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7:20-28
제목: 이탈하지 마십시다.
서론)
1980년에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42년이 되었습니다.
2012년에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동문연감을 출간해서 보내주었습니다.
보내준 동문연감을 훑어보니 정말로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6회 졸업생이니까 고등학교 동문 중에는 제법 고문 급에 속하는 원로입니다.
연감에서 동기동창생들의 근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정계, 재계, 문화 예술계, 체육계, 의료계, 그리고 저처럼 종교계 등등에서 활약하는 친구들의 면면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목사는 물론 스님이 된 친구가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옛날을 어렴풋이 추억하며 감개무량해 했습니다.
동문 연감을 보다가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동기동창 중에 많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었습니다.
10년 전의 기록이니까 제 나이 52세때의 자료인데도 벌써 세상을 등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안타깝고 씁쓸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꿈많던 친구들이 불과 지천명의 나이를 곧 넘긴 나이에 이 땅을 등지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안타까운 친구들의 이름을 들쳐보다가 시편 90:4-6절 말씀이 불현 듯 떠올랐습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고 있는 한계가 있습니다.
유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에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 중에 하나는 ’메멘토 모리‘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유한한 존재인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한함을 극복하게 해 주는 우리 믿음의 주군 이야기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제일 먼저 살펴볼 본문은 24-25절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이 구절의 의미는 경우에 따라 전혀 낯설지 않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 표현은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계셔서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 두 표현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두 문장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문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감사의 내용이자 위로의 내용입니다.
왜 이 위로의 문장을 히브리서 저자가 사용했을까요?
본문 23절을 읽겠습니다.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살핀 것처럼 아론의 반차를 따르던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세워졌다가 때가 되면 죽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랜트 오스본은 그의 주석에서 다음을 밝힙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으로부터 주후 70년의 두 번째 성전 파괴에 이르기까지 83명의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섬겼다고 추정한다.”(그랜트오스본,“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성서유니온“, p,181.)
이렇게 제사장들은 왔다가 갑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유한함을 아신 하나님은 멜기세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를 예수님을 닮은 신비로운 대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창세기와 시편과 히브리서에만 등장하는 한시적인 존재임을 히브리서 저자는 분명히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원히 살아계시고 지금도 존재하는 제사장임을 강력하게 선언한 자가 바로 히브리서 저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6-28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어떤 의미로 보면 이 구절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영원성을 강력하게 천명하면서 배교하려는 자들에게는 선전포고처럼 들리는 위엄이 담보된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 듯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5가지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제사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물을 드렸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방식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속죄를 위해서는 1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욤 키푸르)인 7월 10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의 죄를 속죄 받을 제사를 위해 온전한 제물들을 드렸고 그런 뒤에야 백성들을 위한 대 속죄의 사역을 행했습니다.
대단히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기에 딱 한 번 자신의 몸을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지성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단 한 번의 제물 즉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 인류 죄를 속죄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다시 27절만 봅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그렇습니다.
단번에 인류 대속의 미션을 완성하신 주님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9:6-7절, 그리고 9:12절도 이 점을 재확인합니다.
먼저 9:6-7절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12절은 결정타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이렇게 완전하시고 완벽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20-22절에서 아주 자신있게 그리고 담대하게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자랑하며 소개한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 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누구에게 맹세를 하면서 제사장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 하에서 스스로 완벽하신 제사장이 되신 것이며, 본문 22절에 기록된 그대로 가장 좋은 언약의 보증(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되신 분입니다.
이렇듯 가장 완벽하신 구원의 보증이시자 언약의 완성자가 예수님이심을 저자는 역설합니다.
왜 이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성과 완전성을 강조했을까요?
다시 원점에서 해석해 보십시다.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을 향한 경종 때문입니다.
배교자들은 이토록 완벽하고 좋은 언약의 종결이신 예수님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1년에 한 번 다시 죄씻음의 절차를 거쳐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 제사장의 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어리석은 후퇴를 하려 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과거의 율법으로 회귀하지 말라는 예언자적인 선포를 저자가 강조한 것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일 설교를 통해 이런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 가장 완벽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이탈하지 마십시다.
주님은 완벽하신 제사장입니다.
