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목회전서2024-06-11 09:3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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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임채영
ㆍ출판사 우리가 본 책
ㆍ작성일 2019-02-09 21:37:41

 

임채영의 “목회전서”(우리가 본 책 간, 2019년)를 읽고


몇 달 전, 신학교 동기 목사 부부들이 사석에서 만났다. 정글 같은 현장에서 치열하게 목회하는 현장 목회자들이기에 이런 만남은 언제나 호기롭게 여기며 기쁨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날도 매일반이었다.
동기 한 명이 이렇게 같이 동석한 친구에게 물었다.
“책이 다 되었다며?”
질문 받은 친구가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도 잘 몰라, 시답지 않아서 관심 안 가지려고 해!”
그렇다. 그 시답지 않은 책이 어제 내 손에 들어왔다. 저자가 보내기 싫다며 차일피일 미루기에 반 협박하여 받아낸 소중한 책이다.
책 제목은 ‘목회전서’, 부제로 ‘오늘의 목사가 내일의 목사에게’로 판서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세 명의 선배 목사를 후배 전도사가 찾아가 ‘개척’, ‘설교’, ‘심방’의 테제를 가지고 심도 있게 인터뷰를 해서 그 자료들을 모아 만든 옴니버스 형식의 엮은 책으로 그 설정은 구성되어 있다. 이 세 사람 중에 두 번째 세션을 맡고 있는 저자가 필자의 절친인 서부 교회 임채영 목사이기에 의무감을 갖고 그가 담당한 ‘설교’에 대한 대담 기록들을 약 1시간 동안 진지하게 독서했다. 친구의 대담 글을 읽고 난 뒤, 양가감정에 올라왔다.
“한쪽 감정이다. 꽤 신선한데! 또 다른 한쪽감정 아쉽다! 이다.”
먼저, ‘꽤 신선한데!’ 의 評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신선함은 친구가 현장에서 사역하면서 피력한 설교 사역에 대하여 갑각류가 가지고 있는 껍데기를 여지없이 벗어던진 그만이할 수 있는 나신(裸身)의 진솔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포장된 설교, 보이기 위한 설교, ‘나’(설교자)가 진원이 되는 설교가 아닌 철저한 성경적 내레이션에 천착하려는 노력이 담보된 설교자의 소회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필자를 언제나 고개 숙이게 하는 존경하는 친구다. 그 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인격이다. 누구에게나 균형으로 다가서는 친구의 인격을 필자는 갖지 못했기에 항상 배우고 그래서 나를 기죽이는 그런 친구이기에 매번 친구의 인격을 벤치마킹하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글 항아리에 담긴 친구의 대담 내용 하나하나는 필자를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은 가슴의 소리였기에 역시나! 의 감동으로 그의 글을 내내 읽었다.
“설교학자 데이빗 버트릿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떨어질 때, 우리의 삶을 포밍(forming)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는 아니고 새로운 형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온 우주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자금도 저는 하나님이 ‘설교를 통하여’ 온 우주를 새롭게 이끌어간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바로 ‘설교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들의 말 한 마디가 떨어져서 성도들의 귀에, 마음속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설교 말씀 속에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이 자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들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시 우주를 만들어갑니다.”(p,147) 
저자가 피력한 설교신학의 핵심이 여기에 녹록하게 담겨 있다. 설교를 우주론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외연을 확장한 저자의 논지는 대단히 위력적이다. 왜? 이렇게 설교신학적인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설교하는 자들이 희귀하다고 필자는 보기 때문이다. 저자가 글 내내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설교 신학은 설교의 마무리를 설교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에게 맡긴다는 포인트이다. 흔히 말하는 귀납적인 설교의 행태를 고집한다는 점이다.
“저는 회중들에게 제 설교의 결론을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p,149)
물론 저자의 이런 설교신학의 흐름에 대하여 반론하는 평자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가뜩이나 조급함으로 무언가를 내 설교의 시간 내에 끝장내겠다고 결의하는 필자보다 그는 분명 앞선 탁월한 선수다. 그래서 그런 그가 부럽다. 저자는 설교 작성을 묻는 대담자(對談者)에게 이렇게 一說 했다.
“나는 무엇보다 그 성경에서 일어난 사건이 ‘당신의 사건’이고, ‘당신이 바로 그 사건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회중에게 알려주는 것을 설교 작성의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pp,156-157)
필자 역시 저자의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야 할 유일한 항목은 복음의 절대성이다. 그러나 그 복음을 구성하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성경중심적인 성경해석과 더불어 성경을 감싸고 있는 상황중심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무시하게 되면 성경 해석의 질이 떨어진다. 그래서 친구의 자문에 귀를 기울인 부분이 있다.
“설교란 두 언어(시대의 언어와 성경의 언어)를 동시에 청종해야 합니다. (중략) 설교의 구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그 음성을 전하는 것 반반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경솔히 여깁니다. 또는 가볍게 여깁니다.”(p,181)
성경중심의 해석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작업일 것이다. 반면 그 하나님의 들린 음성을 전하는 것은 상황중심적인 성경해석 연구와 공부로 가능하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놀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대학원 시절이었던 오래 전에 읽은 글을 가슴에 담고 계속 나를 쳤던 도구로 사용했다. 생각해 보면 무시무시한 말이었기에 최선을 다해 보려고 했다. 성토마스 대학교 성서학 교수인 양승애 교수는 이렇게 갈파했다.
“‘성서 뒤의 세계’ 초점을 두는 방법론 즉 원전비평, 역사비평, 출전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성서 속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구조주의적인 비평, 수사학적인 비평, 서술비평도 병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서 앞의 세계’에 초점을 두는 방법론인 이념 비평, 지역공동체 비평은 더 더군다나 오늘의 성서해석에서 결코 누락되어서는 안 되는 성경 연구자들의 필연적 연구 과제이다.” (양승애, 외 11명 공저,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생활성서, 2001년, pp,8-9)             
설교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공부하는 자가 설교자이다. 철저하게 노력하는 자가 설교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저자는 필자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한 명이다. 다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설교자로서의 분투는 이 책 면면에 알갱이 굵게 채워져 있다. 그의 책을 섭렵하는 독자들의 분투를 그래서 기대한다.

