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4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37) 본문: 히브리서 10:26-31 제목: 빠져 나가는 것을 경계하자 서론) 교회에서 인도하는 두 개의 소그룹이 함께 나누고 있는 박영선 목사의 ‘구원 그 이후’라는 책은 이제까지 출간된 책자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이후에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개진한 책 중에서는 최고의 책이라고 말할 정도로 수준 높은 책입니다. 뼛속까지 성결교회 목사인 제가 뼛속까지 예정론자인 박영선 목사의 글을 이렇게 인정한 이유는 그만이 갖고 있는 성도의 성숙이라는 화두에 집중하는 그의 영적 능력과 고집에 부분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기독교는 이해와 납득의 대상물이 아닙니다. (중략) 우리가 분명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공감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수학이요, 과학이요, 내 수준의 이해력에 불과한 것입니다.”(박영선, “구원 그 이후”, 새순출판사, 1987, 14-15) 제가 가지고 있는 ‘구원 그 이후’는 1987년 판이기에, 제가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읽은 책입니다. 신학에 대해 일천했던 신학교 졸업반 시절, 박 목사의 이 글은 제게 망치로 머리를 타격한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박 목사는 이렇게 과학적인 필요충분조건에 합한 것만 믿는 것을 기독교 신앙으로 둔갑시키는 행위는 신앙 출발의 원점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다바르)가 아니라, ‘나’라는 자기중심이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박 목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독교 신앙의 왜곡을 바로 잡고 뒤집어엎는 강력한 메시지를 ‘구원 그 이후’ 서두에서 밝힙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나로부터 출발 된 것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까지 우리를 몰아붙이는 것이며, 그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위의 책, 22.) 박 목사의 이 목회신학적인 고집과 도도함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박영선 목사의 글은 빠짐없이 섭렵했고, 그의 글에 부분적으로 열광하고 흥분했던 지난 세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글에 열광하고, 그의 목회신학적인 갈파에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목회신학 전체에 아멘하고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글 여러 곳에 등장하는 강력한 예정론적인 사상에 대해서는 반대로 혀를 내 두를 정도의 비평적 관점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전례가 있는 것처럼, 저는 예정론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목사입니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이유를 단지 제가 서울신학대학교라는 웨슬리 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학교를 졸업한 것만으로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성경 전체는 아니더라도 성경 곳곳에 드러나 있는 성도의 책임적 반응과 자유의지적인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에 더 많은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읽은 본문은 예정론적인 구원론을 주장하는 여타 다른 말씀 구절에 대단히 적절한 카운터-파트의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본문이 시작되는 26-27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다면 그것을 속죄하는 제사는 없고 두려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소멸할 무서운 불만 있을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 히브리서 10:26-27)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도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받았으며 이제 알고 있는 모든 진리를 버리거나 외면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는 것이며, 우리는 혼자서 심판을 마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심판은 맹렬한 것입니다.” (메시지 히브리서 10:26-27) 본문은 캘빈주의의 핵심적 교리인 성도의 견인 사상을 무색하게 하는 직격탄입니다. 주목할 구절이 크게 보입니다. ‘고의적으로 계속 죄를 짓는다면’ 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의 남용과 악용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했던 뒤 배경은 히브리서 강해를 통해 앞에서 계속해서 강조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강조한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라는 설교문을 받는 대상들 중에는 상당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썩어질 옛 언약인 유대 율법주의로 회귀하려는 무리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대단히 고의적으로 복음을 훼손하고 짐짓 죄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가톨릭 사제이자 치유 사역자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맥너트가 말한 갈파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부서진 바이올린으로는 연주하실 수 없다.” (프란시스 맥너트, “치유”, 무실, 91) 고의적 범죄에 대한 경종입니다.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유일성을 가르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의 길을 고의적으로 저버리고 옛 구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음을 에두른 경종으로 프란시스 맥너트의 말을 적용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자들에게 임할 것이 한 가지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는 강조입니다. 그것도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철저히 개인적으로. 조금만 더 깊이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28-30절을 읽겠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28절의 기록은 새겨야 합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니와’ 구약성경 신명기 17:6절을 소개합니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이 구절을 인용한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생명 경시에 대한 경종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금 소개할 성경적 내증은 주목할 만 한 메시지입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광야 생활동안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아픔 역사가 또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고라, 다단, 아비람이 약 250명의 족장들과 패거리를 만들어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반기를 들고 반역한 기사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모세와 아론만이 이스라엘의 리더로 일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라는 레위의 증손이고 고핫의 손자였던 이스할의 아들이었기에 같은 레위 지파 소속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도 리더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다단과 아비람은 르우벤이라는 장자 지파 출신이기에 마땅히 자기들도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들이 요구하는 리더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내세운 일은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향로를 가지고 여호와의 성소에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수적으로 많은 대적들이 같은 방법으로 향로에 불을 붙여 가지고 와서 모세와 아론이 행하는 방법대로 250개 향로를 자기들도 단 위에 올린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모세와 아론에게 회중에서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이 분노하셨고 회중 전체를 멸하시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계획을 알게 된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 합니다. 죄 없는 백성까지 멸하시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모세가 간절히 중보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고라, 다단, 아비람 그리고 족장 250명이 서 있는 땅이 갈라지게 하심으로 그들만 땅이 삼키는 징벌을 내리심으로 반역 사건을 종결하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이 조명 받아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는 모세와 아론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기초였습니다. 