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11.26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대하여 어떤 감사가 있습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찬송가 588장)
●  하늘 소망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여러분은 진짜로 교회에 감사하십니까?
● 본문 : 데살로니가전서 3:6-10
1)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공동체 지체들의 무엇으로 인하여 기뻐하여 감사했습니까?
※ 설교 테마의 첫 번째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자. (살전 3:9-10)
⓵ 데살로니가전서 1:3
⓶ 데살로니가전서 1:8  

2) 본문 7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감사의 내용을 말해보자.
⓵ 본문 7절 읽기 
⓶ 요한계시록 4:2절을 병합하여 내용을 말해보자.  

3) 적용하기
⓵ 나는 내 교회에 대한 주존감이 있는가? (테마와 관련하여) 
⓶ 적지 않게 교회를 통해 위로를 받은 것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⓷ 세인 공동체가 바른 교회로 지속해서 서 가도록, 하늘 위로가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서정수, 김경옥, 이종구, 이상순 등등)
2) 시험 성적으로 토대로 수험생들의 진학에 대한 지혜를 위하여
3) 해피 엔딩기도회를 통해 하나님 교회의 기도 사역이 응답받도록
4) 12월 31일 송구영신 주일 영혼 추수를 위하여
5) 12월 사역을 위하여
6) 제 10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2018년 1월 7일)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설교요약 (SUMMARY)
2017년 11월 26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3:6-10
제목: 여러분은 진짜로 교회에 감사하십니까?

  ‘감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서적 행위입니다. 감사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수단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는 대단히 중요한 인간 행위이기까지 합니다. 세상사 이치에도 감사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감사에 더 뜻 있는 접근을 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제 2차 전도여행을 하고 있었던 시기에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로 넘어오게 된 이유는 아덴에서의 사역에서 별 신통하지 않은 결과를 경험한 뒤에 어쩔 수 없이 고린도로 내려오게 되었고 당시 고린도에는 바울이 몸을 의지할 만한 사람이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래서 참으로 외로웠던 상태였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초창기에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바울의 전도여행의 족적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은혜롭게 마치고 빌립보를 시작으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에 이르는 제 2차 전도여행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에서 교회를 세운 뒤 쫓겨난 후 사역의 장소를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옮겼는데 이곳에서도 동일한 일을 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타의에 의해 바울은 아덴에 도착을 했으나 아덴의 금욕주의자들인 스토아 철학자들과 반대에 입장에 있었던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학파의 사람들 그리고 헬라 철학에 심취해 있었던 아덴 사람들로 인해 이전 지방에 비해서 복음 증거 사역에 적지 않은 곤혹을 당했고 열매도 많이 맺지 못하는 쓴 맛을 본 뒤, 고린도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바울의 동역자였던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있었고 실루아노 역시 아마도 선교적인 차원에서 아덴에 남아 있도록 바울이 선교정책을 폈기에 또 다른 우상의 도시였던 고린도로 넘어갔던 바울은 정말로 철저히 고독한 상태에서 홀로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곳에서 후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붙여 주시기는 하지만 이 부부를 만나기까지는 고독과 이방인과 우상과 싸워야 하는 힘든 시기를 바울은 보내야 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드디어 고린도 사역을 위한 팀을 구성하도록 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했던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왔고, 아덴에 머물던 실루아노까지 고린도로 내려와 바울 팀과 합세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전 보다는 힘을 얻고 고린도 사역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을 하고 내려온 디모데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에 대한 보고를 들은 뒤에 반응한 내용이 데살로니가전서 3:9-10절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와 자매들로 인해 내가 매우 기쁘다는 사실은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매듭짓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감정 선이 굵직하게 나타날 정도로 감동하고 있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 지체들이 이루고 있는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본문 6절).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를 사역하면서 개종시킨 자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바울은 그리 오래 사역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대부분 어린 신자들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디모데의 보고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은 바울을 너무나도 행복하게 한 주인공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의 정체는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데살로니가는 분명 지역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라는 지역을 뛰어넘어 인근 각처였던 마게도냐, 아가야(아덴과 고린도 지역을 아우름)에 이르기까지 선한 믿음의 공동체로서의 영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행복한 보고를 디모데를 통해 받은 것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1:8). 바울은 이로 인해 본문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교회에 감사해야 하는 신학적 타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교회가 바로 서면 나 또한 바로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설립의 연수가 오래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자들이 세운 아주 짧은 교회 연수를 갖고 있는 신생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세 가지의 핵심적 신앙의 가치를 사수하며 굳건히 서 나아가며 성장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이교와 우상 숭배의 이력과 국가 권력에 대한 숭배 압박이 있었음에도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끝내 잘 달려갔습니다. 그리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기들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인근 아가야 지역에 이르기까지 선한 크리스티아노스의 귀한 본을 보이며 주후 1세기 교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렇게 승리했다면 그 승리의 주역은 데살로니가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과 같은 명제를 그대로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이 순기능적인 은혜를 역으로 해석하면 현기증이 나는 아픔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바로 서 있지 않다면 나도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잘못 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올바른 모습으로 서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내 신앙이 병들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교훈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쓴 오늘 바울의 이 편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건강한 교회, 바른 신학을 기초로 한 교회, 성서적인 말씀을 비틀어 인위적인 교회 구조에 유리하게 해석하지 않는 교회가 섬기는 교회인 성도는 그렇게 또한 올바른 신앙적 삶을 살아낼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성서적인 방향성과 다르게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는 반성서적, 반신학적 풍토에 빠져 있는 교회 공동체에 있는 성도는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위험성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바울은 본문 8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극찬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고린도에 있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들아, 나는 당신들이 주 안에서 굳게 서 있다는 사실 때문에 오늘 고린도에 있는 우리 사역자들(바울, 디모데, 실루나오, 브리스길라, 아굴라 등등)이 역동적인 승리의 삶을 살아내며 승리하고 있다.”고. 여러분이 섬기는 세인 교회로 인하여 진정성을 갖고 감사하기를 권면합니다.

    2) 교회 공동체는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하늘 위로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본문 7절). 바울이 고린도에서 홀로 사역을 해야 했던 시기에는 외로웠지만 사도행전 18장 사역을 기점으로 동역자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의 사역을 위해 함께 한 멤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 때문에 적지 않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바울의 동역 팀들이 있었던 고린도는 적진이었습니다. 그것도 적의 심장부 한 복판과도 같은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피 흘리는 순교적 사명이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본문 7절에서 우리들의 곤고함이 너희들로 인하여 극복되고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고 말입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소중한 까닭은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우리들을 눈물짓게 하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표현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은혜로 서로 간에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하여 본인의 현재 상황의 어려움을 이길 위로를 받았다고 분명히 본문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요한계시록 4:2절). 요한계시록 4장의 배경은 천상에서 드려지는 하늘의 예배입니다. 다시 말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드려지는 하늘 교회의 예배입니다. 하늘 교회의 예배에 보이는 가장 감동적인 클라이맥스는 하늘 교회의 보좌에 주님이 앉아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중앙에는 주님이 앉아 계십니다. 이 은혜는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단체나 공동체에서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고유한 권위를 세상에 팔아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좌는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보좌에 여전히 앉아 계신 주님을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그 분이 계신 교회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세인교회가 바른 신학적 내용을 기초로 여러분 곁에 든든히 서 있음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의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께서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위로로 여러분들을 지난 세월 동안 이끄심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