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26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33) 본문: 히브리서 9:27-28 제목: 바라는 자들이기를 서론)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아니 노지 못하리라 차차차” 어제 저녁 8시가 훨씬 넘어 9시에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떼창이 들렸습니다.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간이기에 조금은 거슬려서 도대체 어디에서 떼창이 들리나 베란다를 통해 찾아보니 서부동 성당 교육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이 노래는 한 잔을 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노래이지 않습니까? 가까이 볼 수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서부동 성당에서 행사가 있었고, 신자들이 교육관 쪽으로 장소를 옮겨 한바탕 뒤풀이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이 자려고 하는 시간에 그것도 종교 시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도록 방치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신교 목사로 살고 있는 저는 이런 종류의 모습에 매우 낯설어 가톨릭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는 대단히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모든 가톨릭 신부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가 직접 들었던 모 신부의 강론에서 그가 지옥과 천국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렇게 일갈했던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영역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는 장소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가득 차 있어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그 반대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 백성들은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강론한 신부의 말에 대해 그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또 일견 동의합니다. 하지만 신부가 강론한 내용이 성서가 말하는 전부의 내용이라고 종용한다면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조금 더 근접한 언어로 부연하자면 지옥과 천국은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영역이라는 점에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 중 지옥 편 제 3곡에서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나 이전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뿐이니, 나도 영원히 남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단테, 신곡-지옥 편, 민음사,p,26.) 동시에 4곡에서는 지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빛이 전혀 없는 곳으로 향한다.” (위의 책,p,47.) 현대신학을 공부한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추세가 지옥과 천국에 대한 이해를 공간적인 실제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제로 해석하는 경향이기에 지옥과 천국을 논하면서 전자 즉 공간적인 그 어떤 곳으로 설명하면 무식한 목회자로 비난당하거나 매도당하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를 통해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목사가 되려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우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공간적으로 존재합니다. 본론) 본문은 짧습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구절은 이미 우리들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27절 전반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의 운명론적인 테제를 조금의 양보 없이 선포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명제보다 확실한 것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영어성경 NLT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And just as each person is destined to die once.” (그리고 각각의 사람은 그냥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영어단어 ‘each person’이라는 표현에서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예외 되는 자 없다는 단호함이 엿보입니다. 이것도 매우 단호한 메시지인데 27절 후반절은 더욱 더 엄하게 보이는 종교적인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구절에서 번역된 ‘심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크리시스’를 영국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거쓰리 교수가 의미 있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서 암시되는 ‘크리시스’(심판)는 최후의 평가다.” (D, 거쓰리, “틴데일 신약주석 15, 히브리서”, CLC, p,293.) ‘최후의 평가’라는 단어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위로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경고로 들리십니까? 본문 마지막 28절을 마저 보십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28절은 27절이 위로로 들리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메시지이지, 경고로 들리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28절 전반절을 이미 강해 설교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바로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몸을 직접 드리신 주님의 제물 되심을 나누었기에 전반절의 이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 볼 메시지는 후반절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영적 함의는 매우 심오합니다. 구원에 이른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인정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에 신앙적으로 동의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성도들입니다. 이들에게 임한 복을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위해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라고. 히브리서에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재림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재림의 시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성도 공동체에게 주어진 복이 있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히 합니다. ‘죄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 메시지에 대한 감동을 너무나도 확실히 압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드려야 했던 죄 사함의 제사는 1년에 한 번씩 반복해야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직접 제물 되심으로 인해 다시 죄 때문에 제물을 드리거나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어졌음을 연이어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공동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 피부에 절절히 와 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감격적인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한 가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28절에 그 단어가 있습니다. 설교 제목입니다. ‘자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 나는 지금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적어도 이 신앙을 견지하는 자들은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맞을 자들입니다. ‘아페크데코마이’는 ‘바라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심을 바라는 정도를 영어성경 RSV는 매우 의미 있게 번역했습니다. “those who are eagerly waiting for him.” 그렇습니다. 매우 열정적으로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전통적으로 복음의 핵심 구절로 여겨지는 요한복음 5:24-29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구절은 장례식 예배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이 구절은 장례식 예배 단골 메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일상에서 더 많이 곱씹고, 성찰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죄와는 상관이 없이 주님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두 번째 오시는 날, 선한 일을 행한 자들 즉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자들은 천국이라는 공간적인 곳에 거하게 될 것이며,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 지옥이라는 공간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고전적인 설교라고 저를 공격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이 메시지에서 물러설 뜻이 없습니다. 지난 주간, 목양의 현장에서 교우들의 다양한 상황들을 목도했습니다. 어떤 교우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교우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참 안타깝고, 아쉽고, 유감스럽고, 그리고 심지어 너무 불쌍한 교우들도 보였습니다. 이럴 때, 목사는 양가감정을 갖고 기도하는 카멜레온이 되어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데 순간순간, 참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나 어려움이 찾아오는 성도들을 볼 때입니다. 도대체 그 무엇으로 이렇게 안타까운 교우들을 위로해야 합니까? 우격다짐으로 잘 될 것임을 말하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며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이고, 표면적인 위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진정성을 갖고 이런 아픈 교우들에게 위로하는 최후의 메시지는 오늘 설교입니다.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오셔서 최후로 평가하십니다. 오늘 본문 27절과 요한복음 5:29절에 등장한 ‘심판’이라는 헬라어 단어 ‘크리시스’에서 영어단어 ‘위기’를 뜻하는 ‘crisis’가 파생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분명히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이 되기 전에도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주목해 보시는 하나님임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어렵고 힘든 일을 지속적으로 당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이렇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날이 여러분에게는 적어도 crisis의 날이 아니라고. 도리어 그날은 주님을 끝까지 바라본 백성들인 그대들에게 다시 오셔서 눈에서 흘린 눈물을 씻어 주시는 날이라는 궁극의 위로로 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촌스러운 일이라고 누가 뭐라 해도, 시대가 아무리 신-사사시대라 랜덤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막사는 시대라 하더라도 자기를 바라는 백성들을 위해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셔서 주님의 말을 듣고 또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사망에 빠질 백성들을 생명으로 옮겨주실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몇 주 전, 교단 서울 지방회에 속한 목회자들이 청풍으로 야유회를 온다는 소식과 더불어 제천에 오니 점심식사 같이 하면서 서울 지방회 목회자들과 교제하시면 좋겠다는 총무 목사의 전화를 받고 잠시 청풍을 다녀왔습니다. 그날 반갑게 인사를 한 목회자 중에 한 분이 그 다음 주에 소천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심근경색으로 인한 사망이었습니다. 그를 만난 그날, 그 동역자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번에는 단체로 와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운데 조만간 제천에 내려와서 이런 저런 교제를 나누고 싶습니다. 목사님께 아들 목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자문도 받고 싶습니다.” 이 말은 결국 유언과도 같은 그가 말한 마지막 교제의 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람은 살았다하나 산 것이 아닙니다. 유지하는 것이지. 그래서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날을. 설교 제목처럼 주님을 바라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