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2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9) 본문: 히브리서 8:7-13 제목: 돌이 아닌 마음에 서론) 그림 하나를 보겠습니다. (그림 설명)
8년 전에 여름 휴가를 제주도에서 보냈을 때 방문했던 4,3 기념관 로비에서 제가 쓴 방문자 기록 메모입니다 “망각은 포로로 이끌지만, 기억은 구원으로 이끄는 첩경(비밀)이다.”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유대인 학살 추념관인 야드 바쉠을 방문했다가 2층 전시실에 동판에 쓰여 걸려 있던 이 문장을 보며 마음 깊이 새겼놓았고, 4,3 기념관에 갔을 때, 메모지에 저 또한 이 글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유대인들의 결연함이 오늘, 작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을 강대국들이 넘보지 못하는 결정적인 방어기제의 역할을 하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소설가 한강이 쓴 ‘작별하지 않는다.’를 숨죽이며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에 목젖에서 쓴 물이 올라와 힘들었지만 작가가 말하려는 강력한 메시지가 제주도 4,3 사건의 아픔들을 결코 잊지 말자는 의미임을 알았기에 제 마음에 새겼습니다. 빨갱이 멸절을 위해 제주도민 70%(당시 제주도민 300,000만 명)가 몰살돼도 괜찮다는 악마적인 당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기막힌 하모니로 이루어진 토벌 작전으로 인해 아무 것도 모르고 쓰러져 갔던 수많은 제주도민들에 대한 아픔을 자꾸만 잊으라는 정치세력들의 잔인함을 작가는 소설에서 이렇게 저항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p,316) 목사로 살아가면서 대단히 민감하게 경계하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뎌짐과 무감각해짐입니다. 엔도 슈사쿠가 쓴 ‘바다와 독약’이라는 작품을 보면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었을 때 미군포로들을 대상으로 신체에 어떤 약물을 투여하면 빠른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를연구하던 야만적인 일본 731 부대에 근무하던 한 젊은 군의관의 절규를 통해 천하가 공로할 만행을 이렇게 작가가 고발합니다. ”인간이 무감각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죽은 것이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리듬에 맞춰 귓가에 계속 읊조려댔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니까’ 그러나 이러한 암시는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와 마음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다가 사라졌다. ‘맞아. 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거야”(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 창비, 2017,p,164) 본론)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선행은총의 기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무감각해지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허나 이 양심마저도 무너진 시대가 오늘 우리들의 시대이며,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그의 독처가 보기 안좋아서 선물로 만들어준 둘째 사람 하와에게는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으로 주신 양심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유감스럽게 이 두 사람은 에덴에서 양심을 버렸습니다. 인류를 회복시켜 구원해야 겠다는 일념으로 고민이 깊으셨던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고안해 내신 것이 것이 언약 즉 율법이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7절을 읽겠습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이 구절을 주석하기 위해서 조재천 교수의 책을 참고했습니다. “첫 언약의 핵심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있음은 분명하다.”((조재천, “히브리서”, 홍성사,p,144)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시내산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9:5-6절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시내산 언약의 대 명제입니다. 이 언약의 체결은 이어지는 출애굽기 24:6-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구절들을 깊이 들여다보면 언약과 언약 체결식은 완벽해 보입니다. 어디 하나 흠 잡을 만한 곳이 없어 보입니다. 본문 10절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31:31-34절의 인용에 담겨 있는 메시지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다시 강조하지만 이 구절들을 읽다 보면 언약은 완전무결해 보입니다. 그런데 7절이 웬 말입니까?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이라는 조건문적인 표현이 우울하게 합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자면 첫 언약 즉 시내산 언약이 흠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언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작품도 얼마든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의 난제입니다. 성경 안에 있는 내증으로 난제에 대한 답을 제시한 조재천 교수의 글을 다시 한 번 소개하겠습니다. 8절을 먼저 소개한 뒤에 조 교수의 해석을 나누겠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운 첫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이렇게 운을 띠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했던 이스라엘)이 행한 잘못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최 교수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8절은 의미 있는 신학적 진술이 담겨 있다. ’지적하다‘(멤프호마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7절에 ’흠(멤프토스)이 있다‘에 해당하는 형용사와 그 어원이 같다. 첫 언약에는 흠이 있다는 말을 한 직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첫 언약의 파트너인 이스라엘의 흠을 잡으셨다고 언급함으로서 언약은 백성과 연결된다. 첫 언약의 흠은 하나님이 책임져야 할 것도, 의도하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의 흠에 기인한다. 시내산 언약은 엄연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롭고 정의로운 본성이 반영된 언약이다. 언약의 본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다. 흠없는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이 책망받아야 한다.” (위의 책, pp,144-145) 정말로 명쾌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첫 언약은 흠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첫 언약을 폐기하고 새 언약을 세우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첫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지막 13절을 읽어보십시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이스라엘이 무시하고 파기했던 첫 언약의 운명을 히브리서 기자는 참 아프게 표현했습니다. 낡아지고 쇠해져 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첫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대단히 비장했습니다. 예언자 예례미야의 예언을 인용한 히브리서 저자가 그 마음을 대변합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의 제정은 이스라엘이 옛 언약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 잘못을 지적하신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에게 천명하십니다. 10-12절입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제정하신 새 언약의 기초는 회복과 은혜가 토대였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시내산에서의 약속의 기초를 이스라엘은 파기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고 그 언약을 다시 세우시겠다는 일념으로 새 언약 제정을 선포하신 셈입니다. 