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가토 슈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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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글항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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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02-14 14:2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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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 (글항아리, 2015년)를 읽고 “하나님은 땅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 체 하지 않으십니다. 신을 화나게 하는 ‘끔찍하고 과도한 행위’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는 이들이 저지르는 폭력을 가리킵니다.”(김기석,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한 태도”, 비아토르, 2018년,p,168) 이 땅에 폭력이 발생하는 일체의 행위들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는 이들 때문이라는 김 목사의 지적을 읽다가 그렇다면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는다는 말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를 사유해 보았다. 그러다가 불연 듯 든 생각이 ‘나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마치 변화산상에서 베드로의 눈에 보이던 ‘황홀경’에 그는 도취되어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산을 내려가지 않으려던 그 극도의 이기성 말이다. 혹여나 그 이기적 황홀경을 차지하는 데 방해를 받을 때 자행하는 것이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상념이 필자에게 들었다. 저자가 태어난 1919년 이후 일본이 그랬다. 아주 기분 나쁜 그림이 그려졌다. 이 시대, 일본은 일본만이 보였다. 그들이 침략한 여타 나라들은 마루타에 지나지 않는 도구들이었다. 저자가 태어난 바로 그 해, 마루타로 여겼던 조선 반도에 살고 있었던 내 선조들은 자기만 보였던 그래서 폭력과 악의 축이었던 일본에 의해서 자행된 무차별한 폭력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물론 저자는 이 이기성을 갖고 있었던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라는 폭력에 맞선 몇 안 되는 지성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본서를 읽는 내는 필자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저자는 이 땅에 피가 솟구치는 바로 그해, 1919년에 태어났다고 했다. “책 이름을 ‘양의 노래’ 붙인 까닭은, 부분적으로 내가 양의 해에 태어났기 때문이고, 또 성질 이 온순한 양과 내가 상통하는 점도 없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p,497)
그 양의 해에 조선반도는 피로 물들었다. 그렇게 온순한 성격을 가진 저자의 조국인 대일본제국(웃자)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이 땅의 순결한 사람들에게 자행한 자기 분수를 모르고 지키지 않은 자들의 무시무시한 폭력 때문에.
이 정도는 해 놔야지 필자가 일본인이 쓴 이 글을 읽는 자로서 나름의 방어기제를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아 내심 한국인으로서의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목사라는 사람인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역설하며 운운하는 직업을 가진 자인데도 난 아직도 대한민국의 거리를 종횡무진 다니고 있는 도요타, 혼다, 렉서스 운전자를 보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본다. 일왕의 생일 축하파티가 치외법권 지역이라고 하는 일본 대사관 관저가 아닌 서울의 모 호텔에서 자행되는 것을 보면 치욕스럽다. 필자는 거기에 고개를 숙이고 참석한 정치인들을 별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에 대한 인식은 싸늘하다. 일본과의 일체의 스포츠 경기를 한다고 하면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고, 만에 하나 패배하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팍팍하다. 고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은 나도 어쩔 수가 한국인인 것이 분명하다. 몇 년 전에 일본 강점기 시절에 일본의 국가적 성폭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에 지원금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소리 없이 울었다. 할머니들이 불쌍해서라기보다는 이토록 무자비한 폭력을 자국민이 당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했던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동시에 이런 아픔을 당한 우리의 어머니들이 같은 하늘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그 지옥 같은 상흔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역학적인 구도를 내세워 아직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이 땅에 존재하는 현대판 을사오적과도 같은 친일파 정치인들이 버젓이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한 치욕 때문에. 필자는 일본인이 저자인 책을 읽을 때, 반드시 먼저 저자의 이력을 살핀다. 그리고 그 저자가 평화헌법 9조를 지키려는 양심이 있는 지성이 있는 자라는 전제가 있어야 읽는다. 해서 필자가 읽은 일본의 저자들의 책은 한정되어 있다. 예컨대, 오에 겐자부로, 쓰루미 슌스케, 사사키 아타루, 다치바나 다카시, 사이토 다카시 정도이다. 물론, 전후 작가인 나스메 쏘세키나 엔도 슈사쿠나, 우찌무라 간조는 당연한 독서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중에 섬기는 교회의 지체가 독서 버킷 리스트로 소개해 준 가토 슈이치를 만났다. 장장 500페이지 중반을 넘기는 책의 독서는 실로 오래 만에 일이었기에 조금은 부담이 되었지만 가능한 정독하며 읽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내 나라가 가장 아픈 시기였던 1919-1960년까지 저자가 저술해 나간 자전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약간의 부르조아적인 냄새가 농후하여 내 성향상 인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기술한 한 지면의 대목에 이르러 이 책을 읽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행동과는 무관한 판단에서 희망적인 관측을 배제하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나는 ‘몰락’의 과정에 있었던 가족과 지내면서, 일본 제국 전체의 ‘몰락’을 예상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 건 ‘몰락’을 이해하는 것 외에는 ‘몰락’을 넘어설 수 없다고 여겨졌다.”(p,209)
이 구절을 만나면서 한국인인 필자와 일본인이었던 저자와의 지루했던 묘한 줄다리기를 끊기로 했다. 적어도 이 구절을 적시한 저자에게서 필자를 오싹하게 하게 하는 전혀 일본인 같지 않은 냉철한 지성인의 면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을 개시한 일본 제국은 ‘미국 정벌’, ‘승리’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국민들을 세뇌시켰다. 그러다가 전세 불리해 지자 이제는 ‘절대 불패’라는 슬로건으로 국민의 정서를 눈멀게 했다. 맨 처음부터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이기성으로 시작한 전쟁의 끝이 패전으로 끝날 것을 예측한 저자는 조국의 멸망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두가 이기성으로 눈이 멀어 있는 시대, 그래도 눈뜨고 있는 자가 일본에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감사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또 다른 지면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문화란 형(形)이고, 형이란 외재화 된 정신이며, 그 정신은 자기를 외재화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만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p,350)
필자는 저자의 이 독백을 접하면서 동의했다. 자기 안에 독선적으로 내재화된 문화(저자는 문화만을 설했지만) 혹은 과학, 종교, 국가적 이념 등등은 자기를 똑바른 정체성으로 나아가도록 실현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합리화시켜주는 이상한 괴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저자의 에두름을 필자도 수용했기 때문이다. 해서 자기 아집, 독선으로 무장되어 있는 일체의 것들은 경계해야 한다. 아마도 이 글은 저자는 자기의 나라 일본을 염두 한 채로 경고성 일격을 가한 셈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이자 업(業)을 일본에 두고 있는 자이기에 일본을 향하여 쓴 소리를 내기가 녹록하지 않은 위치에 있지만 때마다 일본을 향하여 비수와 같은 정곡을 찌르는 글들을 쓰고 있는 강상중 교수가 쓴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을 보면 이런 힘 있는 글을 만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세계가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다.”(p,159) 가토 슈이츠는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적어도 일본이라는 나라가 악의 축을 놓지 않으려는 제국주의적인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작금, 올바른 일본 정신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일본만의 비극이 아니라 전 세계의 비극이기도 한다. 강상중의 말대로 일본이 사랑의 능력을 더 크게 상실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글을 마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진짜로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그러려면 내 조국이 양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당위(當爲)이다.
수요일 설교 준비를 마친 2019년 2월 13일 오후 4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