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하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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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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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6-11-24 12: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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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의 ‘기다림’을 읽고 (도서출판 시공사, 2013년)
“여보, 나 슬퍼서 죽을 것 같아. 가슴이 미어터진단 말이야. 이 빌어먹을 놈의 인생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p,474)
쿵 린이 찾아간 전처인 수위에게 전한 내뱉은 자탄과 자조가 어우러진 절규이다. 인생이 거의 절반을 지났을 때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싶지만 린의 소리침에서 적지 않은 잘못 산 메아리가 나에게도 공명되었다.
쿵 린은 중국의 문화 혁명기라는 격변의 시대에 군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형적 엘리트 계층의 군의관이다. 그런 그는 당시 시대적 정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처자 수위와 결혼하여 딸 화를 둔 유부남이다. 그는 가족을 고향에 남겨두고 그가 근무하는 육군 병원에서 지금의 아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도시적 감각의 미를 갖춘 간호사 우만나와 애정의 관계를 이어간다. 소위 말해 불륜의 사랑을 나눈다. 린은 아내가 있고, 딸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만나는 개의치 않고 유능해 보이는 젊은 의사 린에게 공격적인 사랑의 공세를 퍼붓는다. 이런 젊은 여성의 적극적인 구애에 린 역시 흔들리고 결국 고향에 있는 아내와 이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린은 딸과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대한 걱정으로 매년 만나와 약속한 이혼에 실패한 채 고향에서 돌아온다. 아내와 별거한 지 17년. 마침내 그녀의 동의 없이 법률적으로 이혼이 가능한 시기가 되고, 린과 만나의 끝없는 기다림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토록 간절했던 사랑하는 쿵 린과의 결혼에 성공한 우 만나는 쌍생아 남자 아이를 임신한 뒤에 난산 끝에 출산한다. 산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만나 역시 아이들을 양육하고 기르는 과정에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 진다. 결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꿔 왔던 장밋빛 그림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갭이 생긴다. 설상가상으로 만나는 심장으로 통하는 관상동맥이 폐색되는 치명적인 질환으로 시한부 선고까지 받는다. 피폐할 대로 피폐된 결혼 생활에 지쳐 있었던 쿵 린은 법적인 아내인 만나로부터 딸과 전 부인인 수위를 보고 오라는 허락을 받고 마지못해 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전 부인을 찾아 간다. 찾아간 수위의 집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린을 본 딸 화가 기쁨으로 그를 방으로 인도한다. 드디어 자기가 버린 전 아내와의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참 나쁜 사람인 린을 뜻밖에도 따뜻하게 맞이하는 자기가 버린 여자 수위의 태도로 보고 무너진 린은 사랑보다 따뜻한 가정이 이제는 더 그리워지는 이율배반적이 자신의 모습에 자책한다. 더 자신을 괴롭게 한 일은 아직도 못난 자신을 기다리는 수위의 진심이었다. 소설의 끝은 여운을 남긴다. 18년간 기다렸다가 결혼한 만나의 기다림, 그 기다림 때문에 남편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심적으로 자기를 버린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한 여자의 기다림을 묘사하고 소설은 대단원 막을 내린다. 어떤 이들이 하진의 작품에 대하여 폄훼한 것은 가장 통속적인 3류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라고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의 배경이 중국에 공산주의의 토대가 잡히는 문화 혁명의 시기였기에 남성편의주의, 혹은 진보적인 사회 문화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정치 구조의 틀 안에 행해진 남성우월주의의 소설이라고 평가를 내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런 양보를 전제한다고 할지라도 작가 하진은 이 작품으로 전미 작품상을 받을 정도의 수작이라고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 실례이다. 그렇다면 ‘기다림’은 왜 긍정의 평가를 받았을까? 서평자의 논으로 평해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 중에 가장 끈질긴 성정이 緣에 대한 단절을 두려워하는 것임을 작가가 기막힌 터치로 그려냈기 때문이라 평가하고 싶다. 소설은 맥은 단순히 한 남자를 중심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18년을 기다렸던 한 여인의 숨 가쁜 기다림을 집요하게 이어간다. 그러나 그 기다림으로 인해 또 한 편의 여인은 사랑하는 남편과 단절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주목할 것은 작가가 이 너무 상투적인 세속의 틀을 묘사하고 또 심지어 비윤리적 차원으로 고발하는 통속으로 소설을 이끌고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의 글 이음이 두 여인의 기다림 쪽으로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점은 하진의 매력이요 장점이다. 여성학자들을 물론 하진의 이런 류의 글짓기에 맹폭을 가할 것이 분명하다. 너무나 진부한 남성 폭력의 전형이라고 공격할 수 있는 빌미가 소설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로 이 부분에 대하여 일견 동의한다. 다만 작가의 글 이음에 있어서 서평자가 여성학자들이나 페미니스트의 공격에 전부를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글짓기 의도와 목적이 전술했듯이 인간 본성에 있어서 가장 두려워하는 단절성에 대한 방어기제로 ‘기다림’이라는 수단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진이 가지고 있는 작가적 발상이요, 표현하고자 하는 그만의 작가적 고집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가곡 중에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명곡이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난 이 시를 노래로 들을 때마다 기다라는 마음을 ‘거룩함’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너무 성스러운 이미지가 아닌가! 기다리는 마음의 恨이 말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서광선 박사의 ‘한의 이야기’에 이런 글이 나온다. “恨은 달래도 없어지지 않는다. 恨은 잠자지도 않고 가둘 수도 없다. 恨의 응어리는 풀어야 한다. 샤먼은 그래서 恨을 굿으로 푼다. 恨은 끊어버려야 한다. 소리를 지르고 난장판을 벌여야 한다. 恨의 역사는 순환적일 수 있고, 숙명적일 수 있다. 恨은 누가 대신 풀어 주지도 않기에 종속적인 恨 일수록 스스로 풀고 끊고 벗어야 한다.” 이렇게 한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심리적 기저 중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끄집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속성인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가, 난 한이라는 개념이 슬프기는 하지만 성스러워 보인다. 개신교 목사가 한을 설명할 때 아주 복음적인 차원으로 경계해야할 대상 정도로 정의해야 하는데 도리어 범신론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할 수 없다. 그게 나의 정직한 이해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그 한의 복판에 기다림이 있다. 그 기다림이 사람에 따라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지만 어느 것이든 상관없이 한이 전제된 기다림은 고결해 보인다. 서평자와 동일한 마음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진은 소설을 이어가는 내내 기다림이라는 개념을 긍정화시키고 있다. 기다림의 빌미를 준 쿵린, 18년을 기다렸던 우만나, 그리고 헤어짐의 아픔을 기다림이라는 성스러움으로 승화시킨 수위 등등의 소설 속의 내 친구들은 나에게 ‘기다림’을 종교적 언어로 상징화하는 유혹을 던져주는 선물을 주었다.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가 여든넷의 나이가 되도록 성전을 떠나지 않은 이유도 기다림 때문이었고, 시므온 역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고 기록한 누가의 기록은 지금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대강절을 맞이하는 어간에 한의 개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주군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에 담아 본다. 통속적인 것 같은데 통속적이지 않은 ‘기다림’에서 아기 예수를 맞는 지혜를 담아볼 수 있어 행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