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4) 본문: 히브리서 6:19-20 제목: 갖고 있습니까? 서론) 제가 참 좋아하는 뮤지컬 영화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명작인 사운드 오브 뮤직입니다. 워낙 이 영화에 담긴 16곡 전부가 주옥같은 곡들이기에 저는 이 영화의 음악들을 곧잘 LP로 들으며 감상하곤 합니다. 에델바이스, 도레미송, My favorite song 등등 너무 좋은 곡들이 많아 특히 지금 같은 봄이 되면 항상 애청하는 OST 음악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취향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제게 이 뮤지컬 영화에 담긴 16곡 중에 특히 좋아하는 곡을 하나 추천하라고 한다면 단연 'I have confidence'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주인공 마리아는 수녀가 되기 위해 수녀원에 입소하는데 마리아의 성격이 수녀가 가져야 할 내향적인 성격이 아니라 외향적인데다 왈가닥처럼 보여 수녀원장의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수녀원장은 마리아가 수녀가 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을 해서 예비역 장성이었던 폰 트랩 가의 보모로 보냅니다. 인턴 수녀로 살다가 수녀가 되기를 기대했던 마리아는 나름 실망했지만 낯선 폰 트랩가로 들어가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의 제목이 바로 I have confidence'입니다.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가 이렇습니다. “I have confidence in confidence alone. (Oh help) I have confidence in confidence alone. Besides which you see I have confidence in me! “나는 외롭지만 자신 있어. 나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지. 당신이 보는 것과는 달리 나는 내 안에 자신감으로 충만해.”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하며 폰 트랩 가로 들어가 7명의 자녀들을 음악과 사랑으로 치료하고, 양육하면서 보모로서의 역할에 승리하고 동시에 폰 트랩의 사랑까지 쟁취하고 해피엔딩을 이룬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이 영화는 너무 많이 보아서 대사를 외울 정도입니다. 특히 젊어서 이 영화를 접하고 ‘I have confidence’를 부르던 마리아를 처음 보았을 때 왠지 모를 대리만족이라는 희열까지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1987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현장으로 나아갈 때 부담감이 컸습니다. 단독 목회 임지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약속되어 있지 않은 앞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엄습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이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많아 졌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 내 부족함을 아뢰는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주인공 마리아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자신감이 생성되도록 이 노래를 부르며 마음가짐을 다잡이 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부른 이 노래에는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종신수녀가 되기 위해 수녀원에 입소한 마리아의 대단히 중요한 영적 팩트가 담겨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감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더 중요한 기도를 노래를 통해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자신감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빌립보서 4:13절을 나누어보십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처럼 그리스도인들에 힘을 주는 구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허나 역설적으로 이 구절만큼 의도가 왜곡된 채로 선포되는 구절도 또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능력주시는 자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오케이하신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빌립보서 4:11-12절을 읽어 보십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 스스로 자족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토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나의 자족의 주체이심을 인정한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고 살아간다고 바울은 역설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자족의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내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결국 그들은 그 분의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 셈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입니다. 시쳇말로 믿는 빽이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점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19절을 읽어 보십시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이 소망이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업이셨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갖고 있는 자들은 마치 배들이 항구에 들어와 정착하기 위해 내린 그 육중한 닻 같다고 말합니다. 이 비유를 말한 저자는 이런 소망을 갖게 된 자들은 영혼의 튼튼하고 견고한 닻을 내린 것이라고 적용합니다. 더불어 이런 소망을 갖고 있는 자는 휘장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역설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의 개념 중에서 너무 중요한 휘장에 대한 의미에 접근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20절에 의하면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먼저 앞서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진술합니다. 이 구절 이해를 위해서는 주석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26:31-32절을 읽어드립니다. “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아서 금 갈고리를 네 기둥 위에 늘어뜨리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 받침 위에 둘지며” 성막에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을 만들라고 모세에게 하명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든 지성소 안에 법궤를 보관하라고 명하십니다. 