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코맥 매카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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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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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06-04 21:5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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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의 ‘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문학동네, 2015) 여성학자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날이 선 평론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미래엔 관심이 없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事後(사후)해석이다. 그 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을 달라지게 한다.” 원론적으로 서평자는 정의진의 말에 동의한다. 인생이 사후 해석이며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에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그녀의 해석 말이다. 하지만 그녀와 아주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이다. 그녀는 관심 없다고 했지만 서평자는 정 반대이다.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정희진은 이루어질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데 어떻게 그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를 항변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말한다면 이루어진 뒤에 해석해도 늦지 않다는 논리이겠지만, 서평자가 미래에 대하여 더 관심이 많다고 말한 이유는 궤변이 아니라 적나라한 자아 들추어내기를 통해 비추어볼 때 나 또한 미래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미래의 도식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역사라는 도식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말대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해석은 지성인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 세속적 차원의 이야기일 때이다. 이 해석은 신앙적 스펙트럼 안에서 비추어 보면 위험하다. 아마도 수구적 신앙의 사람들은 불온하기 짝이 없다고 까지 할지 모른다. 역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수구적인 신앙인들의 접근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역사의 해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라도 그 결과는 절대적 주권자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고 해석을 지지하기 때문에 정희진의 도발이 귀에는 들리지만 수긍할 수는 없다. 미래 역사에 대한 해석은 인간의 지식과 가지고 있는 도구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역사의 해석이 인위적인 잣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교만이요, 심각한 틀어짐 자체이다. 아, 물론 이렇게 말하면 무신론적인 차원에 있는 일체의 사람들이 도대체 대화가 되지 않는 무지렁이라고 비난할 것이 분명하지만 역사가 그 분의 이야기(His story)인 이상,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는 그 분이 움직임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점에서 물러설 수 없다. 그 분의 이야기임을 거부하는 자들의 이야기는 도리어 역사의 틀을 비트는 과유불급이다. 이런 차원에서 서평자는 미래는 모르지만 그 미래의 역사를 해석할 주군의 일하심과 계획하심 때문에 관심 100%다. 역사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수구 골통이라는 비난의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린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本末顚倒 저자의 글을 읽고 나서 두 가지의 단어가 떠올랐다. 하나는 본말전도라는 단어와 또 다른 하나는 무릎 꿇음이었다. 저자에게 붙은 수식어는 상당하다. ‘미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서부의 셰익스피어’, ‘헤밍웨이의 계보를 잇는 작가’ 등등 화려하다. 그가 이런 칭송을 받는 배경은 오늘의 미국적인 색깔 자체가 무서우리만큼 세속적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기존의 틀로 여겨졌던 기독적인 문화와 사상에 대한 반감과 무기력에 대한 거부 등이 팽배해 있는 작금의 미국적 기상도에 편승하여 작가의 글감들은 많은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언젠가 달라이라마가 미국의 젊은이들을 센트럴파크에서 흥분하게 만들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제네바에서 설교를 마친 달라이라마는 뉴욕으로 건너갔습니다. 