 시대의 목사로 살면서 숱하게 또 마주치는 것이 있다. 2016년의 출애굽 사건이다. 작고하신 박완서 선생님의 책에서 무릎을 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숙명여고 2학년 시절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셨다.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무엇이 필요한지 아니?” “포도, 설탕, 소주, 항아리요.” 이렇게 대답을 하면 선생님께서는 '또?'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도주는 포도를 땅에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임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단다.” 시간은 성숙이라는 단어의 대치어이다. 성숙함의 반대말은 미숙함이겠지만 서평자는 천박함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농익은 맛있는 포도주가 되기 위한 절대적인 요소는 시간이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목회자라는 이름으로 산지 30년이 되어간다. 목회 현장은 애굽이다. 신자본주의로 인하여, 천박한 자본주의로 인하여, 성과만을 요구하는 피로사회로 인하여, 돌출하는 사상과 이념의 충돌로 인하여, 갑과 을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인하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투쟁으로 인하여, 이제는 현대인들이 기대야 할 종교까지 한술 더 떠 세상보다 치열한 대립의 각을 세우는 것을 보면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장은 신애굽이다. 이 신애굽에서의 삶은 3,500여 년 전의 애굽보다 어떤 의미로 보면 더 가혹한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오늘의 현장에서의 출애굽의 신학적 해제도 걸맞아야 한다. 서평자는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줄 좋은 책을 만났다. 저자의 글이다. 묻지 않는 바보들 저자는 책 제목을 ‘광야에서 길을 묻다.’로 정했다. 제목을 만나는 순간, 글의 화두가 어떻게 펼쳐질지 나름 가늠했다. 그래서 저자의 논지를 주목했다. 사람들은 광야에 있으면서도 묻지 않는다. 길을 찾아야 하는데 광야에서의 삶에 길들여져 안주하려고 한다. 그런대로 광야에서의 삶도 괜찮다는 분위기이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교계에 보수적인 틀에서 상당한 영향을 준 목회자가 쓴 책 제목이 기억에 있다. “광야의 삶을 축복입니다.” 과정에서 볼 때에 이 말을 서평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아무리 광야에서의 삶이 축복이라도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다. 광야는 과정이고 프로세스이다. 그러기에 광야에 거하는 자들의 분명한 인식은 광야는 거쳐 가야할 길이고, 목적지에 대한 순례과정이며, 걸어감이어야 할 의식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오늘, 그 길을 묻지 않는 시대라는 아픔이 있다. 작가 조정래는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창작’을 해야 하는 작가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 앞에 서야 하는 존재들이고, 그 새로움은 ‘자기 부정’부터 해야 하며 ‘극기의 길’이고 ‘길 없는 길’ 이다. 외로우나 그래서 보람이 있는 길이다.” 소설가의 길은 조 작가의 말대로 ‘길 없는 길’을 가야하는 고독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길이셨다. 조금 더 압도적인 단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길을 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길을 묻지 않았다. 도리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고독한 길이 아니었고, 없는 길을 개척하는 것도 아닌데 그 길을 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이런 일그러진 시대에서 본서는 신 출애굽을 위한 참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준다. 21세기의 감각으로. 갈 길을 함께 물어보자.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제일 눈에 띠는 것은 출애굽의 도구로 사용된 세 여인에 대한 해석이 신선하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누이 미리암, 그리고 모세를 건진 애굽의 공주는 각기 역할이 달랐다. 아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갈대상자에 떠난 보낸 어머니, 그 갈대상자를 건져 올리고 노예인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다시 나일강에 버리지 못한 바로의 딸, 그리고 자기 동생을 돌볼 유모라고 어머니를 바로의 딸에게 소개한 미리암이라는 3명의 여성들을 소개한 저자는 이들이야말로 해방의 여명을 밝힌 여인들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와 더불어 저자의 해석은 아름답다. 폭력적인 전제정치 하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성을 지닌 자들인 이 여성들을 통해 해방의 서곡이 이루어졌다는 해석은 탁월하다.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기보다는 돈 중심의 사고를 하며 살아간다. 돈을 중심으로 모든 사고와 제도가 재배치된 세상은 위험사회다.”(p,46)
돈 중심의 물질 숭상 사회가 왜 위험한가? 돈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지 않게 하고 계산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흥적이고, 찰나적이고, 단순한 사고놀음으로 이끄는 것이 돈이다. 한병철은 그래서 이런 철학적 고찰을 했나 싶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 속도' 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가 짧은 삶일 뿐이다.” 돈은 즉흥적인 체험들을 부추긴다. 돈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저자는 이런 시대일수록 사람 냄새가 나는 긴 생각,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긴 사유함을 요구한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마치고 더 이상 나갈 진도가 없어 빈둥빈둥 고 3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해 주셨던 말을 잊지 않고 있다. 어떤 선생님이 막 사는 제자가 안타까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한자 사람 인자가 다섯 개만 있었다는 것이다. “人人人人人” 제자에게 풀이하라고 종용하는 사족과 함께 이 편지를 보냈다. 제자는 아무리 고민해도 이 편지의 뜻을 해석할 수 없어 난처함을 보이며 답신을 보냈는데 그 회신으로 제자에게 간 뜻풀이는 이것이었단다.