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12.24 설교 요약지2024-04-23 16:2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주 지역 셀 사역은 수요일 저녁 7시 연합예배로 드립니다.  

 
경배와 찬양 (WORSHOP)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사역하기 (WORK)
설교요약 (SUMMARY)
12월 2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6번째 강해)
제목: 응원하십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12:21-27

    창세기 16:11-14절은 하나님의 살피심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임한 것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어느 한 편에 기울기를 기울여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에게 편만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과 또한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붙들어주신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약한 자를 ‘브엘라해로이’(살피시는 하나님) 하신다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누가복음 4:18-19절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포로 된 자에게 자유 함을 주시는 것,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응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몸의 비유를 통해 은사에 대한 총론을 마무리하는 발언도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주는 교훈임을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은사에 대한 유익을 알려주는 두 번째의 메타포를 선사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본문 22-23절).
    바울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등등의 표현으로 소개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이런 몸의 부분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어느 경우에는 더 요긴함을 역설합니다(22절 후반절). 덜 귀하게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여긴다고도 했습니다.
    압권은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으로 취급당한다고 한 23절의 발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교훈을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주저 없이 선포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본문 25-26절).
    몸의 구조는 유기체로서 요 없는 장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팩트를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아주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은사 때문이었습니다. 은사가 바로 이런 유기적 관계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본문 27절).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각 부분의 역할을 하는 지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고 낮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은사이고, 좋고 나쁨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중요하고 안 중요하고 라는 관점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은사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주시는 은혜는, ※ 바람직한 은사 활용법은 각종 은사를 받은 자들끼리 서로 응원해 주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을 받은 은사자와 지식의 말씀은 받은 은사자가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그리고 하나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서로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들과 함께 서로 응원함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예언하는 은사자들과 서로 응원하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영들 분별의 은사를 받은 교우들은 방언하는 자와 통역하는 자와 서로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 응원의 관계를 가지라는 것이 오늘 바울의 권면이자 명령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2-3절에서 빌립보 교회에 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 집사들을 거명하면서 이 두 사람에게 권하고 있는 세 가지의 동사가 보입니다. 그것은 같은 마음을 품으라, 참으라, 도우라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단어들만 가지런히 놓고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당시 빌립보교회의 정황이 엿 보입니다. 무언가 이 두 사람은 대립의 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빌립보서가 침묵하고 있기에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두 여인의 반목과 갈등은 빌립보라는 좋은 환경의 교회를 좀 먹고 있었기에 바울은 두 여인에게 강력하게 함께 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나오는 단어 중에 헬라어 접두어 중 ‘함께’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쉬’라는 접두사 단어의 합성어가 무려 5번에 걸쳐 등장하는 것도 바울이 이 두 사람의 화해와 일치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유기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망하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은 공동체 전체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한 지체를 고장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고장 나게 하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의 언어를 재등장시킨다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등을 공격하여 그것들을 무력화시키면 교회는 와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회를 무력화시키고 공격하는 일체의 사탄적인 시도에 항거하는 방법은 은사를 받은 지체들이 서로를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쓸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교회, 훌륭하지 않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 교회, 내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냥 하나(una)의 교회입니다.
    누군가가 자기은사에 대하여 최고의 은사라고 우기면 그 사람과 싸우되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역할이 교회에서 최고라고 우긴다면 그 사람과 피 흘리기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꿀 때까지 말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기의 은사를 갖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겸손하게 사용하고 또 다른 지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존중하여 그 은사자를 응원해 주면 그 사람을 열심히 응원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 삶이 가지고 있는 은사도 높이 평가하여 열심히 응원해 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바울이 말한 본문의 교훈이자 가르침입니다.

    사도행전 7:54-57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이 장면의 압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그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 서셨다는 표현입니다. 도무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자리에 앉아 계실 수 없으셨던 주님, 그래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응원해 주셨던 주님이 보고됩니다.
    여러분이 발걸음을 옮기는 장소에서 여러분이 받은 은사로 그들을 잘 섬기고 응원하게 되면 아픔을 두 배나 빨리 극복하게 하는 요인이 될 줄로 믿고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우리 세인지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