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이 땅에 존재하는 불공정함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찬송가 516장) ● 우리 함께 걸어요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사랑은? (5) ● 본문 : 고린도전서 13:4-7 1) 6절에 전반절에 기록된 ‘불의’의 문자적인 의미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 이라는 뜻입니다. ★ 이 사랑의 문자적인 정의를 토대로 담임목사는 사랑하기를 무엇이라고 정의했나?
★ 이렇게 살려면 그리스도인으로 행해야 하는 중요한 삶의 강령은? |
2) 6절 후반절에 사랑하기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 문자적으로 이 구절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올바른 일을 행할 때 박수를 쳐준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설교에서 언급한 세 사람과 관련하여 부연해 보십시다. ① 알패오의 아들 레위 ② 삭개오 ③ 스데반 |
3) 적용하기 ① 나는 정직한 삶을 살고 있는가? ② 나는 불의에 대하여 거룩한 분노를 하고 있는가? ③ 나는 다른 사람이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박수를 보내고 있는가?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를 담당할 교육전도사 청빙을 위해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해 3) 2월 목회 계획들을 위하여 4)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체의 승리를 위하여 5)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기를 6) 무너진 한국교회가 본질을 성서의 밑힘이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도록 7) 담임목사의 2018년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공 예배 준수에 최선 다하도록 독려하고 실천하기 2. 토요일 담당 청소 사역과 식당 봉사 협력 사역을 자원함으로 사역하기 3. 30일 기도회 준비하기 4. 2월 25일 셀 사역 세밀히 점검하기. | 설교요약 (SUMMARY)2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3번째 강해) 제목: 사랑은? (5) 본문: 고린도전서 13:4-7
공평하지 않거나 정직하지 않은 것은 곧 불의한 것임을 염두하고 오늘 본문에서 제시되는 사랑하기의 10번째, 11번째의 정의를 나누겠습니다.
10) 사랑하기란 다른 사람에게 임한 피해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6절에서 ‘불의’라는 단어로 번역 된 헬라어 명사 ‘아디키아’는 원래 법률 용어로서 직역하면 공평하지 않게 재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영역으로 그 범위를 넓혀 번역하면 영적인 해석으로 외연이 넓어져 인간의 마음과 삶의 궤적에서 일어나는 부정직함을 말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란 타인이 부정직함과 불의함이라는 매개를 통해 당한 피해를 보고 기뻐하거나 박수치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억울하게 당하는 일체의 일들을 보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임을 바울이 천명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3:6-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야웨 하나님의 관심은 공의로움, 공평하심이었습니다. 편벽됨이 없는 공정함이었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만에 하나 이런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판결이나 재판으로 인해 억울한 자가 생겨 그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하나님께 호소하면 그의 호소를 들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바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속성이 공의라는 말은 곧 사랑이라는 주님의 속성과 연결되어 공의의 결과는 반드시 사랑을 담보합니다. 공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공정성이 기초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공의는 그러므로 곧 사랑하기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불의한 방식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면 공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그 결과를 아파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인과 목회자 중에 교회에 세금을 부과해서 포항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습니다. 포항에 지진이 나서 수많은 이웃들이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하늘이 진노라고 말하기에 앞서 그 아픔을 당한 자들, 졸지에 살아가야 할 터전을 잃은 그들을 품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지난 주간에 담임목사의 두 번째 신간이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1-2주 정도 딜레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책에 인용된 시와 노래 가사의 저작권료 지불 때문입니다. 시인이 본인이 갖고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시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작사가가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노랫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글들을 상업적임 목적으로 인용하는 데 적절한 사용료를 내는 것은 그들의 노력에 대해 인정하고 보상하겠다는 정직한 행위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의 글을 상응하는 대가 없이 사용한다면 그것은 사용이 아니라 도용이 됩니다. 도용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공의롭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제된 일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란 정직한 마음으로 공의롭게 행동함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 표절, 논문 도용, 글 인용 시에 출처를 밝히지 않는 행위는 정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직하고, 공평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교회 지체들이 이런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1) 사랑하기란 다른 사람이 올바른 일을 행할 때 박수를 쳐 주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6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선언한 외침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리’라는 단어는 헬라어 ‘알레데이아’의 번역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진리라는 이 단어의 의미는 옳음입니다. 주군이 말씀하신 성서적 밑힘을 근거하는 옳음의 일체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516장 1절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의 참된 길 이 길 따라서 살기를 온 세계에 전하세 만 백성이 나갈 길” 그런데 4절 가사는 반전이 있습니다. “고난 길 헤치고 달려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 길 모두 나와서 믿으면 온 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작사가 콜린 스턴은 옥스퍼드 출신의 수재였습니다. 그런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추구하면 부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일체 세속적 음악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주님을 찬양하는 음악만을 고집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한 가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음악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그에게 음악적인 재능을 안 세속적인 뮤지션이 상당한 개런티를 보장하며 곡을 쓸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을 만들고 노랫말까지 만들었습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투의 길입니다. 어려움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참된 길이며, 진리의 길이며 곧 올바른 길이기 때문임을 콜린 스턴은 선포합니다.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유별나게 굴 것 없다고 평가절하 합니다. 아무리 네가 그렇게 잘난 체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초를 뿌립니다. 진리가 밥 먹여 주냐고 비아냥댑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고 요동하는 자아가 있음을 저도 여러분도 부인하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이 구절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는 바로 이 구절을 말입니다. 진리는 함께 기뻐할 만한 가치입니다. 진리는 그 만한 가치입니다.
저는 가끔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주님을 즉각적으로 따라 나선 기사를 읽을 때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낍니다.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가치가 세속적 가치를 뒤집어 업는 감동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14절을 읽어드립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세리는 당시 돈을 잘 버는 직업군에 속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 살기 괜찮은 직업이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지배국에 돈을 상납하고 나머지 부스러기로 부를 유지해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정체성 말입니다. 그는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알패오라는 헬라식 이름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는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이인기도 했습니다. 이 두 정체성은 수없이 마태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한 마태였는데 예수께서 그의 정체성을 단 한 방에 정리해 주는 일이 생겼습니다.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알패오로 살던 마태는 그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레위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적어도 진리를 포기하고 살았던 자가 다시 진리로 돌아서기로 결심한 위대한 삶의 전기를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저는 마태의 이 결단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옳은 길로의 진입은 사랑하기로의 진입이기에 마땅히 박수를 받을 만합니다. 박수를 친다는 것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박수를 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누가복음 19: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진리로 돌아서는 자와 함께 해 주시면서 박수를 쳐 주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올바른 길로 돌아서는 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야 말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주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를 응원한다는 것이 곧 무엇을 상징하며 대변하는 것입니까? 그를 무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의한 삶에 손 놓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올바른 길이라는 인식이 들면 주님께 의지하여 그 길을 걸어가십시다. 그 길을 갈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극치인 박수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길은 고독하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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