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소망 중의 소망2024-03-07 16:23
작성자 Level 10

2022년 5월 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6)

 

본문히브리서 7:11-19

제목소망 중의 소망

 

서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 리더십을 강의할 때였습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김병도 교수가 쓴 도전력이라는 책을 발제 참고 도서로 선정해서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이 책을 맡은 조에서 불평이 들어왔습니다.

믿지 않은 일반대학교 교수의 책을 선택해서 발표하라고 한 교수의 의도가 신학대학교 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불만 제기였습니다.

학생들의 압박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밀고 나갔습니다.

학기가 끝나고 교수 평가 방에 발제를 맡았던 학생들이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서 저를 공격했습니다.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좌파 교수

복음주의적이지 않은 자유주의에 물든 목사

이런 예는 저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 친구 목사에게도 이런 경우는 즐비합니다.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맡은 동기 목사가 강의 중에 신영복 교수의 책을 인용하였는데 학기 종강 후에 클래스에서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중에 교수 평가란에 이렇게 적었다는 후문을 전언해 주었습니다.

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까지 언도 받은 빨갱이를 들먹인 교수는 신학대학교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

한세대학교에서 평생 강의를 친구는 거의 매 학기마다 진보적 좌파 교수로 몰려 곤혹을 치룬다는 이야기도 듣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정권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보수정권이 승리한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단발마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정권을 잡았던 진보적인 정권이 국민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즈음에서 보수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려합니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수라는 단어의 뜻 풀이가 이렇습니다.

새로운 것과 변화보다 옛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는 이념이다정치이념으로서의 의미는 현 체제의 안정성을 우선시하면서 점진적인 개혁과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문장 그대로를 유지한다면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사상이자 이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1/2 정도의 수는 보수주의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보수라는 좋은 의미의 사상이 더 좋은 것들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것에 대하여 반대해야 한다는 결벽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신대원 학생 중에 믿지 않은 교수의 글을 사탄적인 글이라 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손사레치는 폐쇄성은 보수라는 이름으로 무장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무지 때문에 자기 스스로를 고립무원으로 만드는 비참한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8장을 보면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군대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을 축귀하신 예수님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8:26-27절을 봅니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또 다른 사역을 위해 도착한 장소가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였습니다.

거라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림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림 설명)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당시의 유대 팔레스타인 지도입니다.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설명하자면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광범위한 지역이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적 측면으로 보면 암몬의 영향이 짙었던 지역을 데가볼리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사마리아와 같이 불온한 지역이었습니다.

유니언 신학교의 라마 윌리암슨(Lamar Williamson) 교수는 자신의 주석에서 '갈릴리 맞은편즉 데가볼리 지역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께서 건너가신 갈릴리 맞은편 지역은 유대인들이 극도로 경계하는 이방인들의 지역이었다이 곳은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에 관한 율법인 코세르(kosher)와 정반대되는 부정한 음식들을 먹는 지역이었다이런 이유로 갈릴리 맞은편은 무덤이 산재되어 있었고 돼지귀신들과 같은 유대인들이 금기시하는 것들이 살고 있었던 버려진 땅이었다.” (라마 윌리암슨, “마가복음 주석-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p,172.)

유대 공동체로부터 버려졌다는 의미를 확인해 주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유대인들이 식용으로 금기시하는 돼지를 키우는 장소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데가볼리는 유대 사회에서 격리될 정도로 불량한 부류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고유대 율법적으로 낙인이 찍힌 자들이 살고 있었던 후미진 지역이었습니다.

이 데가볼리 지역에 수도 같은 역할을 하던 장소가 바로 거라사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을 축귀하신 사건은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재 강조하지만 데가볼리 지역에 살고 있었던 지역 주민들은 유대 정통 사회에서 이탈된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 사람들은 웬만한 상황에 대해서는 서로가 이해하고 연대하는 끈이 유대 사회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강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같은 기사인 마태복음 8:28절의 보고는 상당히 의외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데가볼리 지역의 거라사 지역에 살고 있던 마을 주민들도 이 귀신들린 자와는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골칫거리였습니다.

그 사람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그 지역에서도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거칠게 귀신들린 자를 축귀하심으로 정상인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군대라는 이름의 집단적 귀신을 몰아내시면서 그 귀신을 데가볼리에서만 키우던 돼지떼에게로 들어가게 했음을 마태복음 저자는 보고합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때 몰사한 돼지의 수를 약 2,000마리(막 5:13)라고 산정한 것을 볼 때 데가볼리 지역에서 돼지 키우기가 얼마나 중요한 산업의 기반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데가볼리는 돼지 판매로 인해 생기는 경제적 수익이 막대했을 것입니다.

허나 예수께서 행하신 축귀 역사는 곧바로 데가볼리 지역 경제를 마비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돼지 키우기로 적지 않은 부를 창출했던 데가볼리 축산업자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압박을 가하는 장면이 마가복음 5: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간구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파라칼레오를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예수님의 권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대단히 점잖게 간구하다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경고하며 가르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 이 땅에서 떠나라고 경고하며 협박한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산상의 막대한 피해를 입힌 예수를 좋게 보지 않은 것입니다.

