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5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8) 본문: 히브리서 8:1-6 제목: 요점은 이렇습니다. 서론) 차준희 교수가 지난 주에 신간을 출간한 뒤에 책 한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나서 교사주일을 맞이하여 선생님들에게 교사주일 선물로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 교사들에게 한 권씩 배부하려고 합니다. 학자가 된 이후 약 60 여권을 집필했다고 지난 번 페이스북에 자기 허리 춤 즈음에 올라온 책들을 사진찍어 올릴 정도로 집필에 대한 자존감이 있는 친구의 글 중에 학자 냄새가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냄새가 나는 글이고, 지금 CBS에서 방영되는 ‘올포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행했던 3여 년의 짧은 설교 원고를 모아 출간한 책이라 평신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내용이 많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총 37편이 책 안에 소개되고 있는데 맨 마지막 37번째 글에 담긴 내용이 의미가 있어 교우들에게 인용하며 설교를 열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을 만나면 하나님부터 원망하는데 재난 가운데 주님은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이 테마를 주제로 차 목사는 이렇게 답변하며 설교문을 작성했습니다. “코로나 19 시대는 유다의 바벨론 유배 시대와 같다. 우리는 코로나에 포로가 되어 끌려다니고 있다. 주전 597년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여호야긴 왕과 더불어 수많은 고관대작, 고위층, 상류층 그리고 기술자들이 유배지로 잡혀 갔다. (중략) 이곳에서 살던 포로 유다인들의 패턴이 세 가지로 나뉘어졌음을 에스겔 예언자의 메시지로 통해 알 수있는데 세 부류였다. 첫째, 배교한 사람들이다. 둘째, 절망한 사람들이다. 셋째, 광신에 몰입된 사람들이다.” (차준희, “성도가 묻고 성경이 답하다.”,CUP,pp,286-287.) 이 세 종류에 속한 자들은 어느 누구도 정상적으로 다윗 왕조에게 약속했던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부류는 없습니다. 이 기막힌 현실에 추락해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서늘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예언적 메시지가 예레미야 29:7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충격적인 메시지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한 프로젝트를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바벨론이라는 유다를 멸망시킨 원수 국가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라고까지 어떤 의미에서 불난 집에 석유를 붓는 듯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선포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예레미야 예언서를 통해 만납니다. 이게 도무지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차준희 교수는 글에서 이 메시지를 소개한 이유가 코로나 19의 공격으로 풍비박산 난 한국교회를 향해 진언을 하고 싶었기 때문임을 책에서 밝힙니다.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다. “유대인들을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 가게 한 것은 바로 야웨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당신의 백성이 조국을 떠나 타국으로 유배된 것은 야웨 하나님의 부재도 아니고 무능도 아니며 섭리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위의 책,p,289.) 친구는 아마도 코로나 19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석한 차 목사는 “코로나와 같은 재난을 만나면 하나님부터 원망하는데 재난 가운데 주님은 어떻게 역사하실까요?”라는 답변을 자신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렇게 갈무리했습니다. “포로민 유대인들에게 야웨 하나님은 ‘NO-WHERE’ 즉 ‘아무 데도 없는 하나님’으로 보였지만 그러나 야웨 하나님은 ‘NOW-HERE’ 즉 ‘지금-여기에 계신 분’임을 예언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위의 책, 290) 정말로 놀라운 요점 정리입니다. 책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제공한 기막힌 서비스요 성찰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독자인 우리들이 대단히 예민하게 설정해야 하는 전 단계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 안에서 증언하는 본문 이해입니다. 둘째는 신학이 제시하는 본문 해석에 대한 지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배제하면 우리들의 성경 해석은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 멋대로의 이해입니다. 말 그대로 랜덤 해석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누가복음이 어느 새 ‘내가복음’ 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재앙입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오늘 설교 한편을 준비하기 위해 본문을 아무리 못 읽어도 5번 이상은 묵상하며 소리내어 읽습니다. 그 본문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후 히브리서 연구를 위해 구입한 관련 도서 10여 편의 텍스트 대목을 비교하며 읽습니다.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영어성경과 번역된 한글 성경 10여 권을 읽은 뒤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본문을 택해 인용합니다 이후 설교 원고 작성하기에 앞서 내 설교 원고의 내용이 맞는지를 필터링하기 위해 학술적인 주석, 제가 서고에서 친구하고 있는 5권 정도의 주석으로 진단합니다. 정말로 쉽지 않고 고된 작업입니다. 어느 경우에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12번씩 드는 지난한 수고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산고를 겪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래야 실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8장도 바로 이 단계를 거쳐야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한 본문입니다. 본론) 본문은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⓵ 1-6절: 옛 제사장이 행했던 직무와 새 제사장이 행하는 직무입니다. ⓶ 7-13절: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기사입니다. 저자는 히브리서 8장을 열면서 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요점을 말하면 이렇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1절 전반절) 그러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6절을 기록하면서 나름 상당히 복잡했던 옛 제사장들이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여러 가지 직무들과 새 대제사장이신 에수님의 사역을 비교하기 위해 요점 정리를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 주일에 살필 7-13절에서는 옛 제사장들이 지켜야 했던 옛 언약과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이루셨던 새 언약에 대한 의미까지도 요점 정리를 하려고 애씁니다. 저자가 애쓴 내용이 무엇인지 접근해 보겠습니다. 1-2절을 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저자는 하늘에 있는 지극히 높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분은 이 땅에 세워진 성소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의 지성소를 섬기는 분임을 선언합니다. 동시에 그 성소는 사람이 세운 성소가 아님도 분명히 합니다. 왜 1-2절에서 하늘 성소를 언급했을까요? 3-4절을 나누겠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이 구절의 이해를 위한 구약적인 배경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7장부터 계속 살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성소를 만드셔서 그 성소를 섬기도록 제사장들을 세우셨습니다. 아론이 제일 첫 번째 세워진 대제사장이고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의 역할들을 감당했습니다. 