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토트의 ‘설교’ 를 읽고 (IVP 간, 2016년) “I BELIEVE IN PREACHING”
이 책의 원제로 볼 수 있는 문장이다.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설교자로서 어느 정도의 자존감을 가졌기에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일까? 서평자 역시 설교를 하는 사람이기에 설교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날마다의 목양 현장에서 경험하고 있다. 저자의 선언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재론하지만 용이하지 않다. 지난 30년 동안 설교와 씨름하면서 분초마다 느끼는 자괴감은 과연 설교를 통하여 사람이 변화되는가? 에 답하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떡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설교를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이라고 공격해도 어쩔 수 없다. 다만 맡겨진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 전하는 것뿐이지. 헌데 ‘설교를 믿는다니!’ 서평자는 독자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복음주의권(福音主義圈)에 속해 있는 설교자 중에 저자의 번역된 책은 거의 다 섭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날마다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목회 현장이기에 저자의 글들은 적지 않은 목양적 도움을 주었고, 그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글들로 인해 아직도 나는 그에게서 현재진행의 도전을 받기도 한다. 특히 그가 남긴 ‘산상수훈’ (생명의 말씀사 간)은 참 신선하게 읽었던 감동이 있고,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두란노 간)는 소아시아 성지순례 때 직접 가지고 가서 다시 여행하며 읽으며 현장적인 감동을 새겼던 기억이 있다. ‘제자도’는 모든 목회자가 그랬듯이 목회자로서의 영성 추구가 어떤 의미를 주는가? 에 대해 깊은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잊을 수 없는 책이었다. 서고 준에 손이 자주 가는 곳에 놓여 있는 ‘기독교의 기본진리’(생명의 말씀사 간)는 지금도 종종 꺼내보는 색 바랜 책 중에 하나이다. 연륜이 쌓여가고 나이가 자꾸만 들어가는 목사라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더 더욱 설교가 부담이자 무거운 짐 중에 짐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금년에 결심한 것이 있다. 설교를 합법적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지난 30년을 고수하던 새벽예배 성경 강해를 성경 통독으로 바꾸었다. 6번의 설교를 줄이고 나니 날아갈 것 같다. 공 예배 설교 중에 주일 낮 예배 설교를 하지 않으면 방 빼(?)라 할 것 같아 주일 낮 설교는 어쩔 수 없어도 이외 예배 설교는 부교역자들에게 과감히 넘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벌써 이러 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역량 부족임을 알기에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치사하게 설교를 도적질하거나 가위질하는 역겨움은 도무지 용납이 안 되니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다. 작년 연말 1월 중 섭렵하고자 뽑은 10권의 책 중에 두 권이 서평자를 압도했다. 지금 서평을 작성하고 있는 존 스토트의 ‘설교’와 뉴욕의 지성들에게 천박하지 않은 지성과 영성 그리고 신학적 균형을 가지고 접근하여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뉴욕 리디머 교회의 설교자 팀 켈러의 ‘설교’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두 책이 먼저 눈에 띤 것은 아마도 직업의식과 생존의식(ㅎ) 때문이었으리라. 존 스토트의 글을 서평자가 좋아하는 이유는 극히 개인적인 소회이지만 그에게서 보이는 ‘건강한 보수’의 냄새라고 할까 싶다. 나는 성향적으로 보수적 성향과는 거리가 먼 것을 알기에 항상 그들을 경계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영역에서 내가 배워야할 가치들을 잃지 않으려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편이다. 그 중에 존 스토트는 항상 나에게 위로 거리이다. 더군다나 설교하기에 주눅 들어 있는 서평자에게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어떤 경우에는 놀랍게도 나를 설레게 하는 선생님의 역할을 해 준적이 많아 항상 고마울 따름이다. 총 7장으로 되어 있는 그의 글을 CHAPTER BY CHAPTER 하면서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극 부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얼마나 또한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는 공부를 했다. 첫 번째 마당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1950년에 쓰인 위대한 설교자이자 신학자인 크랜필드의 글을 인용한 것이었다. “회중석에서는 더 짧고, 가벼운 설교, 밝고, 편안한 예배를 요구하는 이들이 가득하고, 강단에는 군중의 취향에 영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오늘 현대 교회 생활의 안타까운 특징이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깊이 없는 회중이 깊이 없는 목회자를, 그리고 깊이 없는 목회자가 깊이 없는 회중을 양산한다.” (p,30) 지금부터 거의 70년 전의 글을 저자는 오늘을 사는 설교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도전으로 주저 없이 던졌다. “깊이 없는 회중이 깊이 없는 목회자를, 그리고 깊이 없는 목회자가 깊이 없는 회중을 양산한다.” 곱씹어도 대단한 통찰이다. 이 악순환의 톱니바퀴가 왜 과거의 강단이나 오늘의 교회 강단에서 굴러가고 있는지를 진단하기 위하여 크랜필드의 오래된 글을 끄집어 올려내면서까지 도전하고 있는 스토트의 진단에 이견 없이 동의한다. 군중의 취향에 맞는 설교를 골라 깊이 없는 회중을 만들어내는 것은 교회가 무너지는 첩경인 것은 물론 이렇게 허약해진 강단이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게 하는 최고의 요소임을 저자는 에둘러 비판하고 있다. 