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9:23-26
제목: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서론)
사람이 철든다는 말을 할 때 종종 회자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성장하면서 죽어라고 부모 속을 썩이던 자식이 장성해서 결혼을 하고, 본인도 아들딸 자식을 낳고 양육하면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부모님의 수고와 사랑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미 부모가 이 세상에 없을 때였다는 마치 산파극의 한 장면과 같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언제나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기도처에 있는 가지고 올라간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녀에게’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 편을 교우들에게 낭송하겠습니다.
소풍 (나희덕, “그녀에게”, 예경,142-143)
얘들아, 소풍 가자.
해지는 들판으로 나가
넓은 바위에 상을 차리자꾸나.
붉은 노을에 밥 말아먹고
빈 밥그릇 속에 별도 달도 놀러 오게 하자.
살면서 잊지 못할 몇 개의 밥상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밥상을
너희에게 차려줄 때가 되었나 보다.
가자, 얘들아, 어서 저 들판으로 가자.
오갈 데 없이 서러운 마음은
정육점에 들러 고기 한 근을 사고
그걸 싸서 입에 넣어 줄 채소도 뜯어왔단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그러니 얘들아, 꼭꼭 씹어 삼켜라.
그게 엄마의 안창살이라는 걸 몰라도 좋으니,
오늘은 하루살이 떼처럼 잉잉거리며 먹자.
언젠가 오랜 되새김질 끝에
네가 먹고 자란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너도 네 몸으로 밥상을 차릴 때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그때까지, 그때까지는
저 노을빛을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이 바위에 둘러앉아 먹던 밥을
잊지 말아라, 그 기억만이 네 허기를 달래줄 것이기에.
기도처에 십자가 광장이라는 벤치가 있습니다.
그 벤치에 앉아서 시집을 열어 이 시를 읽다가 눈자위가 뜨거워졌습니다.
어머님 생각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한 잎 한 잎 뜯을 때마다
비명처럼 흰 진액이 배어 나왔지.
그리고 이 포도주가 왜 이리 붉은지 아니?
그건 대지가 흘린 땀으로 바닷물이 짠 것처럼
엄마가 흘린 피를 한 방울씩 모은 거란다.
(중략)
네가 먹고 자란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너도 네 몸으로 밥상을 차릴 때가 되었다는 뜻이란다.
시인의 이 시어가 추억에 담아 놓았던 제 어머님의 삶을 끄집어냈습니다.
상추쌈에 고기를 한 점 넣어 씹어 먹을 때 나오는 진액이 어머니의 비명이라니!
포도주가 붉은 이유는 어머니의 흘린 피라서 그렇다니!
이제 저 또한 이 시어를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제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평가받는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너희들도 가장 가치 있는 소중한 것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며 살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적 절망이 있다면 소중한 가치를 망각한다는 점입니다.
아니, 잊어버리라고 부추긴다는 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일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거나 그렇게 여기지 말라는 종용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6월 세 번째 주일에 나누고 있는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중요한 일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단어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풀어보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이라고 저자가 말한 것은 이전 설교에서 그림을 통해 교우들에게 알려드렸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성막을 의미합니다.
즉 지성소와 성소를 말합니다.
‘모형’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휘포데이그마타’는 ‘전시용 건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좋은 실례가 있어 예를 들겠습니다.
시내에서 고속도로 제천 IC가 있는 쪽으로 나가다보면 천남동 한 지역에 제천시를 들썩이게 한 아파트 분양 모델 하우스가 지어져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제천 자이 아파트 모델 하우스입니다.
제가 제천에 이사 온 지 19년째가 되는데 명절을 제외하고 한 지역에 적어도 차가 정체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분양 신청 기간,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가 방문객 차량으로 인해 그 지역이 심하게 정체되는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
‘자이’라는 브랜드가 그렇게 높은 것인지 그날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곳에 지어진 분양 모델 하우스는 정한 시간이 되면 철거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 건물은 ‘휘포데이그마타’ 즉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가건물 즉 모형 건물에서 영원히 사는 자는 없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모형’이 바로 이런 가건물과 같다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땅에 세워진 ‘휘포데이그라마타’는 이런 것들로 정결하게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은 아론이 드렸고, 후에는 제사장들이 드렸던 여러 제물들을 말합니다.
