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아! 욥2024-06-11 09:3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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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꽃자리
ㆍ작성일 2017-01-24 15:55:03

 

김기석의 “아! 욥”(꽃자리 간, 2016년) 읽고


“진정한 상식이란 공적 영역에서 표현과 의견교환의 자유가 확고히 지켜지는 상황에서만 나올 수 있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소피아 로젠펠트, “상식의 역사”,p,404)

버지니아 대학 역사학 교수인 소피아 로젠펠트의 말이다. 나는 상식이라는 개념에 관한 그의 정의 중에 ‘공적 영역’이라는 말에 필을 꽂혔다. 이유는 상식이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예외적인 영역을 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공감하는 공공성을 전제한다고 지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작금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 건 슬로건 중에 아주 그럴듯한 것이 있었다.
“비정상의 정상화”
사실, 이 슬로건이 나왔을 때 서평자는 지극히 냉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적어도 이 슬로건이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영역에서 ‘정상적인 것들의 비정상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른다. 로젠펠트는 “상식을 진정한 상식인 긍정의 화두로 이용하지 않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할 때 역사적으로 모두가 ‘포플리즘’을 낳는 도구로 전락했다.”(위의 책, pp,364-365.)고. 이런 면에서 상식이 잃어버린 상식의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것은 지성의 세계에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청파 교회를 시무하는 저자의 책을 평하는 것으로는 이번이 열 세 번째이다. 이미 평자의 졸저인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도서출판 동연, 2016년)에 세 권의 책이 소개되었고 나머지는 두 번째의 책으로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 연말에 꽃자리에서 본 책이 출간되었음을 알고 구입해서 매번 그렇지만 저자의 글을 숙독하는 기쁨을 갖고 여행했다. 서평자가 저자의 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말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의 정상화’ 때문이다. 혹자는 저자를 좌편향 된 사상을 갖고 있는 불온한 목사라고 혹평한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의 이성적 스펙트럼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의 지적에 대하여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좋지 않은 시각으로 김기석 목사의 글을 보는 사람에 비해 서평자는 저자의 글을 긍정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상식의 일들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호도하여 단죄하는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저자는 오롯이 그 호도함에 위축되지 않고 가장 상식적인 것을 전하려는 노력이 그의 글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본 책에서 이런 갈파를 한다.
 “사유의 출발은 돌이켜 생각함 곧 성찰이다. 사유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에 의문부호를 붙이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유는 그러니까 상투성을 거스르는 정신적 능력입니다.”(p,228.)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전통적 욥기 읽기에 길들여져 있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욥이라는 인물을 떠올릴 때 상투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선 이해가 욥은 의로운 가운데도 고난을 받은 선한 자로, 그의 친구 세 명은 고발자로 고정화시켰다는 점이다. 허나 “아, 욥”에서 저자가 나름 이 고정의 상투적 이해와 싸우며 글을 기록했다는 것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책의 추천사를 쓴 민영진 박사도 상당히 고무적으로 평가한 네 가지의 저저의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주 신선한 도전을 준다.
⓵ 하나님의 편에서 욥기에 들어있는 사태를 바라보지 말라 ⓶ 욥의 말보다 친구들의 말이 더 은혜롭게 들리는 것을 신선함으로 바라보라. 왜? 친구들의 변론이 다 그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⓷ 욥이 당하는 고난을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라고 못 박지 말라. 그 이유는 그렇게 못 박으면 성경 텍스트가 주는 다양한 함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함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⓸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 역시 오늘의 현장에 욥은 지천에 있기 때문이다.(pp,20-21)
  서평자는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아! 욥”에서의 이 팩트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 이유는 저자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소위 말하는 ‘김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글 중에서 평자가 비평하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손석춘 선생과 함께 나눈 편지 대담 글인 ‘기자와 목사의 두 바보 이야기’(꽃자리 간, 2012년)같은 경우, 너무 주지주의(主知主義)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유 때문에 혹 지성의 자리가 복음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슬아슬함을 평자는 비판했다.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두란노 간, 2016년)에서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보다는 콘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너무 강해 혹자들로 하여금 인문사회학 강좌 교과서로 비쳐 질 것 대한 우려도 서평자는 표했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자는 저자의 글들을 놓치지 않고 독서하고 서평을 남긴다. 재론하지만 저자의 글은 너무 극단적 보수적 행태로 변질되어 천박해진 일부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균형적 지성과 영성과 감성에 대하여 한 가르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성경 텍스트에 대한 스펙트럼을 면밀히 검토하는 편이다. 아마도 그것이 목회자인 저자나 서평자에게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글 씀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또 하나 평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소개한 2차적 자료(The secondary sources)들이다. 물론 그가 제시한 이 자료들은 내공이 있는 독서력을 갖추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도서 목록들이다. 서평자는 독서를 하면서 두 명의 은사를 두고 있다. 한 분은 유명을 달리한 법정 스님이고, 또 한 사람이 저자이다. 법정이 읽고 간 그의 책들은 어느 날부터 저의 필독도서가 되어 저를 너무 행복하게 했다. 체신 머리 없게 개신교 목사가 불교의 중 따위가 읽은 책에 열광한다고 책잡아도 괜찮다. 법정은 나에게 독서 스승이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법정이 열독한 책들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읽기 전에 그를 폄훼하지 말라. 건방진 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기석 목사가 쓴 책들을 통해 소개한 글들 중에는 상당수는 서평자도 신학교 시절부터 꽤 관심이 있어 섭렵한 책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어떤 때는 쾌재를 부르지만,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이모저모의 책들을 보면서 서평자는 부끄럽기에 아직도 배가 고프다.
    저자의 이전 책들을 서평자가 평한 졸작을 보고 어떤 이는 이렇게까지 세밀한 평을 본 적이 없다고 긍정의 변을 해 준 독자들이 있는가 하면, 평자체가 너무 세부적이어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담아 부정적으로 변을 해준 독자들도 있었다. 주눅이 들어서였을까? “아! 욥”은 서평의 기록을 남기면서 chapter by chapter 하지 않았다. 다만 저자의 글 맥에 대한 소회만을 남겼다. 하지만 항상 저자의 글을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동의 소회는 그가 서평자와 같은 목회 현장에서 체휼된 죽은 글이 아닌 산 글을 기록했고 난 그 글을 읽었다는 감동이다. 그래서 또 그랬나 보다. 저자가 책 말미에 기록한 통상적으로 욥이 회복된 42장의 글 해석의 한 대목이  평자의 가슴에 불 질러 놓은 것을 보면. 
“삶의 무게를 담지 못한 신학적 담론은 허망하다. 인간의 피눈물을 거치지 않은 신학적 언어는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p,418.)     
또 한 번 양질의 책을 내놓은 저자와 좋은 책을 출간해 준 꽃자리의 한종호 대표에게 감사의 뜻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 전한다. 
    

2017년 1월 18일 오후 5시 2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