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세속적 사랑의 개념들을 아는 대로 나누어 보자. | 경배와 찬양 (WORSHOP)● 세상 모두 사랑 없어 (찬송가 503장) ●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사랑은? (2) ● 본문 : 고린도전서 13:4-7 1)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관련하여 현대적 관점으로 풀어 해석해 보십시다. 담임목사 설교 참고. |
2) 사랑은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전도서 기자의 선언과 연관하여 현대적 관점으로 이 주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 ① 전도서 1:10 |
3) 적용하기 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시기하고 있지 않은가? ②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랑하거나 우쭐대거나 뽐내고 있지 않은가? ③ 사랑의 대상자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인정하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를 담당할 교육전도사 청빙을 위해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해 3) 2월 28일 주일 예배를 통해 초청할 대상자 섬김 프로그램 짜기(지역 셀에 맞게) 4) 남성 셀의 원활한 사역을 위해 5) 차량 운행 및 식사 봉사 등의 사역이 은혜로 진 행되기 위하여 6) 담임목사의 2018년 목회 승리를 위하여
● 셀 사역하기 공 예배 준수에 최선 다하도록 독려하고 실천하기에 역점을 두고 사역합니다. | 설교요약 (SUMMARY)1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0번째 강해) 제목: 사랑은? (2)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인간의 역사는 사랑의 거대한 담론이라는 해석의 틀 안에 들어가 있는 러브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 이야기라는 인간의 역사 중에 신이 인간을 사랑한 가장 드라마틱한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구도는 인간이 신을 사랑한 구도입니다. 그런데 유독이 우리 기독교의 이야기는 그 반대로 신이 인간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더 없이 알맞은 때에 오셔서 이런 일을 이루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다 준비되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약하고 반항적이어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그 때에 그 분은 자기 자신을 이 희생적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갈팡질팡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선하고 고귀한 사람을 보면 우리 안에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께 아무 쓸모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오래된 새 길’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픈 어느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그 날,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삶이다.”(p,237) 우리는 신이 아파한 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산고의 고통을 이기고 저와 여러분을 낳으신 것처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산고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3)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 개정판은 분명히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번역했는데 전에 보던 개역 판 버전에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아니하며’ 라고 번역된 이유는 헬라어 부정사 ‘운’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정의하는 동사 자체는 사실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동사가 아니라 긍정의 동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살피려고 하는 ‘시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젤로오’는 대단히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동사의 문자적인 뜻은 ‘열망(熱望)하다’ 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열망하다는 말은 열정적으로 바라는 것,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는 것입니다. 간혹 이 단어는 ‘질투하다’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질투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가장 상식적인 감정선(感情線)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내 산 강화의 압권인 십계명 수여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수(親手)로 쓰시면서 만들어주신 두 번째 돌 판에 새긴 글을 곱씹어 보십시다. 출애굽기 34:14절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여기에 번역된 ‘질투’라는 히브리어 ‘카나’를 헬라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성경 70인 역에서 ‘젤로오’라는 동사로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젤로오’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시기하지 않는다고 번역된 이 단어를 저는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라고, 그래서 사랑하기란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한 예로 들어보십시다. 누가복음 10:3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회 문화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은 남 유다가 중심이 된 이스라엘 사람을 좋아할 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0:33절은 조금은 의아합니다. 전혀 상식적인 않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이 단어가 여러 차례 교우들에게 설명한 ‘스프랑클니조마이’입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우리나라 말은 ‘불쌍히 여기다.’ 혹은 ‘민망이 여기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장을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라고 했습니다. 해서 이 단어의 의역은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간절히 열망하다’의 뜻으로 대단히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인이 다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열망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시간과 물질을 그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는 시간의 헌신을 강도 만난 자를 위해 행한 것입니다.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건네면서 이 사람을 돌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비용이 더 들면 다시 돌아와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진정성을 갖고 바라고 열망하는 삶입니다. 간절히 소망하는 것에 마음을 쓰는 것, 물질까지 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하기입니다. 사랑하기란 사랑하기 위한 일체의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이유로 이렇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즉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4) 사랑하기란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자랑하다’는 헬라어 ‘페펠류에타이’의 번역입니다. 톰 라이트 교수는 이 단어를 ‘우쭐대다’로 번역했고 유진 피터슨은 ‘뽐내다.’로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자극적인 단어를 여기에 기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은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했다시피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의 천국이었습니다. 또 다른 은사를 받은 자들도 거기에 뒤질 세 본인들이 받은 은사에 대하여 견고한 진을 형성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은사로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행동을 자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태들에 대해 바울은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은사인 사랑하기란 결코 자랑하거나 우쭐대거나 뽐내지 않는 것임을 천명함으로 은사 독점주의에 빠져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일부 그릇된 자들에 대해 분명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란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된 본문을 오늘의 언어로 어떻게 대치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기란 상대평가하지 않기입니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금언 중에 하나입니다. 부정의 의미가 아닌 긍정의 의미로 말입니다.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전도서 기자인 코헬렛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전도서 1:10절을 읽어보십시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세속적 가치에 있어서 우쭐 댈 수 있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새것이라고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치로 평가하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글을 통해 전도서 기자가 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군가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설익은 존재임을 알려주는 주님의 메시지임을 경성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기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은사가 우리 교우들에게 많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시대의 스승이었던 고 신영복 선생이 쓰신 ‘나무야 나무야’라는 수필집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는 문득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소나무가 아니라 소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26) 선생의 글을 가슴 폭에 담아 둔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사람인 것이 맞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자를 절대로 상대적인 평가하며 내 잣대로 가늠질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4절 후반절에서 바울이 선언한 사랑의 정의는 백 번 옳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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