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이 사람다움이 없는 세상은 절망의 세상이다. 왜 사람이 사람답지 못한가? 이유는 간단한다. 사유함과 성찰함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사유하고 성찰한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고 압박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똑똑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의대와 법대로 몰리는 대한민국, 철학과 인문계열의 학과와 신학은 폐지를 운운하는 대한민국, 과연 이 나라에 소망은 있는 것일까?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지지 않게 해주소서.” 글쟁이 고도원의 '혼이 담긴 시선으로' 에 나오는 글이다. 아름다운 기도다. 나도 이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매 순간마다. 왕따 시키지 말라.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노예에서 해방된다. 아마도 그 탈출 행렬은 감동과 감격의 행군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이르렀을 때 장정만 60만이라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자는 그냥 스칠 수 있는 한 구절에 집중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애굽기 12:38 개역개정판) ‘잡족’ 의 의미를 아마도 고센 지역에 거하던 자들 중에 해방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로 저자는 해석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애굽과 맞섰던 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지 않았던 방관자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부류들일 것이다. 헌데 그들이 탈출 러시에 합류했다는 말이다. 놀라운 것은 그 해방의 행렬에 그들이 참여했음에도 주류 출애굽 공동체가 그들을 받아주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일을 ‘고통의 연대’(p,124)라고 해석했다. 예언자 오바댜는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당할 때 방관한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신탁으로 전한 예언자로 유명하다. 그에 의하면 방관자 에돔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였다면, 출애굽 공동체에서도 잡족의 방관은 엄히 물어야 할 죄목 같은데 이 해방 공동체는 그들을 덮는다. 아마도 새로운 해방 공동체에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덮으신 이유는 가장 연약한 자까지 품고 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저자는 에두른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왜 중요한가? 나와 다른 존재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을 공동체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정신을 ‘우분투’라고 한다. 즉 I AM BECAUSE YOU ARE. 저 사람의 존재가 나를 있게 한 원동력임을 믿는 자는 막 살지 않는다. 타인을 존중하며 산다. 아마도 하나님이 잡족을 인정하도록 출애굽 공동체에 허락하신 것은 신앙공동체의 시작이었기에 연약한 자, 성숙하지 못한 자들을 품으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었고, 반면 방관하던 공동체인 잡족들에게는 인내하는 상대방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라는 의미를 위해서였으리라. 결국은 윈/윈 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 교회 공동체는 출애굽 공동체에게 사인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교회는 이 땅에 남아 있는 마지막 사랑 공동체이다. 교회에서 이지매가 있고, 왕따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출애굽 공동체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악한 일이다. 교회와 성도는 이타적인 삶을 보여야 한다. 정호승은 이렇게 읊었다. “눈을 감으면 비로소 남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하더라도 남을 위한 존재인 내가 보인다. 그 동안 나는 나를 위한 존재로 항상 눈을 뜨고 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는 다 나를 위한 존재였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삶인가? 지난여름 매미가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 싫어하지 않았는가? 매미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인데 나는 매미만큼 열심히 산 적이 있는가?” 타인을 위한 열린 눈과 마음이 교회의 색깔이기를 기대한다. 그까짓 걸 왜 믿어? 언제나 홍해를 가른 사건을 놓고 설왕설래하는 것을 아주 자신 있게 확신에 찬 어조로 교통정리를 한 부흥사가 기억에 있다. 홍해는 갈대 바다라는 의미가 있다. 해서 출애굽 공동체가 건넌 홍해는 사람들이 충분히 건널 수 있었던 수량을 간직한 강 같은 바다였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하여 그가 이렇게 비아냥대며 반론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수량의 강 같은 바다에서 뒤쫓던 애굽의 전차부대가 수장되었다는 사실은 정말로 기적이네. 기적! 홍해 정도를 가르지 못하는 하나님, 그 까짓 것을 왜 믿어!” 서평자는 부흥사들이 왜 설교를 하면서 회중들에게 반말을 하는지 난 그게 기적처럼 여겨진다. 예의를 모르는 자들이 강단에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인간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의 입에서 어찌 감히 ‘다바르’를 해석한단 말인가! 저자는 홍해를 가른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테제를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인용하여 ‘불가능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준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꿈과 지향이 없다면 인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불가능하지만 기어코 이루어야 하는 것이 있다.”