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2024-06-11 09:3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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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두란노
ㆍ작성일 2017-03-04 21:01:52

 

김기석의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 (두란노 간)를 읽고


    평자가 몸담고 있는 목회자 모임이 있다. 독립교회 연합회 목회자들의 기도 모임이다. 어떤 소그룹 모임이든 근래에는 손 편지를 쓰는 수고를 통한 편지로 모임 안내 공지를 하지 않고 이제는 너무나 편리한 SNS를 통해 단체로 일체의 알림을 고지하는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허나 이러한 문명의 이기는 표면적으로 편리한 수단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속되어 있는 객체들의 의지나 사상적인 성향이나 갖고 있는 고집을 그대로 강제하는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합회도 예외는 아니다. 아프게도 신학교 후배인 회원 중에 한 명이 태극기 집회파이다. 평자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지만 나는 그가 살고 있는 태도와 그가 가지고 있는 이념적 성향에 대하여 가타부타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은 정규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취득한 목회자로서 너무 대단한 한쪽의 치우침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때로는 그 용기가 참 부러울(?)때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기에 그의 개인적 소신과 행동에 대하여 나의 신학적, 목회적 기초에 따라 비평을 할 수는 있지만 비난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전술한 목회자들의 모임을 공지하는 공지 필드에서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소신을 드러내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정중히 제안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정중한 제안을 수차례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연속적인 글들과 행사의 내용들을 게재하면서 후안무치의 일방적 정치 공세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인이 수용할 수 없는 일방적 주장을 강제하는 것을 질 나쁜 폭력이다. 본인에게 그것이 소신이라고 할지라도 다양함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민주적 사회에서 자기의 이념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을 질 나쁜 폭력이다. 해서 아프지만 그 단체 SNS BANDING에서 아예 필자는 빠져 나왔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할 때 당시 신약성서신학의 주교수인 서중석 교수의 ‘복음서 해석’을 수강하면서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평자는 적지 않은 신선함의 성서해석을 이해하고 석의하는 방법론을 배움으로 인해 임했던 감동을 지금도 그대로 기억한다. 물론 서 교수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신약성서해석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신학을 주창한 진보적 신학자이기에 그를 비평하는 또 다른 필드의 지적 반론들이 존재하지만 평자가 졸업한 출신 신학교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신약성서 해석의 방법론은 나에게 너무 행복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간임에 틀림이 없었다. 공부를 하면서 당시 내가 얼마니 성서신학의 석의에 있어서 초보적이고, 편협했으며, 우물 안 개구리의 상태였는지를 실감하며 이후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의 무지함을 변호하고 방어하기 위해 폐쇄적인 틀을 고집하는 그런 싸구려 의식을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되 뇌인 적이 있었다.   
    지금 평자가 서평을 기록하는 저자의 글 여행을 통해 제일 먼저 얻은 내놓고 싶은 소회는 긍정 반, 부정 반의 소회이다. 조금만 더 부연해 보자. 먼저 긍정의 변으로 평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의 글머리에서 이 책이 탄생한 배경을 筆한다. 
“이 책은 마태복음을 묵상하려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집필되었다. 〈강단과 목회〉에 연재했던 원고를 한데 모으고, 마태복음 설교 가운데 몇 편을 골라 엮은 것이다.”(p,11)
다시 말해 감리교의 같은 동역자들을 위해 적어 놓았던 마태복음의 단편 묵상 모음집이라고 하면 좋을 듯싶다. 그렇다면 저자는 아마도 한 장을 집필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매 주이든, 격주이든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글을 쓴다는 것은 저자 스스로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본 책의 내용들을 만나면서 평자가 앞서 만난 여타 다른 책들에 비해 상당히 글말들이 여유가 있어 보인다는 편안함이 글에 녹아 있음을 보았다. 저자의 글을 섭렵하신 분들은 인지하겠지만 다른 저작들에서 치열함이 엿 보인다고 할까 하는 긴박성을 필자는 많이 느꼈다.