센트럴 파크에서 설법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 운집한 뉴욕 시민의 수는 4만 명에 달했습니다. 작년에 CNN 방송이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에 관한 특집을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외부에 있는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주가 있다면 그대의 내적 마음이다.’ 오늘날 서구인들은 그의 설법에 심취합니다. 서구인들의 과학의 진보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그들은 이미 신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더 이상 외부의 창조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신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가 설교한 글에 담긴 이 글을 읽다가 참으로 공감한 내용이 있었다. ‘이미 신이 되어 버린 나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시대가 오늘이라는 관점 말이다. 전통적인 고백의 대상인 창조주가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기에 그 앉아 있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방법들이 절실한 시대에 그 방법론들로 제시되고 있는 일체의 방법들은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다. 무신론적 기초를 든 서구 지식인들의 공격은 예리하다. 그 앞에 서 있는 예술 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일찍이 이렇게 기존 종교성에 대하여 사형 선고를 내렸다. “현대의 진지함은 셀 수 없이 다양한 전통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가 일체의 경계를 흐려 놓은 채 이를 종교적이라고 부른다면, 옳지 못한 지적 목적만이 횡행할 뿐이다.” 이제 종교적, 종교성, 영적, 영성, 신앙적, 신앙성이라는 단어는 옳지 못한 지적 목적을 이루는 자들의 그들만의 언어가 되어 버렸다. 박물관에서나 만나야 하는 도태된 언어이기에 쓰면 안 되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서평자의 억설처럼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본과 말이 완전히 역전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의심의 눈초리는 본서를 읽고 나서 더 확실해졌다. ‘선셋 리미티드’의 해석은 위험하다. 무대는 뉴욕의 흑인 거주 지역인 흑인 게토의 한 공동주택 건물 안의 방이다. 그 방안에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흑인, 한 사람과 티셔츠에 조깅 바지 그리고 운동화차림의 백인이다. 대학 교수인 백인은 시속 130km의 선 셋 리미티드 열차에 몸을 날려 자살을 시도한다. 예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죽음의 직전에 갔던 그 사람을 구한 자는 흑인 목사였다. 죽으려는 사람과 죽으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또 한 사람의 무미건조한 것처럼 여겨지는 별로 재미 없는 이야기가 무대극 형식으로 펼쳐진다. 이 재미없어 보이는 이야기의 한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면 죽으려고 했던 사람은 무신론자 지성인이고, 그 죽음을 막으려는 자는 과거에 불법을 저질러 수감 생활을 경험했던 현직 목사라는 점이다. 무신론자와 목사의 대화, 이미 스토리는 정해진 것 같은 상투적인 이야기라는 선입관이 불쑥 솟아나지 않는가? 왜 이렇게 재미없는 설정, 재미없어 보이는 스토리의 전개가 많은 사람들의 화두가 되었고, 소재가 되었을까? 시카고 일간지인 트리뷴지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책 표지에 소개되었다. “명망 높은 소설가의 찬란한 작품, 눈이 부시다. 놀랍도록 인상적이고, 강렬하고, 흥미진진하다.” (책 후 표지의 커멘트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거대한 크기를 갖고 있는 독서 관련 온라인 사이트인 Goodreads도 이렇게 평가했다. “보기 드물게 재기 발랄하고 예술적인 긴장으로 가득한 작품, 아름다운 기교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사유하게 한다. 우리 시대에 가장 통찰력 있는 작가의 흡인력 있는 작품이다.”(책 후 표지의 커멘트에서) 극찬에 가까운 논평이다. 이 정도의 평가가 정말로 ‘선셋 리미티드’에 담겨 있는가? 이렇게 답하면 어떨까? 적어도 오늘의 정신적인 혼돈의 차원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결론을 말하면 헛헛한 일일까? 소름끼치는 무신론자 백인의 한판승이다. 무기력해 보이는 흑인 목사의 넉 다운 패이다.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 이상, 이런 경우 대체적으로 사람을 구하려는 목사의 한판승이 되어야 해피엔딩이라고 평가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작품은 그 반대이다. 해서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새드 엔딩이다. 재론하지만 오늘의 카오스에서 코맥 매카시는 한판승을 거두었다. 많은 독자들의 기립 박수 속에서. 소름이 돋다.