새 언약의 내용을 이제 우리는 다음 주부터 세밀하게 나눌 것입니다. 회복과 은혜를 토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설정한 새 언약의 내용을 이어지는 강해를 통해 다시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본문 이해 과정을 통해 주일에 받을 영적인 교훈을 되새김질 해 보겠습니다. ※ 두 번째 언약 즉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돌이 아닌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출애굽기 34:1-4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쓰셨던 열가지 계명이 새겨진 도구는 돌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시내산에서 내려오자 산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 숭배의 난장판을 벌이고 있던 공동체의 범죄를 응징하기 위해 모세는 10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금송아지를 으깨는 데 사용함으로 훼손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부르실 때 첫 번째처럼 두 돌판을 만들어서 시내산으로 올라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언급된 첫 언약의 10가지 시금석이 돌덩어리에 새겨졌음을 분명히 한 셈입니다. 조금 더 세밀히 주석하자면 첫 번째 돌판에 새겨진 10계명은 부서지는 바람에 훼손되었습니다. 두 번째 돌판에 새겨진 10계명 판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훼손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속적인 범죄로 인해 역시 망가진 것과 진배없습니다. 결국 첫 언약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새 언약을 제정하셨습니다. 다음 주일에 세밀하게 터치하겠지만 이 새 언약은 13절에 있는 말씀처럼 낡아지거나 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새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며 변하지 않는 언약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주셨던 것처럼 더 좋은 언약입니다. 이렇게 좋은 언약을 순간적이고, 임시적이고, 흠투성인 돌판에 새겨서야 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마음 판에 새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읽다보면 대단히 의미 있는 문장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 13세 되는 소년 시절 육신의 부모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셨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들 예수가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고 부모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친척 집을 비롯하여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아들을 찾습니다. 찾지 못한 아들이 혹시 성전에 있지 않을까 싶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성전에 올라갔더니 율법교사들과 토론하는 아들을 보고 속상한 나머지 이렇게 마리아가 훈계합니다. 아들아, 너를 찾으려고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 야단을 맞은 아들 예수가 곧바로 이렇게 답변합니다. 누가복음 2:4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황당무계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 예수의 답변을 들었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을 누가는 이렇게 마지막으로 표현함으로 여운을 남깁니다. 누가복음 2:51절 후반절입니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여러 영어 성경 중에 이 구절 후반절을 가장 감동적으로 번역한 웹스터 영어성경 번역을 소개합니다. “his mother kept all these sayings in her heart.”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의 마음에 이 모든 말들이 지속되도록 간직했다.“ 신앙의 여정 중에 신앙인들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간직되도록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리아의 이 신앙이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수태 고지에서부터입니다. 처녀로 지내고 있던 마리아에게 청천벽력같은 하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수태고지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불행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수태고지를 마리아는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리아는 예수를 낳습니다. 예수를 낳은 날, 양을 치던 목자들이 마리아를 찾아와 하늘의 천사가 자기들에게 와서 구주 예수 탄생을 고지해주었던 일체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합니다. 보고를 들었던 마리아가 반응한 메시지가 누가복음 2:19절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일어난 영적인 은혜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 1대 질병방역본부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펜데믹 2년 4개월 동안 치열하게 국민안전을 위해 현장을 지휘해 온 정은경 청장이 물러났습니다. 익히 아는 일이지만 정 정창은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여기저기에서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과 공격에 시달리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에게 왜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공직 중에 더 시급한 국민 건강을 생각하며 그 모진 공격들을 참아냈고 퇴임하는 날, 한을 풀만도 한데 모든 기자와 여론 앞에서 수어로 한 마디를 하며 퇴임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덕분에“ 그녀의 수어를 제 마음에 담았습니다. 충분히 담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속적인 필드에서도 참 아름다운 삶과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감동을 받아 마음 깊숙한 곳에 담아놓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이념 논리에 좌지우지되는 돌판에 새겨서야 되겠습니까? 개인의 유불리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내 돌판에 새겨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일찍이 체험했던 신앙의 선배가 이렇게 자문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언 7:3)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일설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습니다. 예레미야 4:19절입니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점점 다가오는 조국의 멸망 소리를 들으며 예언자는 웁니다. 통곡하며 웁니다. 왜 울었을까요? 마음에 새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4:19절의 공동번역 성경이 가슴을 때립니다. ”아이고 배야. 배가 아파 죽겠습니다. 가슴이 떨리고 염통이 터집니다. 나팔 소리 나고 싸움터에서 아우성 소리 들려와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동통을 느끼며 마음에 새긴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를 심비에 새기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한없이 크신
한없이 크신 주의 사랑을 어디에다 비하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비할 수가 없구나 우리의 기도 응답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엎드려 소원 간구하오니 은혜 내려주소서 절망할 때는 소망 주시고 나의 앞길 인도하니 푸른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셔라 오 나의 사랑 나의 소망 되신 예수님 내가 영원히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내가 영원히 영원히 찬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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