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7.11.19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추수할 영혼 나누기– 1차: 11월 26일, 2차: 12월 31일  

 
경배와 찬양 (WORSHOP)
● 성령이여 강림하사 (찬송가 190장)
● 살아계신 성령님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2)
● 본문 : 고린도전서 12:8-11
1)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가 언급한 ‘믿음’의 은사를 에베소서 2:8-9절, 히브리서 11:8-10절을 대입하여 설명해 보자.
⓵ 데이빗 프라이어의 ‘믿음’ 은사 정의:
⓶ 에베소서 2:8-9의 정의:
⓷ 히브리서 11:8-10의 정의:
*결론:  

2)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한 신학적 조망을 말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믿음의 은사를 경험한 실제를 나누어 공유하자. 
⓶ 신유의 은사를 체험한 실제를 나누어 공유하자. 
⓷ 세인 공동체에 신유와 믿음의 은사가 충만하게 임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환우들을 위하여 (서정수, 문혜경, 김경옥, 이종구, 이상순 등등)
2) 대학 진학을 앞 둔 수험생들을 위하여(11월 23일)
3) 해피 엔딩기도회를 통해 하나님 교회의 기도  사역이 응답받도록
4) 추수감사주일과 12월 31일 송구영신 주일 영혼 추수를 위하여
5) 이 땅의 교회와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하여
6) 제 10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2018년 1월 7일)
7)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해피엔딩 기도회 실행 지침 점검
2) 수험생들 격려하고 응원하기
  

 
설교요약 (SUMMARY)
11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52번째 강해)
제목: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2)
본문: 고린도전서 12:8-11

바울이 세 번째로 소개하고 있는 은사는 3) 믿음이라는 은사입니다.

  본문 9절은 믿음이 은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믿음이 신앙을 가진 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산물이지 은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하게도 믿음은 분명히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신학적 접근으로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는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라는 은사는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열매인 충성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고지식함도, 멍청하게 속는 것도, 가벼이 믿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기록된 믿음이라는 은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붙드는 것입니다.”(pp,273-274)
  믿음은 인간의 의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인간의 의지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난다면 구원, 은혜, 축복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배태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자,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사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절). 이 구절을 전제하여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의 주장을 접목하여 설명한다면 믿음이라는 은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붙들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시는 은사’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가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주하고 있을 때 웬 사람들이 들이닥쳤음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처음 본 베드로에게 소개합니다. 우리들은 가이사랴에 거하는 고넬료의 심부름으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인데 이유는 고넬료가 당신에게 심방을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부지불식중에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심방요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 사람들과 함께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이동합니다. 마침 베드로가 도착한 가이사랴에는 고넬료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을 친척들과 함께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사도행전 10:28-29절).
  이 말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실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신호를 보내셨는데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때가 되면 다만 그 일에 대하여 거부하지 말라는 사인으로 받았기에 오늘 나는 당신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부른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베드로가 욥바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 부정한 음식에 대한 거부를 하나님께서 나무라는 목소리로 들었지만 그것이 바로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심방하라는 사인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따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가이사랴에 왔지만 사실은 기분이 별로 내키지 않았던 일임을 베드로가 분명하고 솔직하게 시인한 셈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을 받은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하는 시간에 먼저 경험한 하나님의 환상에 대해 소상히 베드로에게 말을 합니다. 욥바에 사는 베드로를 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해서 자기가 사람들을 보내 당신을 청했고 여기에서 당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음도 고지하기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 있다는 고넬료의 신앙 고백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0:34-3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기에 기록된 ‘깨달았도다’의 번역인 ‘카타람마노마이’는 ‘손으로 움켜쥐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지만, 아무 것도 체감할 수 없지만 마치 ‘손위에 올려놓고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믿음이라면 그것은 분명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선물이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은혜를 이미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였던 아브라함을 기막힌 통찰로 소개합니다(히브리서 11:8-10).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은혜, 바로 이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번째의 은사입니다.

4) 병 고치는 은사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심 되어야 할 성도는 ‘아픈 자’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중심이 아픈 자라면 당연히 교회 사역 중에 대단히 중요한 것은 병 고침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 병 고침이라는 은사가 상업화되었다는 절망입니다. 병 고침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꾼들이 한국교회에 즐비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병 고침을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20세기 말에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많이 횡행시켰던 종교적 일탈이었고 오늘날에는 신사도적 경향의 단체들이 근근이 그 맥을 이어가며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차원에서 치유의 은사를 인위적으로 이용한 악한 자들의 면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절대로 간과하거나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병 고침의 은사들은 성령의 전적인 일하심으로 우리들의 현장에서 일어남으로 인해 수많은 아픈 자들의 고통을 치료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9절 본문에 기록된 ‘병 고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이아마이온’은 그 문자적인 뜻이 원래는 ‘치료도구’ 혹은 ‘약’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통하여 치유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렇게 확장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치유란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이기도 하지만 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연 은총을 통한 병 고침도 함께 포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영과 육의 질병이 고스란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영적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마땅히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주는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동시에 육체적인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자들을 먼저는 자연은총으로 치료하고 동시에 그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 질병들을 떠나가게 하는 능력을 교회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리자 이것을 이사야 예언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골방에 들어가 벽면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치유를 소원합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한 것이 끝난 것을 보신 주님이 이사야를 불러 그의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음을 알리게 하셨습니다(이사야 38:1-6절).
  주목할 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히스기야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도구로 사용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지 그가 무슨 주술적인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히스가야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재론하거니와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행한 종교적, 신앙적 행위는 그 어디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병을 고치신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치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치유는 정녕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사입니다. 다만 히스기야는 치유를 사모했고, 소원했던 것 뿐입니다. 치유는 소원하는 자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은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치유를 만드는 자에게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만들어주겠다는 자에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각 종 질병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오십시오.” 라는 홍보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치유는 하나님이 소원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사요, 선물입니다.
 
  은사는 주님이 주시는 변하지 않는 고유한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그 은사를 나에게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의도는 그 은사들로 통하여 하나님 교회의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은 물론, 나에게도 견고한 신앙의 은혜를 유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부여되는 선물입니다. 바라기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훼파하는 믿음의 은사들을 부여받았고 또 부여받을 것인데 그 믿음을 선용하는 지체들이 되기를 바라며 믿음의 은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병 고침의 은사도 함께 부여 받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오늘의 현장에서도 증언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