(p,135) 서평자는 저자의 지론이 불가능의 가능성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불가능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동의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으로 승화되는 것을 기독교에서 믿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한 카테고리로 묶은 것이 아닌가 싶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소망으로 연결되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저자나 서평자는 공히 같은 분모인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그 까짓 것을 왜 믿어!’ 라고 호통치고 겁박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소망과 사랑의 연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히브리 기자의 갈파는 그래서 탁월하다.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나 사건으로 초대한다. 만나 사건을 저자는 두 가지의 스펙트럼으로 해석했다. 첫째는 신뢰로, 두 번째는 기다림이다. 만나 사건을 들추어내면 단골 메뉴처럼 올라오는 것이 만나라는 생물의 실체이다. 그런데 사실, 실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광야 40 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이 당신의 신앙 공동체를 먹이신 것이라는 교훈이 본질이다. 전술했듯이 저자는 만나의 영적 메시지는 ‘하루에 한 오멜 씩’이라는 메시지이다. 하루 분이다. 문제는 더 많이 거두지 말라는 핵심을 공동체가 거부했다는 점이다. 더 거둔 만나는 여지없이 썩었고, 버렸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런 신학적 담론을 제시했다. “욕망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는 불화와 갈등이 일어나고, 나눔과 공감의 원리가 작동되는 곳에서는 공동체가 세워진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공평한 세상이다.”(p,162) 전자의 원리가 통치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왜 출애굽 공동체의 일부는 한 오멜보다 더 거두어 썩혔는가? 단순히 욕심 때문이라고 정의하면 궁색하다. 출애굽기 기자가 이것을 고발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본 것이다.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는 세상은 하나님 부재의 시대이거나 하나님 불신의 시대이다. 또 하나 살펴볼 것은 기다림의 신학이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모세는 그들에게 엄중하게 꾸짖었다. 여섯 째 날에 먹을 것을 두 배로 거두어들였다가 안식일에 먹으라는 권고를 따르지 않고 안식일에도 음식을 구하러 나갔던 사람도 엄중한 꾸지람을 들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져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울 수만 있다면 그래도 다행이다.”(pp,163-164) 사람처럼 안 변하는 동물이 또 있으랴! 만에 하나 변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처럼 더딘 존재가 없다. 목양의 현장에서 살면서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은 심고 기다리는 일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 농사의 시행착오를 해도 또 속는 셈치고 심는다. 그리고 기다린다. 저자의 혜안이 놀랍다. 그렇다. 한 사람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기간과 세월이 요구된다. 멘토 목사께서 하셨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씨를 뿌릴 때 내 대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내 대가 아니면 다음 대에서, 다음 대가 아니면, 그 다음 대에서 열매가 거두어질 것을 기대하자.” 조정래의 글쓰기 자세를 들어보자. “돌은 단 두 개. 뒷 돌을 앞으로 옮겨 놓아가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게 문학의 징검다리이다.” 문학가 한 사람이 창작의 글을 하나 내놓는데도 이런 수고와 정신이 배경이 되는데 하물며 사람다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한 사람을 만들어가는 위대한 일이 어찌 시장판에 뻥튀기 기계에서 나오는 강냉이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자판기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그리 간편하게 만들어지겠는가?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나를 만드시고 지금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은혜 중의 은혜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내 마음대로 내가 만든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욕망이 분출된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호렙산(신명기에 기록된 지명의 이름으로) 아래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난장일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간 뒤, 40일 동안 두문불출하자 성질 급한 산 아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무리들은 아론에게 모세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음을 고지하고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여 낸 여호와 하나님을 만들 것을 종용하고 압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그들의 세력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론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여인들의 금귀고리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기에 이른다. 이후 모세의 부재 기간 동안 금송아지를 만들 것을 종용했던 무리들이 스스로 금송아지를 이집트에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지칭하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분위기에 압도된 아론은 여호와로 지칭된 금송아지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고 그들은 여호와의 절일에 먹고 마시며 뛰어 놀았다고 출애굽기 기자가 보고한다.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 놀더라”(출애굽기 32:6 개역개정판) 이렇게 난장을 벌이며 먹고 마시던 것을 본 하나님이 모세를 하산하게 하여 심판하는 장면이 출애굽기 32장에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헷갈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건 기사의 정황을 놓고 볼 때 금송아지의 형상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행한 행위가 번제요, 화목제였고, 물론 형상은 송아지의 형상이었지만 그 형상은 상징은 이상한 종류의 잡신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낸 여호와를 분명한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두 돌 판으로 그 형상을 파괴했다. 