더불어 이 장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이니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은 죽임을 당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더불어 1년 한 번, 대제사장만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죄 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들어올 것을 명하셨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심으로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거할 장소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임재 장소가 차별화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인 지성소와 인간의 대표성인 제사장이 거하는 성소를 막고 있는 구분점이 바로 휘장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휘장은 단절의 상징성일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을 단절시킨 상징이었던 휘장이 열리는 사건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7:51절을 소개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여러 교우들이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다른 공간적 장소였던 헤롯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고 있었던 대형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내린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함의가 담겨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담당하신 십자가 죽음이 단절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상태를 극복하게 해준 엄청난 사건이라는 점을 휘장의 찢어짐이라는 사건이 알려줍니다. 동시에 본문 20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대로 예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휘장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는 의미까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이 1년 딱 한 번, 7월 10일 대 속죄일이었습니다. 이 날 말고는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 죄를 속량하신 주체이시기에 여러 차례 지성소를 들어가실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해서 아예 휘장 자체를 찢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0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셨다는 표현은 다음 주일부터 나누게 될 7-9장 강해를 통해 소상히 살피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강해를 통해 오늘 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나의 레마로 받기를 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나누겠습니다. ※ 당신은 이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앞에서 설명을 했지만 소망에 대한 대단히 확실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히브리서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0: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저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하여 저는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취한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저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자, 목회신학의 내용이기도 한 것이기에 주저 없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완성될 때 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은혜입니다. 즉 구원의 완성에 참여하게 되는 복입니다.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은 구원의 계획을 실천하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반드시 오게 될 것이며,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게 될 그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과 그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때 그 나라의 백성으로 영원히 살게 될 영광을 누가 받습니까? 소망을 갖고 있는 자가 받습니다. 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견고하게 사수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구원의 은혜를 사수합니까? 예수의 피를 힘입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는 믿음에서 변질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 은혜의 감동을 사수하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견고하게 붙드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찬양의 가사는 정답입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한 주간이었습니다. 방송에서만 듣던 확진자라는 이름으로 7일 동안 살아야 했던 주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가족과 격리해야 했고, 교우들과 만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든 육체적인 고통과 맞서야 했습니다. 오늘 격리 기간이 끝나는 날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3일은 더 예민하게 주의해야 하는 관찰기간으로 보내야 합니다. 더불어 더 철저한 몸 관리를 통해 무너져 버린 바이오리듬도 되찾아야 하고, 다시 일상에 서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유감스럽게 오미크론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 경험하게 된다는 증상을 모두 경험한 것 같습니다. 교우들이 이모저모로 중보 해주셔서 오늘 녹화 영상으로나마 설교 섬김을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격리를 마치면서 웃픈 생각을 하나 하기로 했습니다.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코로나 19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했는데 뭔가 긍정적인 효과는 없는 걸까를 생뚱맞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간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코로나 확진 후 치료된 자들은 이제 슈퍼 항체가 보균자가 되었으니까 나름 코로나 19에서 해방되었다고 말이지요. 병리학적으로 그런 주장이 가짜뉴스라고는 하지만 이미 진단 후 치료가 된 사람은 재 감염률이 극히 저조하다는 연구 결과는 제게는 굿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웃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치료자는 항체가 우수해서 재 감염률이 저조하다는 소식을 굿 뉴스로 인정하는 게 인간의 나약성입니다. 반면 예수 피를 힘입어 새로운 살 길인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영적인 항체를 공급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허다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은혜이자 소망의 항체를 공급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신앙의 모습이겠습니까? 이어령 박사가 글에서 이런 전례를 하나 소개합니다. “부인이 죽어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됐어요. 그러자 남편이 무의식적으로 ‘여보, 초 어디다 뒀어? 하며 묻더랍니다. 부인이 죽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부인을 찾은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의지하며 살아 온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아내를 찾는 남편의 모습에 문상 온 사람들이 전부 울었답니다.” (이어령,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열림원,p,132.)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지하는 존재가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의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어야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요? 반드시 임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내가 지금 영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나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주군을 소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