오늘 우리 교회 강단의 적나라한 맨살이 어떤가? 더 짧고, 더 가볍고, 더 밝고, 더 편안한 설교를 만들어 예배하러 나온 자들에 흥미 진지한 공연을 관람하도록 응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이런 고사 직전이 강단을 만든 일체의 무리들을 향하여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예배가 빈곤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빈곤하기 때문이고, 지식이 빈곤한 이유는 우리의 설교가 빈약하기 때문이다.”(p,39) 정답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갈파했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말할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 말할 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p,40) 가끔 목양의 현장에서 느끼는 참담함이 있다.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제 1 이사야의 말대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는 바로 그 시대의 암운이 고스란히 전이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자괴감이 오늘의 현장이다. 그러나 저자가 던진 한 마디가 위로가 된다. 지금이야 말로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그의 위로가 말이다. 저자는 두 번째 마당에서 설교의 신학을 논한다. 평자의 입장에서 적어도 존 스토트가 설교에 이런 단어를 붙여도 되겠는가? 할 정도의 의아함을 주는 그래서 솔직히 저자도 어쩔 수 없는 상업성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할 정도의 우려 섞인 단어인 ‘비결’을 이 장에서 논한다. 그러나 조금만 그의 의견을 진중하게 경청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그는 설교의 비결을 논하면서 이렇게 접근한다. “설교의 비결은 어떤 기술을 온전히 익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확신에 온전히 지배되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신학이 방법론보다 중요하다.”(p,45) 그렇다. 존 스토트가 설교에 비결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은 부정의 단어가 아니라 긍정의 모드였다. 이 보다 명쾌한 답이 어디에 있는가? 수많은 목사 후보생들이 어리숙하게 그리고 놀랍게 추구하는 것이 설교 잘하는 법이다. 소위 말해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를 잘하는 사람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그쪽으로 눈을 돌리는 자가 있다면 그는 선수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하나님이 조명하시는 그 분의 말하심을 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 100%이다. 저자는 말한다. “설교의 기술은 기껏해야 우리를 웅변자로 만들어 줄 뿐이다. 설교자가 되려면 신학이 필요하다.”(p,45) 이렇게 설교 신학의 중요함을 역설한 저자는 설교자가 가져야 할 신학적 확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는, 빛이신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 둘째, 하나님이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지금도 말씀하신다는 성경에 대한 확신이다. 셋째, 마틴 로이드 존스의 이야기처럼 ‘교회가 타락한 시기는 언제나 교회사적으로 설교가 타락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는 것을 인정하고 교회를 살아 있게 하고, 교회를 인도하고 거룩하게 하며, 개혁하고 갱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신학적 확신이다. 넷째, 행정 업무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사역자들이 본질적인 목회직에 대한 신학적 확신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사역자들을 상징하는 것은 사무실이 아니라 서재이며,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아닌 성경이어야 한다.” (p,66) 저자는 마지막으로 설교에 대한 신학적 확신을 요구했다. 그의 고집스러운 방향은 강해 설교였다. 전술했듯이 다섯 가지의 설교 신학적 콘텐츠는 비결이 아니라 신학이다. 서평자는 저자가 말하고 설교 신학적 지평에 대하여 곱씹어야 할 지적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강해설교라는 콘텐츠를 준비되어 있지 않은 설교자들이 무분별하게 도입함으로 인해 도리어 강해 설교의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들을 희석시키는 것에 대한 위험성이 오늘의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음에 대한 저자의 조금 더 세밀한 대안 제시가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이제 우리는 저자가 말한 설교의 역할(저자는 다리를 놓는 설교라고 표현함)을 나누어 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의미로 보면 21세기 현장에 직결되는 설교자들의 가장 민감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몇 가지만 그가 열거한 내용들을 소개해 본다. “부정의, 빈곤, 기아, 문맹, 질명, 환경오염, 자연 자원의 보존 실패, 낙태, 자비로운 살인, 안락사, 사형제도, 비인간적인 기술주의, 관료제, 실업, 민족주의, 폭력과 혁명, 군비경쟁, 핵확산, 생물학전과 테러의 위협, 범죄의 증가, 인종주의” 등이다. 이상의 주제들을 설교자는 금하지 말아야 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영적 주제에 집중한다고 해서 이런 주제의 설교를 금하면 하나님은 오직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 피조물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시사되고, 이렇게 영적인 문제만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행위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을 현실 세계에서 물러서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종교는 사람들을 마취시켜 현 상태를 묵종하게 만드는 아편이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비판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p,90) 이런 차원에서 저자의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한 결론적 설교자들이 선택해야 하는 교훈을 준다. “강단은 중립일 수 없다.”