    허나 본 책에서는 긴박성이나 긴장감보다는 넉넉함으로 표출되는 저자의 영성 깊은 사색들이 더 많이 보였다. 물론 마태복음의 장별 순서를 갖고 있기에 강해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설교의 패턴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글말 자체의 높낮이를 느끼다보면 다시 강조하지만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평자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루카치라는 비평가는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는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p,29)”라고 저자의 첫 번째 설교에서 說하고 있는데 로맨틱하다는 느낌까지 드니 나에게는 적어도 그러했다. 연이어 펼쳐지는 저자의 일성이 비장하지만 나에게는 귀하고 넉넉하다. 그리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들은 가끔 자기 삶의 행로를 바뀌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복의 신기루를 좇던 삶,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이 프로그램화 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나아갈 때에 그 길은 ‘좁은 길’일 때가 많습니다.”(p,33)
두 번째의 설교에서는 이렇게 말한 대목이 등장한다.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기를 잘했다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p,65)
참 은은하다. 그의 교훈이 말이다. 헌데 2017년 3월은 참 잔인하다. 잔인의 정도가 좀 심했나? 스산하다. 대한민국의 광화문과 시청 앞에 설치된 경찰의 차벽을 보면서, 98년 전, 왜놈의 긴 칼의 폭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고 나왔던 태극기가 오늘 나의 살고 있는 현장에서 무서운 또 다른 폭력의 도구로 변장되는 것을 보면서 평화를 말할 수 없음에, 네가 태어나길 잘했어!, 내가 태어나길 참 잘했어! 너와 네가 친구가 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라고 말하는 것이 마치 꿈같은 일로 전락된 이 땅 대한민국이 참 아프다. 오늘 내 조국의 상황 이럴진대 기독교적인 이름으로 평화를 말해도 듣지 않는 세상을 만든 교회의 자화상이 너무 아프고 또 아프다. 저자는 이렇게 역설했다.
“신앙생활은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고투과정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앎은 특히 종교적 교만으로 변질되기 쉽다.” (p,101)
아마도 오늘 교회에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평화를 말해도 세상이 듣지 않는 이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들음과 행함, 아는 것과 살아내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인 듯해서 못내 쓰리고 쓰리다.
    이제 저자가 말하는 예수를 따라가 보자. 저자는 변화산상에서의 담론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꼭대기’라는 단어를 재조명한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꼭대기’라는 말은 ‘조금도 틀림없이’ 뜻하는 ‘꼭’에 ‘손을 대본다.’고 할 때 ‘대기’가 합쳐진 말로 재해석했는데 즉 꼭대기는 진리가 있는 곳입니다.”(p,207)
평자는 이 글을 만나면서 사뭇 이런 생각을 가져보았다. 조금도 틀림이 없는 존재가 획일화를 신경질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탈근대의 시대에 수용될 수 있는가? 과연 그 꼭대기를 인정하는 기상도가 오늘 존재할 수는 있는 것일까? ‘대기’는 취사선택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꼭대기’를 현대인들의 심리적 구조 속에서 이해를 하려고 할 것인가?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어진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책을 출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김영봉 목사가 쓴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에 보면 의미심장한 언급이 담겨 있다.
“죄라는 말이 요즈음 ‘기피단어’가 되고 있다.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가치 때문에 앞으로 어떤 행동을 죄라고 부르는 것을 금지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죄를 부정하고 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과거에 ‘죄’라고 부르던 것을 요즈음은 ‘선택’이라고 부르며 과거에 ‘죄’라고 부끄러워했던 것을 요즈음은 ‘기호’라고 자랑한다. 이렇게 하면서 죄를 쌓아간다.”(김영봉,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IVP, p,163)
이런 시대의 암울함 속에서 ‘꼭대기’는 역설로 존재하야 하지 않을까를 심각하게 고집해 보는 것은 나만의 객기일까? 저자는 교회를 지칭하면서 루터의 지론을 하나 소개한다.