출애굽기 28: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이들의 역할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죄사함을 위해 세워진 중재자들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누었던 것처럼 제사장들은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해 제사를 드려주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했고, 대제사장은 대속죄일에 지성소로 들어가 신앙공동체 전체의 죄를 위해 대신 제사를 일년에 한 번 드리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을 세운 이유는 예수께서 그때는 이 땅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5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아론은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고, 그의 아들들인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은 제사장으로 만들어진 장막을 관리하고 섬기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섬길 장막 건축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출애굽기 26-2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장막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모형을 제시하면서 세밀하게 장막 건축을 하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장막을 건축할 때의 대 전제는 본을 따라 지으라고 하신 점입니다. 모세에게는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막을 건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교하여 6절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역설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표준 새번역에서 이렇게 6절을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그가 더 좋은 약속을 바탕으로 하여 세운 더 좋은 언약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본에 엄격하게 맞추어 장막을 건축하라고 하신 것과 달리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스스로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면서 그분 스스로가 완벽한 제물이셨고 더 좋은 언약을 갖고 계신 중재자인 대제사장이셨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을 위해 다시 드릴 필요가 없는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볼 때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의 요점이 무엇일까요?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본문에서 주후 1세기의 상황과 언어로 설명하려고 했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귀에 익숙하지 않아 낯선 것 같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요점이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완벽한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들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존재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왔다가 사라진 일체의 제사장들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베드로전서 1:6-7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글이 베드로의 글이라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누가복음 22:57-60절로 돌아가 보십시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에 베드로의 영적 상태는 거의 그로기 상태였습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체험을 하고 약 30여 년이 지난 뒤에 순교를 앞두고 로마와 인근 주변 즉 마케도냐를 비롯하여 조금 더 넓게는 갈라디아 지역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하여 살기에 언제나 순교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 지체들을 위해 보낸 편지에서 놀라울 정도로 영적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인지합니다. 어떻게 베드로의 이 엄청난 변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를 섬겼던 존 맥아더 목사의 글에 나오는 한 의미 있는 예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존 맥아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pp,247-248) 어느 가난한 사람이 호화로운 유람선 여행 광고를 보았습니다. 젊었을 때의 꿈이었기에 최선을 다해 번 돈으로 티켓팅을 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풍부하지 않아 한 주 동안 먹을 음식을 싸가지고 가기로 마음 먹고 준비한 음식을 갖고 배에 승선했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하던 이 사람은 자기가 준비한 음식을 먹어가며 여행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식당에서 호화로운 맛난 음식을 먹는 반면, 자신만 식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보고 신세를 한탄합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은 배의 직원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든 할 테니 시켜만 달라고. 나도 돈을 벌어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한 번 먹는 게 소원이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직원이 의아해하며 그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손님, 이 유람표 대금에 식사값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는 유감천만의 종교적인 행위를 추구합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위험성이 이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몰랐던 자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모세의 종교로, 아론 계열의 불완전한 제사장의 종교로 회귀하려는 어리석은 일탈을 행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히브리서 저자는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히브리서 설교문을 읽고 있을 형제, 자매들이여!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딴짓 하지 마세요.”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문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켜야 하며, 우리의 감정 또한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에 복종시켜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성을 통제하시도록, 또한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한다.”(존 스토트, “온전한 그리스도인”, IVP, p,28) 이렇게 주님께 내 지성과 감성을 온전히 내어드릴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불의 사자였던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는 송장같은 영국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불을 토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들러보면 이러쿵저러쿵 훈수 두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출석 교인이 많다고 자랑하는 교회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영적 자녀들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다. 교회는 확장되는 데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는 것 같지 않아 웬지 안타깝다.” (레오나드 레이븐힐,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 규장, p,220.) 레이븐힐이 역설한 영적 자녀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존귀하게 되게 한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메갈뤼노’의 원뜻은 ‘어느 부분이 크게 보인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예수가 여러분의 영적인 시야에서 가장 크게 보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가장 존귀한 존재와 가치기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친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누구도 내 생명 다하도록 주 얼굴 만구하리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누구도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 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 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