(p,91) 이제 저자와 씨름할 때가 되었다. 저자는 설교자들의 성경 연구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성경연구는 반드시 포괄적이어야 한다.” (p,96) 저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적어도 설교를 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거시적, 통시적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 성경을 부분만 읽고 연구하는 방법은 옳지 않다는 것을 제시한 셈이다. 이의 없이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한 대목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포괄성이 보수적 범주에 국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이다. 단적인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성경을 인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같은 세상의 관점과 철학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진진하게 기도해야 한다.”(p,98) 서평자는 그 반대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수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무슨 말인지 공감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은 인문주의,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비쳐볼 수 있는 혜안과 지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추종하고 따르는 차원이 아니라 그 스펙트럼으로 성경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포괄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평자는 반론하고 싶다. 그것이 진정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포괄적 접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혹자는 평자의 이 글을 보고 진보적 사상과 좌파적 사상을 갖고 있는 불온한 위험분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매도하는 지성과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하다. 엔도 슈사쿠의 ‘사해부근’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절절했다. 엔도가 소개한 예수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였다. 무기력하고, 전혀 기적을 나타내지 못하고, 능력으로 초자연적인 이적을 베풀지 못하는 그래서 신적인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무기력한 예수였다. 이로 인해 냉대와 멸시를 받는 천덕꾸러기 예수가 엔도가 말하는 예수였다. 그런데도 서평자는 사해부근에서의 예수에게서 눈을 띨 수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 보면 더 정감이 가는 예수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가 하나님만이 행하는 신성을 가진 능력자로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예수는 어느 지역이든 가는 곳마다 힘없는 자와 함께 곁에 있어주는 예수, 사회구조상 항상 비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어 피해를 당하던 민중과 민초들과 함께 곁에서 머무시는 예수였기 때문이다. 엔도가 말하고자하던 예수는 소위 진보적 논리로 마커스 보그나, 크로산이 항상 표현하는 역사적 예수로만으로도 표현이 부족한 가장 인격적인 예수로 평자는 수용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삶의 정황은 성경을 해석할 때 상황중심적인 성서해석이 훨씬 소중할 때가 있음을 현장 목회자인 평자는 직시하곤 한다. 이런 해석적 접근은 저자가 보수적 혹은 복음적인 틀로 성서 텍스트만을 통한 해석으로 한정하려는 것은 과유불급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차원에서 평자는 도리어 이렇게 논하고 싶다. “우리는 성경을 인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같은 세상의 관점과 철학을 이해하여 그 관점과 대비되는 성경적인 해석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인 연구와 공부가 필수적이다. 두렵다고, 혹은 부담스럽다고 그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가 공부를 게을리 한다는 것은 죄다. 저자는 이 점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솔직히 말해서 공부의 궁극적인 장애물은 게으름이다.”(p,111) 저자는 2011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기에는 그는 매스미디어와 각종 문명의 이기들이 어느 정도로 창궐했는지를 눈으로 본 세대를 거쳤다. 그러기에 저자는 매의 눈으로 이렇게 그 노구에 서슬이 시퍼렇게 죽비를 설교자들에게 내리쳤다. “하나님과 독대하려는 시간을 마련하려면 전자 기기의 전원을 끄는 훈련이 필요하다.”(p,111)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제된 삶을 살았고, 많은 시간을 기도와 공부에 할애했다고 소개한 저자는 설교자들이 이런 면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함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는 장에서 특히 평자에게 도전을 주었던 맥이 있었는데 그것은 설교 준비의 개인적 요소에 대한 진단이었다. 저자의 일침을 들어보자. “타인에게 하는 설교 가운데 최고의 것은 먼저 자신에게 했던 설교이다.”