이 묘사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헌데 23절의 후반절은 주석 작업이 필요한 난해함이 있는 구절입니다.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하늘에 있는 그것’은 이 땅에 세워진 모형인 성막의 원형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늘 성소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늘 성소’라는 단어에 긴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늘 성소는 성경 여러 곳에서 묘사됩니다.
대표적인 성경적 증언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사야 6:1-3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가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 성소입니다.
욥기 1:6절도 소개합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사탄이 모여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천상회의가 열렸던 하늘 성소입니다.
하늘 성소는 이 땅에 세워진 성막 성소의 원형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역설합니다.
이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에서 드렸던 제물보다 더 좋은 제물이 드려지는 곳이라고 일갈합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제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좋은 제물의 내용을 본문 24-26절이 답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늘 성소에 드려진 더 좋은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직접 흘리신 보혈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전 강해를 통해 이 땅 성막에서 드렸던 제물들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해마다 드려야 하는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완벽한 것이 아닌 제물이라고도 했습니다.
25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이것이 이 땅 성소에서 드리는 제물의 한계는 매 해마다 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하늘성소에 가지고 올라간 제물은 해마다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번 드림으로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데 성공한 주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였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보수 성향의 주석가로 알려진 메튜 헨리는 자신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본문을 해석하면서 예수께서 흘리신 보혈이라는 제물에 대해 아주 명쾌한 4가지의 해제를 기록했습니다.(메튜 헨리, “히브리서”, 크리스천 다이제스트.p,76.)
첫째, 희생 제물이 바쳐진 장소가 더 훌륭하다. 율법 아래에서 바쳐진 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이었지만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은 자신이 직접 들고 하늘 성소로 올라 가셔서 하나님 앞에 바치셨다.
둘째, 희생의 제물 자체가 더 우월한 것이었다. 율법 시대의 희생 제물은 각각 짐승의 생명과 피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피를 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피야말로 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셋째, 율법 하의 희생제물은 반복해서 드려야 했다. 이것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온전하여서 한 번만 드려지고 그것으로 모든 목적을 이루기에 충분하였다.
넷째, 율법 하의 제물은 효험이 없는데 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은 효험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월함을 알 수 있다. 율법의 제물은 제물 그 자체가 죄를 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 제물은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제거하신다.
매튜 헨리의 이 네 가지의 주석을 종합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린 보혈의 피는 가장 가치 있는 제물이었다는 결론입니다.
이렇게 매튜 헨리의 주석적 내용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6월 셋째 주일에 주시는 레마에 도달하게 됩니다.
※ 가장 가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을 흔히들 비유장이라고 지칭합니다.
네 가지 밭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가라지 비유, 천국 비유 등등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비유들을 집약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많은 비유 중에 44-46절의 비유를 인상 깊게 마음에 담아 놓았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두 비유의 공통분모가 무엇입니까?
천국의 가치는 물질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에 걸쳐서 주님이 반복하신 말이 ‘소유를 다 팔아’입니다.
주님이 천국의 소중함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의 카운터 파트너였던 물질을 동원하면서까지 비교를 하셨을까 하여 그 의미에 착념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주님의 가르침 안에는 영적으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어떻게 해서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 주간 기도처에 머물면서 그 어느 때보다 기도하는 것에 전념했습니다.
제가 머물었던 필그림 하우스 예루살렘 관 3층에 메디타치오 채플실이 있습니다.
그곳은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채플이 아니라 철저하게 침묵기도를 하는 장소입니다.
첫날부터 그 채플에 들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깊은 묵상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릎을 꿇고 메디타치오(묵상 기도) 기도를 드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러자 제게 크게 공명되어 울린 단어가 교회였습니다.
뭐 목사에게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교우들이 있을 줄 압니다.
