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2018년 꼭 실천하고 싶은 사랑 행하기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하나님은 외아들을 (찬송가 294장)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사랑이 없으면 ● 본문 : 고린도전서 12:31-13:3 1) 1절에서 바울이 사랑하기를 ‘칼코스(징)’와 ‘큄발론(꽹과리)’과 연관하여 발언한 이유를 말해보자. 2) 2절에서 바울이 사랑하기를 ‘예언하는 능력’, ‘지식’, 믿음‘과 연관하여 설명한 이유를 말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사랑하기를 배제한 구제, 혹은 자기희생과 헌신을 자랑삼았던 적이 있었는지 반성해 보자.
② 담임목사가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말했던 교훈을 함께 나누고 나에게 적용해 보자. “사랑하기란 명분 쌓기가 아닙니다. 사랑하기란 예수와 다른 길이 아닌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서 내려오지 말라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2018년 세인교회의 올바른 부흥과 승리를 위하여 2) 2018년 사업체 심방을 위하여 3) 지역 셀이 건강한 소 날개 역할을 감당하여 교회 부흥의 진원지가 되도록 (새로 임명된 리더와 인 턴들을 위하여) 4) 교육기관을 담당할 교육 전도사 청빙을 위하여 5) 환우들을 위하여 6) 2018년 담임목사의 리더십과 목회 승리를 위하여 | 설교요약 (SUMMARY)1월 1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8번째 강해) 제목: 사랑이 없으면 본문: 고린도전서 12:31-13:3
아베 피에르 신부는 본인의 걸작인 ‘단순한 기쁨’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로 구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제시한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피에르가 말한 사랑하는 것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구절은 12:31절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 은사들을 교회 공동체에게 선물로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는 아주 이상하고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은사 앓이를 했는데 바로 방언하기와 예언하기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왜곡된 고린도교회의 은사주의에 대하여 정말로 중요하고 가장 좋은 은사, 큰 은사인 ‘사랑하기’라는 은사를 사모할 것을 종용하며 쐐기를 박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정의한 사랑하기의 정체는 무엇이었습니까?
1) 사랑하기는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사랑하기와 비교합니다. 방언과 비슷한 유비로 사용한 단어가 천사의 말입니다. 방언의 영적 긍정성은 교회 공동체에 천사가 말을 하며 서로 교통하는 신비로운 은혜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방언의 유익이 온전하게 교회 공동체에 전염될 때 오늘 우리가 교제 찬양으로 부른 ‘해같이 빛나리’의 가사처럼 방언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를 나눈 공동체의 모습은 천사도 흠모 하는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사랑하기가 전제된 방언하기입니다. 바울은 본문 1절에서 사랑하기가 전제되지 않은 방언하기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구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칼코스’는 문자적으로 더 가까운 단어가 ‘징’입니다. 또 다른 단어 ‘꽹과리’는 헬라어 단어 ‘큄발론’의 번역인데 이 악기는 한 가지 음만 내는 악기였습니다. 데이빗 프라이어의 고린도주석을 보면 그는 이렇게 이 두 악기에 관한 신비종교에 대해 주해했습니다. “고린도는 자연의 신인 디오니소스(Dionysus)와 야생 동물의 여신인 퀴벨레(Cybele)를 섬겼다.(중략) 분명 고린도의 거리에는 그런 예배자들의 특징인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칼코스(징)’는 구리조각이었고 ‘큄발론(꽹과리)’은 가락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한 가지 음만을 내는 악기였다. 신비 종교에는 이 두 가지가 필요했다. 신을 불러내기 위해서, 마귀들을 내쫓기 위해서, 아니면 숭배자들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들은 선율이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화음을 내지도 못했다. 둘 다 강한 단조음을 울렸으며, 계속 짖어대는 개처럼 대단히 거슬렸다.”(pp,306-307) 우리는 왜 바울이 칼코스(징)와 큄발론(꽹과리)이라는 단어를 동원하게 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방언이라는 은사를 사랑하기에 연관하여 쓰지 않으면 곧 그 은사는 독선이 되고, 전혀 교회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무익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랑하기가 전제된 방언은 단 한 가지의 단조로운 소리를 내는 칼코스와 큄발론과 같은 악기와는 달리 여러 소리를 내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는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는 합심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기는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9절을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여기에 기록된 ‘합심하여’라는 헬라어 동사가 ‘쉼포네쏘신’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조화를 이루다’, ‘같은 마음으로 동의하다.’의 뜻입니다. 이 헬라어 단어에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관현악단들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의미하는 심포니(Symphony)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사람의 증거는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2) 사랑하기란 종교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앙인의 당연한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하는 능력을 받은 자가 발휘하는 영적 시너지는 모든 비밀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엄청난 예언하는 능력의 은사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랑하기라는 은사와 유리되었다면 이 예언하는 능력의 은사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헛것이라는 점을 여지없이 표현합니다. 바울의 역설을 지지하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의 해석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예언하는 능력으로 임하는 또 다른 곁가지로 바울은 다른 은사와 당시 이단적인 상징이었던 지식(그노시스)까지 확산시켰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8-10절에서 예언의 은사와 더불어 나누었던 은사가 믿음이라는 은사도 있었음을 나누었습니다. 