(p,119) 내가 전하고자 했던 설교를 일인칭화 하는 작업, 그리고 철저히 설교자인 나에게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시도하라는 저자의 권면은 평자를 흔들었다. 이렇게 피력한 저자는 제임스 스토커의 말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단문의 어구가 충격의 파편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깊은 개인적 확신에서 나오는 설교는 ‘경험의 혈흔(血痕)’이란다. 대단한 통찰이다. 내 자아에게 피 흘리기까지의 흔적이 없는 설교는 타인에게도 울림을 주지 못한다는 소리로 들었기에 나는 스토커의 갈파를 가슴에 담아 놓았다. 오늘, 설교가 없어서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고, 목사들이 추문을 뿌리고, 성도들이 성도답지 않은 일탈들을 자행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떤 의미로 보면 바울이 직시한대로 오늘의 영적 무기력은 예수의 혈흔이 없기 때문이고, 신자에게 예수의 혈흔이 없는 것은 목사가 전하는 설교에 예수의 혈흔이 없기 때문이지 않은가! 모든 설교자들이 오기로 부인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고개를 조아리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설교자의 삶의 노정에 그리고 경험의 노정에 혈흔이 없는데 설교에서 그것이 배태되겠는가! 어불성설이다. 저자의 설교 준비의 과정은 어떤 의미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준비과정을 소개한다. 본문에 대한 철저한 연구, 본문에 대한 영적인 숙고, 본문에 대한 연구과정 중에 내 생각 버리기, 그리고 원고 작성에 대한 방법론 등등은 너무 상식적인 수준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다만 이 준비가 상식이 아닌 설교자에게는 저자나 평자 역시 유구무언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저자가 설명하고 있는 원고의 구성 방법은 존 스토트의 것이라는 점이다. 꼭 그것만이 대가이니 방법일 것이라는 위축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평자에게는 있다. 설교 원고 작성이나 구성 방법은 영국이라는 지역적 배경, 엘리트 계층이라는 신분별 영역, 복음주의적이라는 사상적 영역의 틀을 전제한 저자의 독특한 무대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평자가 이 책을 금년 필독 도서 중 제일 먼저 택하여 섭렵한 이유 중에 하나는 전술했듯이 설교에 대한 압박감과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이겨보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음을 밝혔지만 기실, 더 중요했던 이유는 이 책의 말미 부분의 교훈 때문이었다. 저자는 설교자가 설교를 행할 때의 필수적 자세에 대하여 일설하고 있는 대목이 어떤 의미로 평자를 흔들어 놓았다. 저자는 설교자의 최선을 다한 설교 준비와 더불어 전하는 자의 전향적인 자세를 독자들에게 강하게 역설한다. 그 중에 필수적 덕목이 정직성과 진정성 그리고 용기와 겸손이다. 이 책 전반에서 평자에게 지극한 감동을 주었던 저자의 촌철살인은 전술했던 것처럼 ‘설교에는 중립은 없다.’라는 토설과 또 하나는 이것이었다. “설교자는 설교만 말할 수 없다. 그는 또한 살아내야 한다.”(p,157) 저자가 말한 이 대목에서 동공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살아내려면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전제되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직성과 진정성이다. 저자는 이렇게 갈무리하고 있다.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말에 진심을 담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고, 진정성이라는 것은 여기에 더해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을 느끼는 것이다.” (p,163) 난 저자의 이 설명에 두 손을 묶인 것처럼 항복했다. 0.1%도 이의가 없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진정성은 정직한 예수의 혈흔을 설교에 담아 놓고 그 혈흔에 감동하지 못하는 자 때문에 울고, 그 혈흔에 감동하는 자 때문에 또 한 번 우는 감성이다. 이것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기에 말이다. 오늘 강단에서 하나님의 심정으로 우는 설교자가 그립고 또 그립다. 개그맨 보다 더 웃긴 목사들의 쇼맨십 말고,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하여 말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은 적이 없었던 디엘 무디의 그 진정성과 정직성이 그립고 또 그리운 시대이다. 저자는 글 마무리 즈음에 이렇게 한 문장을 남겨 놓았다. “설교는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불편한 자들은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p,183) 그러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게 겸손으로 띠 띠워야 한다. 그래서 설교는 부담이다. 고통이다. 실은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고 존 스토트의 책을 택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헌데 ‘역시나’가 되었다. 혹을 떼려다 혹은 붙인 셈이다. 설교에 왕도가 있겠는가! 그걸 찾으려고 했던 서평자가 도둑놈 심보를 가진 것이지. 그래도 책을 덮으며 저자가 담은 마지막 구절이 심쿵(?)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2017년 또 이 기막힌 설교자의 길을 가야할 것 같다. “설교자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설교 도중 회중 가운데 감도는 기이한 정적을 느끼는 것이다.”(p,191) 마치 일곱째 인을 뗄 때 하늘이 반시 동안 고요했다고 보고한 계시록 기자가 쓴 그 고요함이 감돌 때 말이다. 아마도 이 정적은 우리가 무엇을 할꼬? 라고 종교적 상투성에 빠져 허덕이던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질문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 때문이라. 난 내가 섬기는 교회 회중석과 한국교회의 모든 회중석에 이 충격이 있기를 2017년 기대해 본다.
첫 단추를 잘 끼운 것 같아 나름 행복하다. 2017년 내가 나를 응원해 본다.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