물론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교회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날 제게 임한 강력한 조명은 그냥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치인 세인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존재하는 장소가 교회이기에 그 교회가 제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왜 한 명, 한 명의 영혼이 소중합니까?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보혈을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여러분의 영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영적 원칙이 있습니다.
네게도 주님이 가장 소중한 가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원에서 4번째 출간 예정도서의 최종본을 완성하고 내려왔습니다.
원고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기드온에 관련한 사사기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놀라운 점이 있다. 하나님은 미디안 7년 동안의 폭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하시기 위해 기드온을 부르셨다. 문제는 전혀 사사가 될 만한 자격도 보이지 않는 기드온을 사용할 요량으로 그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깜냥도 안 되는 기드온을 어르고 달래서 그를 부르셨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비위에 맞춰주기 위해서 노력했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호칭(큰 용사)도 붙여주었고, 투정부리는 기드온을 향해 오래 참기까지 한 장면은 눈물겨웠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구애(?)하셨던 하나님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미디안 대군을 이기게 한 주체이셨지만 사사기 7:9절 이후로부터 기드온의 남은 행적과 그의 사악했던 아들 아비멜렉의 기사가 끝나는 9장까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보고는 충격이다. 사사기를 기록한 신명기 역사가의 의도적인 방법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사라짐’이라는 메타포에서 발견되는 기드온의 후기 여정은 말 그대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못한 불신앙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비극의 기록들이기에 아연실색하게 한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어야 할 사사기”, p,133.)
부연하자면 기드온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후 전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전형적인 세속적 이기주의자로 변질되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행보를 보입니다.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버거운 비 신앙적 행동들을 자행합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기드온에게 임한 심판은 하나님이 그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재앙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사사기 7:9절 이후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제부터는 기드온 너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무서운 징벌을 내리신 셈입니다.
하나님의 소중함을 잊은 자는 가장 최대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우리가 기드온을 통해 반면교사를 삼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십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그대를 위해 흘리신 보혈은 적어도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가치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존 캘빈을 아십니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핀 자라면 캘빈은 종교 개혁신학을 학문적으로 기초화하여서 완성한 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27세의 약관의 나이에 남긴 ‘기독교강요’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기적의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것 말고는 다른 표현이 없을 정도로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걸작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과연 기독교가 오늘의 형태로 유지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학자요 정치인이 존 캘빈이었습니다.
북유럽을 기독교신앙으로 묶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캘빈은 1564년 5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유언으로 어떤 흔적으로든 자기의 이름을 절대로 세상에 남기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스위스 제네바에 가면 그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무덤을 본 사람들의 전언은 이 무덤이 진짜로 존 캘빈의 무덤인지를 의심하게 할 정도로 초라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무덤이라고 전언합니다.
무덤 비석에 J.C라는 이니셜이 있는데 그것만이 캘빈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무덤에는 캘빈의 그 어떤 다른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캘빈의 무덤이 이렇게 초라할까요?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가치 외에 그 어떤 것도 높아지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신학을 존중하여 후세가 순종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어찌 이 성찰이 캘빈의 생각이어야만 하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생각이자,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가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셔야 합니다.
그분 말고는 없어야 합니다.
찬송가 94장의 원문 가사는 이렇습니다.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Refrain
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금이나 은보다 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것이 되고 싶다네. 큰 집들과 넓은 땅을 가지는 것보다 난 주님을 가지고 싶다네. 오히려 주님의 못 자국 난 손으로 이끌림을 받으려네.
후렴
넓은 영토를 지닌 왕이 되는 것보다, 끔직한 죄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난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이 세상은 오늘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네.
베벌 세어는 이 찬양을 1983년 암스텔담 선교대회에서 특별 순서로 불렀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과 청중들이 기립하여 그의 찬양에 경의를 보내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베벌 세어가 했던 응답의 변은 100번을 반복해도 그냥 감동의 감동입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이 아름다운 박수와도 주님은 바꿀 수 없습니다.”
다 같이 찬송가 94장의 가사를 깊이 음미하며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 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않아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