파괴한 정도가 아니라 후에 이 사건을 회상하는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인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 형상의 파괴는 혹독하리만큼 무자비했다. “너희의 죄 곧 너희가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찧고 티끌 같이 가늘게 갈아 그 가루를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에 뿌렸느니라” (신명기 9:21 개역개정판) 하나님이 너무 민감한 거 아닌가? 결벽증적인 성격이신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신학교 동기이자 한국 구약학회에서 적지 않은 지성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세대학교의 차준희 교수는 서평자의 구약 개인교사이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부딪치면 신학교 동기라는 쪽팔림(요즈음 아이들의 언어로)을 무릅쓰고 전화로 괴롭힌다. 친구가 이 난장에 대하여 전해 준 호렙산에서 벌어진 불신앙의 난장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 신명기 32:4절과 6절에 기록되어 있는 두 단어에 있다. 하나는 4절에 ‘송아지’로 번역된 ‘에겔’이고, 또 하나는 6절에 ‘뛰 놀더라’로 번역된 ‘차헤크’이다. 친구의 가르침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이 금송아지인가? 송아지라는 단어 ‘에겔’은 우회적으로 ‘애송이’라는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다. 동시에 고대 근동에서는 소는 신이 밟고 있는 받침대로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다시 말해 우리는 인도한 여호와는 이제부터 우리들의 통제를 받는 수동적 존재 혹은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위상을 고의적으로 추락시킨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차헤크’ 로 번역된 ‘뛰논다.’는 동사다. 출애굽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기들에게 복종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마음대로 뛰어 놀았다는 결론이다. ‘차헤크’ 는 고대 근동에서 성적인 잔치를 벌일 때 사용하던 단어였다. 다시 말하면 이제는 꼼짝 하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묶어버리고 소위 말하는 섹스 페스티벌을 연 것이다. 지금부터 3,400여 년 전에 호렙산에서 발생했던 하나님을 만들어 꼼짝하지 못하게 해 놓고 마음껏 인간들의 죄악 된 행위를 자행했던 그 때의 亂場(난장)이 오늘 21세기에 더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인간 스스로가 영광을 받는 존재가 되어 자유로운 객체가 되겠다는 선언이 호렙산 난장이다. 하나님을 만들고, 조각하고, 통제하는 것이 호렙산 난장이다. 저자는 이런 일에 앞장을 선 종교를 ‘아론의 종교’라고 정의했다. 그는 아론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특성을 고발한다.(pp,326-327) 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②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한다. ③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욕망을 비우도록 돕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그 욕망을 채우도록 하는 존재이다. ④ 아론의 종교는 희생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저자는 단언한다. 이런 종교는 가짜라고. 더불어 호렙산의 난장을 정리하며 중요한 신학적 담론을 제공한다. “인간이 바야흐로 신의 창조자가 된 것이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은 인간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신은 인간의 욕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자기가 만든 신을 믿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p,375) 그렇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호렙의 亂場(난장)이 오늘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와. 이집트에서 쫓겨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이드로를 만났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을 낳고 아주 평범한 가장을 행복한 삶을 40년이라는 세월을 살고 있던 어간, 하나님께서 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다. 그곳에서 모세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극적인 엔카운터를 경험한다. 그곳으로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신 이유는 드디어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며 노예로 살고 있었던 당신의 백성을 구출해야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출애굽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시기 위해 그 장소로 부르신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선택이자, 사명을 위탁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당황한 모세가 두려운 마음으로 내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고 다시 만나게 되면 나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바로를 만나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에둘러 그 사명을 회피하려는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자기를 정의하시는 답변이 이것이었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인간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은 만들어지지 않는 자존자라는 이 엄청난 메시지가 한국교회를 각성하는 벼락이었으면 좋겠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출애굽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 옳다. 그래서 서평자는 기도한다. 사랑하는 조국교회에 2016년형 출애굽의 은혜가 다시 일어나기를.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