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1.21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경험했던 최고의 사랑 이야기는?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의 사랑 비칠 때에 (찬송가 293장)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사랑은?(1)
● 본문 : 고린도전서 13:4-7
1)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히브리서 12:2-3절과 연관하여 사랑의 정의를 말해보자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대입해 보자.  

2) 사랑은 온유한 것이라고 했다. 문자적으로 온유함은 친절함 즉 배려함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고 했다.
★ 배려함
① 레위기 23:22
② 신명기 5:12-14  

3) 적용하기
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잘 참고 있는가?
②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배려하고 있는가?
③ 오래 참는 능력과 배려하는 힘을 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를 담당할 교육전도사 청빙을 위해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해
3) 1월 28일 소그룹 예배에 섬길 대상자 선정을 위해
4) 남성 셀의 원활한 사역을 위해
5) 차량 운행 및 식사 봉사 등의 사역이 은혜로 진    행되기 위하여
6) 담임목사의 2018년 목회 승리를 위하여

● 셀 사역하기

특별히 섬길 태신자 선정이 누락된 지체들을 독려하여 반드시 섬겨 다음 2월 마지막 주일에 초청하여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작정하고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1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9번째 강해)
제목: 사랑은?(1)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작가 이기주는 ‘언어의 온도’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이렇게 추론했습니다. “나는 생각할 사(思)와 헤아림을 의미하는 량(量)이라는 한자를 조합한 ‘사량’에서 사랑이 유래했다는 설을 선호한다.”(pp,120-121) ‘헤아림’의 국어사전적 뜻이 “사람의 마음이나 일의 속뜻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가늠하여 살피다.” 임을 접하고 이기주 작가가 선호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저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김중기 교수께서 쓰신 ‘생동하는 신앙’에 나오는 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어느 날 한 소녀가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답니다. ‘주님, 저를 얼마만큼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그러자 주님이 ‘이만큼’이러고 대답하시면서 그의 양팔을 쫙 벌리시더니 그만 머리를 떨어뜨리고 운명하셨답니다.” (p,116)

    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아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글을 잃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언젠가, 그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는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닙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나를 이만큼 사랑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나를 위해서 남기신 그 사랑의 언어들이 과연 어떤 것들인지를 알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주군 따르기는 그 사랑 행하기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랑의 정체를 바울이 너무나도 귀하게 설명해 줍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오늘은 4절 전반절에 나오는 두 가지의 사랑의 정의를 가지고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1) 사랑하기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고’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마크로뒤메이’의 어원적인 뜻은 인내하며 견딘다는 뜻도 있지만 또 하나의 의미는 화를 좀처럼 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4-7절까지에는 총 15가지의 사랑의 정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15가지의 목록 중에서 유독이 겹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참는다는 것입니다. 7절을 읽어보십시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물론 여기에 기록된 ‘참으며’(스테게이)와 ‘견디느니라’ (휘포메네이)는 단어 자체는 다른 단어로 쓰였지만 참는다는 개념으로 동일하게 사랑을 정의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만합니다. 이렇게 사랑의 정체성 중에 가장 성경적으로 지지받는 정의는 참는 것입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정의인 참으심을 몸소 실천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이 아닌 참으심의 삶으로 사랑의 진면목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3절을 보십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아주 대표적인 십자가에서의 참으심을 알려준 구절입니다. 십자가는 치욕의 형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2절에서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십자가라는 치욕을 개의치 않으셨기에 주군은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3절에서는 사람들의 모욕도 참으셨음을 알려줍니다. 자기를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3절에 ‘거역한 일’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에 기록된 정관사는 사물과 사건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사람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어떤 영어성경에는 ‘거역한 일’을 ‘거역한 죄인들’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할 최고의 감사는 당신에게 치욕을 주고 부끄러움을 주었던 사람과 십자가의 치욕에도 참아주신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정의하는 첫 번째의 단어 표기를 ‘사랑은 참고’라고 표현하지 않고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이번에는 성령의 열매 9가지를 열거하면서 사랑은 제일 목록에 그리고 참음은 중간 지점인 4번째 목록에 놓은 것은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 사랑하기란 온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4절 중반절에 기록했습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이 구절만 놓고 보면 항상 병행해서 떠오르는 성경구절이 아마도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팔복의 온유 구절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5:5절 말입니다.“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런데 여기에 기록된 ‘온유’ 라는 단어는 오늘 사랑의 정의를 내리는 온유라는 단어와는 전혀 다른 ‘프라우스’ 라는 단어입니다. 산상수훈에 언급된 온유는 말 그대로 온순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온유하며’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크레스튜에타이’는 원어적인 뜻으로 번역하면 더 가까운 뜻이 따로 있습니다. ‘친절하게 대하다.’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을 비롯한 많은 성경은 어원에 맞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우리나라 단어 중에 친절하다는 단어와 가장 가까운 단어가 있습니다. ‘배려하다’입니다. 친절은 곧 배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적용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곧 배려라고.

    류시화 시인이 쓴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보면 라코타 인디언 원주민들이 행하던 풍습을 하나 소개합니다.“인디언은 한 모금의 물을 마시기 전에 먼저 어머니 대지에게 약간 부어 주었다. 그것이 어머니 대지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지도 적지도 않게 음식을 떼어 어머니 대지의 가슴속에 사는 영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p,71) 우리는 이런 행위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미신적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신적 행위라고 비난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음식을 배에 채우기 위해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철학자 강신주 교수가 한 번은 텔레비전에 나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참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채우고 또 채우는 행위는 마치 사료를 동물들에게 채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사랑은 친절한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친절은 다시 강조하거니와 배려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남기는 것은 ‘나’라는 인격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지만 남을 배려하는 사랑의 방법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강독한 레위기에 보면 절기에 대한 규례를 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아주 엄숙한 명령으로 다음의 지시를 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레위기 23:22절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소위 말하는 이삭줍기의 사랑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들을 위해 행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설교를 통해 나누었던 은혜를 다시 한 번 곱씹겠습니다. 신명기 5:12-14절을 읽어 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무엇이 이 구절이 말하는 압권입니까? 너, 네 아들, 네 딸이 쉬는 안식일에는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하라는 공동의 안식 명령이었습니다.

    쉼을 같이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배려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합니다. 교회 오빠 주인공인 이관희 집사를 방송을 통해 만나면서 정말로 이 집사에게 받은 감동의 압권은 그가 너무나도 화를 내야할 타이밍임에도 불구하고 분노하지 않는 평정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들어도 괜찮았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하나님께 대들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를 깊이 곱씹다보면 답이 하나 나옵니다. 이관희 집사는 정말로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려하는 이관희 집사를 보면서 그에게 이렇게 그의 별칭을 붙여주고 싶었습니다. “온유한 교회 오빠 이관희 집사”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대중가수는 이런 의미를 갖고 부르지는 않았겠지만 깊이 고찰하면 그 가수의 노랫말대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배려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