“교회는 거룩한 창녀이다.”(p,208)
저자가 이 글을 소개한 이유는 교회의 속성이 거룩함을 지향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모임이라는 루터의 뜻을 부연하기 위해서였다. 제자들 역시 이런 거룩한 창녀의 속성을 민낯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곳곳에 지뢰처럼 매설되어 있음을 마태는 본인의 복음서에서 소개한다.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큰 자인가? 의 설전과 긴장이 이것을 알려준다. 해서 가장 좋은 자리, 높은 자리를 탐하려는 천박함이 예수를 따르던 현장에 있던 제자들에게 보이는 것은 조금은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너무 자연스러운 장면일 수도 있다는 것이 일반적 이해가 될 수 있다. 허나 저자는 바로 이런 자기합리화를 저지하기 위해 진보 신학자 마커스 보그의 말을 소개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이다.” (마커스 보그, “기독교의 심장”,한국기독교 연구소, p,55)
자기의 가능성보다는 하나님의 가능성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그 뜻을 수행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신뢰 말이다. 평자는 근래 주일 예배에 고린도전서를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연구를 하다가 주후 1세기 고린도지역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의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성경을 빙자한 자유함을 내세운 방종임을 알고 심히 놀랐다. 심지어 간음(포르네이아)조차도 고린도교회 공동체 중에 지식층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정욕적인 일탈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과부된 자들을 돌보는 선한 행위로 변질시킨 것을 보면서 아연실색했다. 저자의 말대로 교회가 배울 것이 없고 도리어 가르칠 것만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들이 얼마든지 고린도교회가 될 수 있음을 긴장하며 목도했다. 어디 이뿐이랴! 그렇게 생각하고 죄를 인식하지 않는 삶을 사는 내가 바로 ‘고린티아제스타이’ 한 복판에 서 있는 자가 아닐까 싶다.
저자의 일성을 하나만 더 나누어 보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와 ‘그러나’ 사이에는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거대한 단절이 존재한다.” (pp,293-294)
글을 읽다가 이런 감회에 젖어보았다. 저자의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전제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가 주시는 성경 텍스트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을 예수는 역설적으로 곧 응답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유로의 연결이다. 침묵을 못 견뎌 하는 시대, ‘그러나’의 사유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내 신앙의 추를 바로 세워주는 지렛대임을 인식하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부정의 반을 나누고 평을 마감하고자 한다. 평자는 저자의 책을 빼놓지 않고 읽는다. 더불어 반드시 서평을 남긴다. 이유는 그의 글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동시에 같은 설교자로 공감하는 글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현직 목회자들이 출간한 글들을 읽다보면 상당수 여타 다른 책에서 반복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식상한 소재의 예화들, 주변잡기식의 일률적인 이야기들, 심지어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보무도 당당하게 그대로 출처 무시한 복제판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것을 너무 많이 발견함으로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저자는 언제나 평자를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정의 평을 저자에게서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가장 유감스럽고 아쉬운 것은 본 책과 같은 설교 형태의 출판도서에서 나타나는 텍스트 연구의 집요함이 콘텍스트 연구의 적용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떤 독자의 경우, 특히 평자 같은 경우에는 텍스트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 동시에 그 텍스트에 대한 집요함과 물고 늘어짐을 통한 텍스트 해석의 일차적 씨름이 치열한 저서들을 보고 싶을 때가 너무 많다. 평자가 저자에게 거는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지 마태복음 여행은 이 점이 있어서 실망스럽다.      이런 유감스러움은 근자에 출간된 ‘아, 욥’ (꽃자리 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나 저자는 콘텍스트에 강하다. 이에 비해 텍스트 접근은 심히 아쉽다. 아마도 이런 평자의 심정은 저자를 세상에 알리는 데에 일조한 정용섭 박사의 저자 평(“속빈 설교, 꽉 찬 설교”, 대한기독교서회 간), 과 일맥상통한다. 그러기에 저자에게서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치열함이 함께 돋보이는 또 다른 수작이 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단순히 평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의 글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기대함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저자의 마태 여행은 어린아이 같은 평자의 어리광에도 불구하고 젖 먹는 수준의 평자에게는 너무나 영혼의 깊은 샘을 먹게 해 준 달고 단 청정수임에 틀림이 없다. 해서 저자의 수고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이제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숙제만이 남아 있다. 이 숙제 마치고 지난 겨울, 부르지 못한 이문세 노래나 한 번 불러 보련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 빈 하늘 밑 불빛들 켜져 가면/ 옛사랑 그 이름 아껴 불러보네/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나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 두듯이/ 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