이제 양가감정의 또 다른 한축을 말해야겠다. 저자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잘못된 설교는 ‘못 알아듣게 하는 설교입니다. 설교라는 것은 어려운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알아듣기 쉽게 만드는 것인데 가끔 성경 본문보다 설교를 더 어렵게 하는 목사님들이 계시더군요. 저는 그런 설교는 일단 잘못된 설교라고 분류하고 싶어요. 설교는 쉬워야 합니다. 쉬운 설교는 다른 말로 하면 들리는 설교입니다.”(p,202)
이 글을 읽다가 왠지 찔끔했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친구한테 항의하고 싶다. 누군 그렇게 설교하고 싶지 않은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냐고 말이다. 농담반 진담반이다. 이제 내 속마음을 내어놓아야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들리는 설교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 이 말은 저자와 관점이 조금은 다르다. 설교는 쉬운 설교, 어려운 설교가 엄격하게 없다. 내 경험상, 저자가 말한 대로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신학적 본문 연구’(p,191)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신학적 본문 연구는 태생적으로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는 루돌프 오토가 말한 ‘누미노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누미노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전체의 ‘누미노제’에 대한 이해는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즉 ‘거룩한 의미’는 성령의 도우심 말고는 방법이 없다.
필자는 성경이 말하는 일체의 구속사의 다른 이름을 시내 산에 나타난 불붙은 그러나 꺼지지 않는 가시떨기나무라고 정의하곤 한다. 가야바의 뜰에서 베드로에게 들린 닭울음소리라고 말하곤 한다. 다메섹 노상에 들린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음성이라고 말한다. 저자와는 다른 나만의 고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설교는 태생적으로 누미노제이다. 그러므로 들리는 설교보다 안 들리는 설교가 더 설교라고 진단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 대학원에서 강의를 듣던 제자가 방문했다. 그 제자가 예배를 마치고 서재에 올라와 필자에게 이렇게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교수님, 조심스럽지만 질문 하나 드릴게요. 혹시 오늘 설교를 교우들이 알아듣나요?”
참담한 말을 듣고 필자도 아팠다. 저자는 어려운 설교는 나쁜 설교라고 정의했는데 필자의 덧난 부분에 소금을 뿌렸다.(ㅎㅎ)
어려운 설교!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을 것 같다. 성령께서 책임지시겠지 하며 자위한다.
저자의 설교를 내가 건조하면 그가 섬기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들으며 은혜를 받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설교의 은사들을 가진 저자를 너무 부러워하며 시기(ㅎㅎ)까지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설교를 듣다보면 조지 횟필드의 말이 떠오른다.
조지 휫필드가 처음 그의 설교를 출판하고자 제의를 받았을 때 그는 일단 동의를 하면서 출판담당자에게 이렇게 덧붙였다는 그의 말이.
“천둥과 번개를 지면에 담아낼 수는 없을 텐 데요.” (팀 켈러, “설교”, 두란노, 2016년,p,257)
사랑하는 친구의 가슴으로 써 내려간 ‘목회전서’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박수를 보낸다.
 

언제나 제천에서 목사 임채영을 닮고 싶어 하는 모자란 목사 이강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