목숨을 끓으려고 했던 백인 교수는 시대에 지성인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그려졌다. 그는 40년 인생 동안 약 4,000권의 책을 섭렵했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는 지성의 대변이다. 그는 지식을 습득하면 습득할수록 무서운 허무함에 더 빠져 들어감을 호소했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아주 약했어요. 아주 부서지기 쉬웠지요. 나는 그걸 몰랐어요. 절대 파괴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한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p,27) “내가 믿었던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한다고 믿는 척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요. 서구 문명은 결국 연기가 되어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굴뚝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내가 얼이 빠져 그걸 알지 못한 겁니다. 지금은 압니다만.”(pp,29-30) 서평자인 나는 백인의 이 토로에서 결국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을 보면서, 또 그 무엇도 의미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그가 무신론자라는 것이 역설적으로 해석이 안 되었다. 왜? 기실, 이런 류의 고백은 전도자가 먼저 설파하지 않았던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허나 코헬렛은 이 허무주의적인 비극을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결과물로 승화시켰다는 장점이 보이기에 진보의 발걸음을 내딛었던 거보의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반면, 백인은 삶의 허무성을 이기는 것은 자살이라고 단정한다. 백인의 얼꼴은 작품의 후반부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목사님, 내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어둠을 갈망합니다. 죽음을 달라고 기도해요. 진짜 죽음을. 죽은 다음에 내가 살아서 알았던 사람들을 또 만나야 하는 거라면 도무지 어째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건 최악의 공포가 되겠지요. 최악의 절망이. 만일 내 어머니를 다시 만나 그 모든 걸 다 다시 시작해야한다면? 게다가 이번에는 고대해 마지않는 죽음이라는 전망도 없는 상태라면? 자 그건 최악의 악몽이 될 겁니다. 그야말로 카프카지요.”(p,131) “나는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기를 바라요. 영원히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 하나가 되기를 바라요. 댁은 물론 그들 가운데 하나가 도리 수 없겠죠. 댁이 죽은 자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없는 건 존재가 없으면 공동체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동체가 없다. 그 생각만으로도 내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정적, 고독, 평화, 그 모든 것이 심장박동이 한 번만 뛰고 나면 찾아온다니!”(p,131) 현대적인 무신론이 얼마나 살벌한지 그리고 얼마나 논리적인지 소름이 돋는다. 메카시는 백인의 이름으로 현대인들의 지성적 결과는 무용성임을 적나라하게 선포한다. 숨 막히게 하는 지성을 근거로 한 현대인들의 종교성에 난타를 가한다. 메카시의 무신론적인 하나님에 대한 선전포고를 마저 들어보자.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걸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봐요. 주위를 좀 둘러봐요. 보이지 않나요? 고통에 찬 사람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는 가장 기분 좋은 소리일 게 분명합니다. (중략) 나한테 죽음을 대비하게 해 주는 종교를 보여줘 봐요. 허무에 대비하게 해주는 종교를. 그럼 그 교회에는 내가 나갈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댁의 교회는 삶에만 대비하게 합니다. 꿈과 환상과 거짓에만.”(pp,132-133) 메카시적인 도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흑인을 향하여 드디어 그는 이렇게 마치 신현현과도 같은(?) 등장과 퇴장을 한다.
“내가 무슨 교수냐고 물어봤지요? 나는 어둠의 교수입니다. 낮의 옷을 입은 밤이지요. 자, 이제 댁이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빌지만 나는 가야겠습니다.”(pp,135-136)
종교 바이러스? 몇 년 전에 철저한 무신론 과학자와 범신론적인 종교학자와 과학 문화 속에서의 한국 신학을 고민하는 신학자가 공동으로 토론한 옴니버스 형식의 글인 ‘종교 전쟁’을 너무 재미있게 섭렵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종교를 말살해 버려야 하는 정신의 바이러스라고 과학자답게 정의한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글을 기억한다. 그의 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본 종교 분석이었다. 물론 이 분석은 장대익의 독창적인 분석은 아니었고 ‘만들어진 신’에서 발표한 리처드 도킨슨의 이론에 동의하며 인용하며 몰아붙인 도발이었는데 바로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라고 정의한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는 데 필요한 핵산과 같은 유전 물질을 제외하고는 세포로서의 특징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에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세포에 기생하지 않고는 대사 활동, 증식도 할 수 없어 우선 숙주 세포의 핵에 침투하여 세포의 유전 정보 사이에 자신의 유전 정보를 끼어 넣고 세포가 가진 영양분을 이용해 바이러스를 복제하도록 명령을 내려 정상 세포의 기능을 마비시켜 병들게 하는 존재라고 지칭했다. 이어 종교가 바로 정신적인 영역에서의 이런 바이러스이고 해서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이런 치원에서 종교를 정의한다면 종교는 현대 과학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전염성이 강한 고등 미신일 뿐이라고 맹공 했다. 이렇게 독설한 장대익의 이론은 리처드 도킨슨의 사상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어 어떤 면에서는 초록이 동색인 것처럼 보인다. 서평자의 과학적 지식은 일천한 정도가 아니라 무지한 정도이다. 숨길 이유가 없다. 그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논평조차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이는 아니다. 장대익의 도발에 제일 먼저 논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의 정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마비되고 병드는 가치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인가의 제 문제이다. 