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2.04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교회의 지체들끼리 경어를 쓰는 것과 반말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심도 있게 나누며 반성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OP)
● 하나님은 외아들을 (찬송가 294장)
●  사랑으로 (해바라기 노래)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사랑은? (3)
● 본문 : 고린도전서 13:4-7
1) 사랑하기란 교만하지 않기입니다. 원어의 뜻은 부풀린다는 뜻입니다. 다음을 나누어 보십시다.
★ 왜 나를 부풀리는가? 담임목사 설교 참고.
출애굽기 34:29-35절에 나오는 모세의 행동과 비교하며 반면교사를 삼아보자.  

2) 사랑하기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 주님과 베드로의 예의 갖춤을 이해해 보고 나는 지체들이 평가할 때 예의의 사람인가? 무례의 사람인가를 냉정하게 성찰해 보자  

3) 사랑하기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을 나누어 보십시다.
①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을 담임목사는 무엇이라고 해석했는가?
②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은 우리들의 어머니 사랑을 함께 나누어 보자.
③‘ 하나님의 이타성’ 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우리들의 언어로 나름 설명해 보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를 담당할 교육전도사 청빙을 위해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해
3) 2월 목회 계획들을 위하여
4)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체의 승리를 위하여
5)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기를
6) 무너진 한국교회가 본질을 성서의 밑힘이 회복 되어 다시 살아나도록 
7) 담임목사의 2018년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공 예배 준수에 최선 다하도록 독려하고 실천하기에 역점을 두고 사역합니다.
2. 토요일 담당 청소 사역 도외시는 다름 사람에게 행하는 무례임을 명심하도록 독려  

 
설교요약 (SUMMARY)
2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1번째 강해)
제목: 사랑은? (3)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신 사사시대를 방불(彷佛) 하는 신 랜덤의 시대를 살면서도 그래도 이 정도로라도 선방하는 이유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마치신 주님께서 율법 교사들에게 날리신 직격탄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였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전하셨던 메시지는 ‘사랑하라’ 라는 테마였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4절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정의와 5절에서 언급된 정의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5) 사랑하기란 교만하지 않기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교만하다’는 헬라어 ‘프시오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를 적절하게 묘사한 설명이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번쩍한 것이 솜사탕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설탕가루를 기계에 부으면 아주 조그마한 가루가 큼지막한 솜털 같은 모양으로 커지는 것은 동심의 심정으로 보면 정말 경이롭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탐스럽기까지 했던 솜사탕의 실체는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는 설탕가루가 본질입니다. 설탕의 화학적인 성분을 기계적인 매커니즘을 통해 극대화하여 상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부풀린 것이 솜사탕입니다. 저는 ‘교만하다’라고 번역된 본문 원어의 문자적인 원래의 의미를 솜사탕이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하고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은 상대적 부풀리기입니다. 상대에게 본질을 숨기고 부풀려 포장하는 것은 아주 쉽고 단순하게 답을 말씀드린다면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 자신이 있다면 옆에서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도 괘념하지 않습니다. 본질은 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두 번째의 돌 판을 하나님께로 수여 받고 내려올 때의 극적 상황을 출애굽기 기자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29-35절입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전할 때는 본인의 얼굴에 비치는 빛에 상관이 없이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할 때가 아닌 모세 개인으로 백성들과 만날 때는 수건으로 자기를 가렸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런 반응에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 공동체에게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 그 이상의 여론몰이에 성공했습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모세는 본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자리를 마음만 먹으면 꿰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거기에다 그의 얼굴에서는 마치 하나님과 같은 광채까지 비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를 추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성 공동체가 자기를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모세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교만한 자로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또 그래야 모세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중보자로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전제는 내 스스로가 교만하지 않을 때라는 분명한 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풀러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리처드 마우어 박사는 ‘무례한 기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통찰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그 은혜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려면 먼저 승리주의 정신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고대하는 그 승리는 우리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어린 양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승리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겸손이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것을 바라보며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피조물에게 가장 어울리는 태도입니다.”(p,215) 나는 우리 교우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교만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6) 사랑하기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5절 전반절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여기에 ‘무례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케모네오’는 문자적으로 ‘격에 맞지 않은 일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격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버릇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인의 성경 번역은 ‘아스케모네오’를 ‘버릇없이 행동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의 주군이신 예수님조차도 당신의 제자들 앞에서는 반드시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러나 세족식을 마치신 주님께서 만찬을 집례하실 때 당신의 옷을 다시 갖추어 입으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12절입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베드로 역시 디베랴 바닷가로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아무리 급해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벗고 있던 옷을 다시 입고 주님이 계신 쪽의 갈릴리 호수로 뛰어내렸음을 요한이 보고합니다. 요한복음 21:7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격에 맞지 않는 것이 무례하다는 헬라적인 사고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단어를 생각하다가 갑자가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생각났습니다.공부한 사람은 피치 못해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편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라고 공부하게 한 것입니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다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웃을 위해 함께 돕고 살라고 돈을 버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분배를 이웃을 향해 나누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 물질적인 여유, 국가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그것을 갑 질의 근거요, 빌미로 삼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 일을 행하는 자의 무례함을 보여주는 극치인 것입니다. 또 하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사랑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인격 그대로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천박하고 가볍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설교에서 사랑은 배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려는 무례하지 않음을 전제함을 오늘 설교를 통해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사랑하기란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임을 명심하고 무례히 행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7) 사랑하기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이라고 본문 5절에서는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유익’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것’이라는 표현의 대명사가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된 본문을 직역하면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 것’ 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자기의 것’이라는 표현 속에 담보되어 있는 것은 상당히 광범위합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사물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것이라는 대상은 상당히 포괄적일 수밖에 없기에 저는 이 단어를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일체의 이기성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기란 일체의 이기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있는 말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가장 근접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입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 중에 가장 하나님 사랑을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자식에게 향할 때 당신의 이기성은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주군이신 예수를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사랑입니다. 적어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보내시고 결정하셨을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당신만의 고집, 당신만의 권위, 말 표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만의 이기성을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기주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이라고.
    미국 멘로파크 장로교회를 섬기는 존 오트버그 목사는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영혼이 헌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다.”(p,117)
몇 년 전, 이글을 책에서 만나고 저는 그 페이지에 이렇게 사족을 달아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우상은 바로 이기주의이다.” 사랑하기란 자기의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사랑하기란 그래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