지난 신념 감사주일에 설교를 통하여 주님께서 변화산상에서 내려오자마자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과 실랑이하며 항의하는 아버지의 기사를 살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주님께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까? 신년감사주일에 살핀 마가복음 9장의 기사로 국한하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을 말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을 붙인 마태복음의 기사로 평가하면 또 하나 대단히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17:20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믿음의 부족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은사를 사랑하기라는 은사를 통해 다시 조명합니다. 재론하지만 믿음은 대단히 중요한 성도가 가져야 할 요소이자 무기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도 엄청난 기적과 표적을 나타낸다는 주님의 일성만으로도 믿음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마 무시한 믿음의 은사를 갖고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사랑하기라는 최고의 은사와 유리되어 있다면 그 믿음의 은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바울의 비장함을 봅니다. 두 번째로 살펴야 하는 것은 지식입니다. 주후 1세기 고린도 시는 여타 다른 도시처럼 영지주의자들의 여파와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고린도 교회의 밑힘이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치하려는 무서운 이단적 요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지식(그노시스)추종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는 자들에게 바울은 역시 쐐기를 박습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사랑하기가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예언하는 능력, 지식이라는 세 가지의 테마를 통해 배우는 도전이 있습니다. 사랑하기는 결코 종교적인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신앙의 결과물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지 않으면 종교인, 성직자, 교회 안의 직분자의 삶은 거짓이며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직격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기란 종교라는 것을 빌미로 그냥 해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면 체화되어 저절로 나와야 하는 삶의 결정체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한 사도가 말한 것은 정답이자 해답입니다. 요한일서 4: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이렇게 기술했는데 제 심장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기생물들을 창조하셔서는, 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십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이든 모든 사람의 발명자이시자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입니다.”(p,216) 사랑하기란 숙주 되어 주신 하나님을 믿는 자이기에 당연히 주님이 하신 대로 우리도 삶으로 나타내고 살아내야 하는 결과물인 것입니다. 방점을 찍으십시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사랑하기는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인색하지 않은 구제와 몸을 불사를 정도의 열정적인 헌신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합니다.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다가 아주 흔쾌한 해석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2%의 여운이 남아 있어 찝찝했습니다. 적당히 구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 구제했다면 사랑이지 않을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면 그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이타적 사랑의 절정이 아닌가! 그런데 뭐가 문제지! 에 대한 선명한 답을 구할 수가 없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표준 새 번역 성경 해석을 접하면서 그 고민이 풀렸습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a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a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가 내 몸을 불사르기 위하여')” 바울이 직시한 것은 본문 3절에 기록된 전적인 구제, 전적인 자기희생의 목적이 주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주님 따르기가 아닌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행위였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전적인 구제와 자기희생의 구현이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포석이요 행위라면 그것은 주님이 행하신 사랑하기가 배제된 껍데기에 불과한 종교적인 요식행위이며 포장되어 있는 종교적 쇼맨십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과는 상관없는 종교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먼저 행하신 사랑을 사랑하기는 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명분 쌓기가 아닙니다. 사랑하기란 예수와 다른 길이 아닌 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주님이 나에게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할 때 나도 십자기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예수 그리스도 주군 따르기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을 합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른 자로서 마땅히 행하는 신앙의 결과물로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자들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함으로 내가 주님께 속해 있는 자임을 세상에 증언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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