생략했지만 장대익은 과학적 통계에 의하면 기도는 전혀 의미가 없음을 강력하게 본인의 소논문에서 피력한다. 그 이유로 기도를 했다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고, 더 잘되는 경우는 더 더욱 아니고 기도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응답들은 이현령비현령식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 자의적 감정의 확대 해석으로 폄하하여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런 일체의 종교적 행위는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바이러스이기에 이제는 과학에 의해서 박멸되어야 함을 강하게 역설했다. 그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지성을 토대로 한 설파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긍정의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 자명하다. 더군다나 근래 한국이라는 공동체에서 바라다 보이는 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감안할 때 개독교로 전락한 교회를 박멸하는데 이런 호재가 또 없다. 일련의 이런 독설들이 난무한 가운데에서 목사로 살고 있는 오늘의 지경에 성경이 혹은 기독교적인 핵심적인 가치들이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난자당하게 되었는가를 뒤돌아보면 삶이 뒤받침 되지 않았던 교회의 잘못이 더 크다는 점에서 야기된 것 같아 많이 아프고 쓰리다. 효과인가? 의미인가? 그러나 궁색한 것 같지만 무신론적 과학자의 독설에 한 가지만 변론하자. 왜? 이 변론은 코매 메카시의 백인 승리에 대한 서평자의 반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코믹 메카시와 한 과학자의 난도질에 아프기는 하지만 내가 신앙하는 목적에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인용한 자들의 종교(기독교)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효과’에 목이 매여 있는 그들의 선동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종교를 ‘효과’의 차원에서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종교를 선택한 이유는 ‘의미’ 때문이다. 무신론적인 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의미’라는 개념에 대하여는 무식할 것이 분명하다. 의미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니 생각을 혹시 했어도 그 의미를 또 역시 과학적 분석의 차원으로 몰고 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의미란 무엇일까? 섬기는 교회에 팔순이 되신 권사님이 계신다. 당신은 젊어서 남편이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당해 거의 정상적인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는 반평생의 삶을 경험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아들은 젊은 나이에 척추 사고를 당하는 식물인간처럼 누어 있은 지 2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이윽고 투병 중이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있다가, 큰 아들이 간경화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이제 둘째 아들의 생명도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비극이 또 어디에 있나? 목사인 서평자도 권사님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할 여력이 별로 없다. 솔직히 말하면 목사로 살고 있는 나 역시 그의 가정에 위로를 전달하기는커녕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으니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부모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자식을 앞서 보내지 않는 것이다. 100% 동의한다. 소개한 권사님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고의 저주를 받은 셈이 된다. 이 정도면 무너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막상 당신은 아프고 힘들고 또 아프지만 이겨내고 있다. 신앙의 힘이라는 의미로. 서평자의 이 부연에 대하여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마땅히 이렇게 비웃듯 설명할 것이다. 정신적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고. 그런데 이상하다. 인간의 정신 영역으로 그렇게 생물학적인 차원으로 해석하는 그들이 왜 서평자는 천박해 보이는지 말이다. 엘리위젤의 역작인 ‘나이트’를 보면 어린 피펠이 교수형을 당할 때 아이가 가벼워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고 30분이 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는 것을 본 아우슈비츠의 한 유대인 수감자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한다. 바로 그 때 엘리위젤은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술회하는 글이 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이것 때문에 그래서 독일의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영적 힌트를 받았다고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선셋 리미트디’ (sunset limited) 하필이면 열차의 이름이 이렇다. 책을 덮다가 이런 감회에 젖어 보았다. 해가 저무는 것을 제한하는 방법이 있을까? 창조주 말고. 없다. 그럼에도 그 창조주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긍정과 소망의 힌트는 있다. 주전 4세기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예언자 요엘이 선포한 대로 ‘욤 예호바’ 즉 ‘그 분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로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흐르고 있기에 ‘효과’의 차원으로 종교를 이해함으로서 하나님을 난자하는 일들이 앞으로 더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의미’의 목적을 두고 다다른 자들이 승리할 것임을 서평자는 믿기에 절망하지만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따라 서평자는 프란시스 맥너트 신부가 진정성을 갖고 토해 낸 그의 촌철살인이 더욱 더 위로가 된다. “하나님도 부서진 바이올린으로는 연주하실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