데가볼리 사람들의 반응을 본문에 적용하여 이렇게 해석해 보려 합니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자신의 지역에 살며 고통당하며 살고 있는 귀신들린 자에 대한 치유에 대해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단 한 명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거라사까지 방문했는데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군대 귀신들린자의 영혼에 대해서는 데가볼리 사람들은 1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재산권 손실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영적으로 접근하자면 보수적인 폐쇄성으로 인해 더 귀하고 좋은 영혼 구원과 치유라는 것에 대한 수용을 거부한 것입니다.

더 좋은 것에 대해 거부한 자들의 면면을 알려주는 기사가 데가볼리 기사입니다.

 

본론)

 

본문에 설명되고 있는 멜기세덱의 이해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아주 적절한 이해를 우리 독자들에게 줍니다.

12절 말씀은 대단히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지금 히브리서라는 설교문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수신자는 유대 율법주의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더 극단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에서 이탈하여 유대교라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는 배교자들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율법으로의 회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건강한 보수적인 신앙에서 폐쇄적인 수구적 근본주의로 돌아가는 재앙을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12절의 발언은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제사의 직분도 바뀌었으니 율법도 바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선포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이런 충격적인 발언이 무대뽀식의 발언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신학적인 근거도 있었습니다.

11절 본문을 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문율이 무엇입니까?

아론의 반열 즉 레위지파에서 제사장들이 나왔다는 절칙입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이것을 어기는 것은 파문을 당할 만한 불온한 행위입니다.

헌데 히브리서 저자가 무엇을 말합니까?

아론 즉 레위 지파에서 나온 제사장들이 온전하지 않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래위 지파 제사장들이 온전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다른 제사장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세운 제사장은 레위 지파가 아닌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론의 반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3절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존재가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을 세운 이유는 제사의 직분에 변화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천명한 하나님의 의지는 이전에 유대 공동체가 목숨처럼 여긴 제사와 율법의 불완전함을 지적한 것이었고이 불완전함을 다시 완전한 상태로 바꾸겠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불완전함을 고치기 위해 나타난 제사장이 멜기세덱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멜기세덱이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한 대안이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단지 멜기세덱의 대안론에 머물지 않고 더 중요한 한 사실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본문 13-15절을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분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해 있는데 그 지파에서는 하나도 제사장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우리 주님은 분명히 유다 지파의 후손입니다모세는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멜기세덱과 같은 다른 제사장이 나타난 것을 보니 우리가 말한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 중에 완전한 제사장이 없기에 대안으로 제시한 멜기세덱이 귀하지만 멜기세덱보다 더 귀한 존재가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 즉 유다지파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강조한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지는 본문 16-18절에서 이렇게 강변합니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 있는 존재가 아님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처럼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는 분이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율법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라 계명을 폐하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능력의 소유자이시기에 그 분이 갖고 계신 능력을 본문 마지막 19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보다 더 좋은 소망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저자는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보다 더 좋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소망 중의 소망은 예수님이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소망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임하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나의 소망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84:10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구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편의 부제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6:21-24절에 따르면 고라 자손들도 레위의 후손들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대다수가 성전을 섬기던 성가대 찬양사역자들이었지만 때로는 성전에서 성전 문지기(대상 9:19, 26:1)혹은 빵을 굽는 자(대상 9:31)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소개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섬기는 사역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84:10절에 소개된 그들의 신앙고백과 노래를 들여다 보노라면 그들의 영적 시각과 거룩한 욕심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왜 이들은 휘황찬란한 세속적 영광의 자리보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성전 문지기를 선망했을까요?

그곳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출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에게 소중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암송하는 요한복음 14:6절을 곱씹어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최고의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도 선교의 성자라고 말하는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던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나더러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구 두 구절을 꼽으라고 한다면나는 다음의 두 구절을 꼽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1:14)과 이 예수‘(행 4:11)예수의 유일성은 이 두 구절에 있다.” (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복 있는 사람,pp,185-186.)

주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 앞에 서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그 분을 나의 궁극적인 소망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결론)

 

챨스 프라이스 목사가 갈파한 글을 읽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시다우리의 간구를 듣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이시다열매를 내는 것은 우리의 섬김이 아니라 섬김 가운데 있는 능력이다실재와 생명을 호흡하는 것은 우리의 교회 출석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챨스 프라이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생명의 말씀사,p,180.)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제가 프라이스 목사의 이 글을 담아 놓은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 삶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궁극의 목적이자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이 행하셨던 삶을 우리도 살아내야 합니다.

2022년 오늘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념과 사상이 내 삶의 소망이자 목적으로 변질되는 느낌을 받아 아쉬울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예수가 내 삶의 소망일 때만 가능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주님을 소망 삼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삶에 소망 내가 바라는 한 분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한 없는 사랑 풍성한 긍휼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예수 닮기를 예수 보기를

예수만 높이길 내가 원하네

내 평생 소원 예수 닮기를

예수만 닮기를 내가 원하네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성품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자비하시고 위로자 되시는

예수 닮기를 내가 원하네

예수 닮기를 예수 보기를

예수만 높이길 내가 원하네

내 평생 소원 예수 닮기를

예수만 닮기를 내가 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