그 분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온전한 구원의 반열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설교에서 말씀드렸지만 우리들이 목적하고 붙들어야 하는 존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면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완벽하신 구원자이시고 영원히 살아계신 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젊은 날, 초대 교부신학자 어거스틴은 주의 은혜에서 이탈해 살았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의 시절 육체적인 방탕은 물론 선악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와 같은 이교적 지적주의에 탐닉하여 마니교도가 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밀라노를 중심으로 인근 각처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설교를 통해 전함으로 황금의 입을 가진 자라고 칭송받으며 평가되었던 위대한 설교자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옵니다.
동시 그 기저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중보가 있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회심하여 그 유명한 참회록을 집필합니다.
참회록 안에 이 유명한 신앙고백이 들어 있는데 언제나 주님의 완전하심을 찬양하는 대목에서 늘 회자되는 고백이라 교우들에게 다시 전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에 한 줌의 흙에 불과하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고, 교만으로 가득 찬 이 인간이 입술을 열어 감히 주님을 찬양하려고 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이며 미천한 이 인간이 찬양하려 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라고 우리를 깨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 지음받았나니,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평안을 모릅니다.“(어거스틴,”참회록, 생명의 말씀사,p,22.)
어거스틴의 이 위대한 고백이 우리에게 주는 신학적인 교훈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분이시기에 주님 밖에 있을 때는 어떤 영적 만족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삶으로 체감된 고백과 간증을 통해 예수님을 높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어거스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동일합니다.
젊은 날은 젊은 날대로, 늙은 날은 늙은 날대로 주님 밖에서 무언가 행복을 찾으려고 기웃거렸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여기도 저기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만족을 주는 완벽하신 주님 안에 거하기 전에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38-42절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예수님께서 심방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감격에 겨워 있던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을 반겼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누이들은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서 힘들게 노력하는 마르다 보다는 예수님 옆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데 방관하고 있는 마리아를 칭찬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합리가 어떻게 있을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적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38-39절입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주의 발치에 ’앉아‘라고 번역한 헬라어 ’파라카디조‘를 직역하면 ’가장 가깝게 앉다.‘(to sit down near)는 뜻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말씀을 행여라도 놓칠까봐 가장 지근거리에서 주님을 보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님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주님을 붙들고 있습니까?
룻기를 읽을 때마다 오롯이 임하는 감동의 말씀이 있습니다.
1:14절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붙좇았더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다바크’는 아주 ‘밀접하게 착 달라붙어 있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영어성경 NLT에는 ‘다바크’를 ‘Clung tightly to’ 즉 ‘바짝 붙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베들레헴 행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시어머니의 동선에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도 주님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영적 긴장감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완전하신 제사장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을 위해 단번에 십자가라는 지성소에 들어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8:5절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붙잡혀’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쉬네꼬'는 소를 사방에 모는 경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빈틈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에 빈틈없이 붙들렸기에 고린도라는 무시무시한 지역에 바울을 돕기 위해 내려온 실라와 디모데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 예수를 붙드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최종환안수집사의 둘째 정훈이가 팔 골절상을 당해 부숴진 부분에 핀을 고정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제게 최집사께서 긴급 중보 기도 문자를 보내셨습니다.
“정훈이 내일 정오로 수술시간이 잡혔습니다. 기도제목은 먼저 마취주사가 잘 진행되는 것과 집도의의 손을 통해 과도한 절개가 아닌 최소한의 절개로 핀삽입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식 놈으로 인해 목사님 속을 시끄럽게 하네요.”
기도제목을 중보요청으로 받고 민감하게 중보했습니다.
중보 요청 내용 그대로 민감하게 중보했습니다.
기도한 대로 성공적인 수술이 이루어져 정훈이가 회복 중입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인 최종환집사의 기도 요청과 전화를 통해 넘어오는 목소리에서 제가 아버지이기에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부성적 사랑의 애잔함과 절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아들의 수술과정에 있어서 단 1%의 오차가 없는 완벽한 수술을 기대하는 간절함과 소망,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공교롭게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이렇게 적용하면서 설교를 맺겟습니다.
자식을 향해 갖고 있는 어버이의 그 간절한 사랑과 기대감을 부모된 여러분 모두가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해서 묻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자식에게 바라고 있는 그 기대감과 간절함처럼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기대감과 간절함이 동일하게 있습니까?
영원한 제사장으로 살아계시면서 여러분을 위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다바크’(붙듦)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쉬네꼬 하고 있습니까?
단언합니다.
부모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은 더 크다는 사실을.
찬양하겠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또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 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 땐 나는 만족하였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