하지만 이 율법의 기초를 고의적으로 어기려는 자들을 심판하신 대표적인 사건이 고라의 반역 사건입니다. 이들의 심판 과정에는 두 세 사람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이라는 수많은 증인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반역 사건을 통해 적용하겠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이 28절 이후에 어떤 말씀이 이어집니까? 29-30절을 다시 곱씹겠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대조하여 강하게 역설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한 자의 심판도 이렇게 무겁거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짓밟고, 그 분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성령을 욕되게 한 자들에게 임할 형벌을 어떻게 이론으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배교주의자들을 세 가지로 정의한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⓵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자. ⓶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자. ⓷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 이들에게 임할 대단히 서늘한 선포는 이것입니다. 심판을 주께서 친히 하신다는 선언 말입니다. (30절) 이상을 열거한 히브리서 저자의 마지막 본문의 경종을 들어보십시다. 본문 31절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공동번역 성경이 마음에 와 닿아 31절은 이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드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표현의 언어적 유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 단락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핵심은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점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의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자일까요? 다시 강조하지만 이 질문의 답이 오늘 설교의 레마일 터인데 이 답을 언어적 유희를 통한 역설의 표현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라는 손에서 빠져 나가는 자들입니다. 저는 예언서 요나에 기록된 말씀을 해석할 때,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성서해석의 고집이 있습니다.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예언서 요나를 예정론적인 해석으로 접근하며 해석합니다. 부연해 보겠습니다. 요나의 일생을 요약해 보십시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메시지를 위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원수의 나라였던 앗수르가 멸망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에 승선합니다. 이를 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그 배에 풍랑을 보내셨고, 그 풍랑을 일으키게 한 요주의 인물이 요나라는 것을 선장과 승선 한 자들에게 알리심으로 그를 바다에 던지게 하셨습니다. 마침 하나님이 미리 예비한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켜 그를 삼일 만에 육지에 토해 냄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 니느웨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하신 사건에 대해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달래시며 하셨던 마지막 발언이 요나 4: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말 그대로 니느웨의 입장에서는 해피엔딩 스토리입니다. 이 스토리를 캘빈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엇나가려는 요나를 회개하게 하셨고 그를 견인하셔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니느웨까지 구원하시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요나 예언서를 읽을 때마다 저는 그렇게 성경이 읽혀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부정이든 긍정이든 요나의 몸부림이 더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빠져나갔던 요나, 그러나 다시 마음을 곧추 세우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따라 움직였던 요나의 자유의지 등이 더 커 보입니다. 요나 1:3절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 2:1-4절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울컥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마음에 안 들어 그 분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던 요나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 나의 자화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탈을 돌이키고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려는 요나의 의지적인 몸부림이 더 크게 보이는 은혜가 몰려오는 것을 체감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각인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어리석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손 안으로 들어오는 영적 몸부림을 결코 잊지 말자는 은혜입니다. 내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고의적 범죄는 얼마든지 인간에게 가능합니다. 마치 요나처럼. 하나님이 그를 다시 회복시키셔서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은 예정론을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이렇게 본문을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의지적으로 행동했던 자는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바로 나에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회개시켜서 돌이키게 하셨다고 믿는 것에 대한 선택보다 저는 오히려 요나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여 영적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개인적인 자유의지의 돌이킴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려던 자아를 하나님의 손에 다시 붙들리려는 자아로 결단했다고 믿습니다.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 26-27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6-27절은 하나님이 예정하심으로 누군가만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26-27절은 내 의지를 맘대로 사용하고, 랜덤으로 악용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저지르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이런 심판의 대상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출처를 밝히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정말로 천착하고 유념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일이다.” 곱씹고 또 곱씹어도 영적 촌철살인입니다. 저와 같은 목사가 아주 빈번하게 저지르는 고의적인 범죄가 있습니다. 故 옥한흠 목사의 가르침에서 받은 내용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울지는 못할지언정, 가슴을 치지 못할지언정, 말씀을 갖고 장난질을 쳐서야 되겠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며 엉엉 우는 평신도만큼은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말씀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옥한흠, “문득, 당신이 그리워질 때”, 필로, 205) 그는 또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은혜 없이, 감격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일급사기나 다름이 없습니다.”(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1”, 하온, 2021, 244.) 목사가 이 영적 멘털이 없이 목회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계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욕심이 생겨서 설교를 맺으며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어찌, 이것이 목사만의 일이겠습니까? 세인의 지체들이여! 말씀을 듣고 엉엉 우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칩시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만들어주는 영적 시금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리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것의 중간자리란 크리스티아노스들에게는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리든, 빠져 나가든.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