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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로마서 13장 다시 읽기2024-06-1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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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권연경
ㆍ출판사 뉴스엔조이
ㆍ작성일 2017-03-09 15:57:05

 

 

권연경의 ‘로마서 13장 다시 읽기’를 읽고


      평자는 80년 초에 신학교를 다녔다. 근래 한 무리들이 시국의 상태에 ‘군대는 나서라’ ‘계엄령을 선포하라’ 등등의 거의 자폭탄(自爆彈)을 터트리는 수준의 막 말을 쏟아내지만 주지하다시피 바로 그 상황이 현실이었던 그때를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은 그때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캄캄했던 시기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신군부 정권의 정권 찬탈로 인해 그토록 기다리던 서울의 봄은 사라지고 다시 동토의 시기로 들어가던 아픔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할 당시, 신학생이었던 평자는 동료들이 선지동산에서마저도 돌을 던질 때 동참하지 못한 비겁자였지만 항상 마음으로는 용기 있는 자들에게 빚진 심정으로, 혹은 죄인 된 심정으로 그들을 응원하는 것으로 자위하곤 했던 슬픈 자화상이 있다. 그러던 중. 다니던 신학교의 배경인 교단의 중진 목사가 신군부 정권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가서 전비어천가를 노래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노래의 가사가 로마서 13:1-2절이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이 구절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하거나 아니면 헤게모니를 획득한 모든 자들의 무기로 사용되었기에 더 없이 적절한 말씀처럼 권력을 차지한 자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말씀으로 변질되어 있는 대명사이다. 다시 말해 가장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변질시키고 가장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둔갑시킨 자들의 황금율과 같은 금언 중의 금언으로 선택되어 왔던 불편한 진실이었다.
    1980년대에 그렇게 악용된 이 말씀은 2017년 탄핵의 시계가 분초를 다투는 지금도 현재진행이라는 데에 그 심각한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그냥 가장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불편한 진실처럼 여겨지는 로마서 13장을 그래서 다시 톺아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예민하고 또 불편하다. 그런데 용기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가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용기를 냈다.
    평자는 바른 교회 아카데미를 지원하는 사역을 태동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진행하고 있다. 오늘 평자가 시무하는 교회는 물론, 일체의 조국교회가 많이 담아내야 할 시금석과도 같은 바른 교회의 지침들이 연구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이 바른 교회 아카데미 연구위원이기도 하기에 항상 평자는 그의 논문과 발표 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어느 경우에는 깊은 공감을 표하는 적이 많았던 독자 중에 한 명이다. 이번에 뉴스엔조이를 통하여 세상에 나온 ‘로마서 13장 다시 읽기’는 그래서 주저 없이 독서하게 된 제일의 이유이다.
    저자가 로마서 13장에 대한 다시 읽기를 쓰게 된 동기는 분명해 보인다. 작금의 탄핵 정국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이념 논쟁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 지성의 할 말 하기가 그 근저에 농후하기 때문이다. 허나 더 큰 이유는 아마도 역사적으로 국정 농단이라는 전무했던 대통령을 위시한 현 정권실세들에 대하여 비판하기는커녕 지키기, 사수하기 등등의 일념을 갖고 나선 대표적인 공동체가 수구적인 교회와 목회자들이라는 어처구니없음을 개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곡해도 한 참 왜곡하고 있는 로마서 13장에 대한 그릇된 성경 적용을 신약학자의 입장에서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솔직한 것 같다.
    저자는 로마서 13:1-2절이라는 텍스트를 집요하게 성서신학자의 입장에서 분석한다. 평자가 저자의 분석 중에 동의하고 수용한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비록 주후 1세기 로마라는 특수한 지리적 영역을 전제할 때 지나친 비약이며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성경 해석이기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진단한 해석에 점수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로마서 13:1-2절을 이렇게 주석한다.
1) 각 사람은” (1:1f) 
“여기서 ‘각 사람은’은 영어 each and everyone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우르는 모두’를 의미한다.”(p,50) 고 적시했다. 다시 말해 로마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 전부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예외는 없다는 것이다. 부사를 동원하여 조금 더 접근한다면 ‘빠짐없이, 반드시 예외 없이’에 해당하는 일체의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2) 위에 있는 권세들(1:2f)
주목할 표현은 ‘엑수시아’ (단수: 권세)가 아니라 ‘엑수시아이’ (복수: 권세들)이라고 표현한 부분이다. 저자는 이 표현에 대하여 이렇게 진단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법적, 당위적 권리와 권한(right)을 가리킬 수 있고, 어떤 일을 실행할 수 있는 물리적 혹은 실질적 능력(ability)를 가리킬 수도 있다. (중략) 그러므로 이 권세는 정치적 맥락으로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다.”(p,51)
저자의 의견을 경청하다보면 당연히 성경적인 시대에 적용할 때 이 권세는 로마의 황제와 그의 통치를 돕고 있는 일체의 정치 권력자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21세기 오늘의 한국 상황에 비추어보면 유감스럽게도 박근혜 대통령을 위시한 이번에 국정을 농단한 일체의 무리들까지 다 포함하는 의미임을 거북해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봉착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위에 언급한 대로 ‘권세들’이라는 복수로 바울이 기록한 ‘엑수시아이’는 권력 서열 위에 있는 사람들, 곧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p,52)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텍스트가 말하는 것임도 저자는 분명히 한다. 바울은 이러한 권세들에게 반응해야 하는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는 점은 심히 곤혹스럽다.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로마서 13:13f-2)
  이상, 저자의 로마서 13:1절의 해석에 즈음하여 보면 권력을 잡은 정권의 명분이 정상적이지 않고 비정상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현 정권에 대해서는 거스르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자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경 말씀으로 고착화되는 것 같아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더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현대사만 보더라도 성공한 쿠데타 정권에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며, 히틀러에게 항거했던 본회퍼는 로마서 13장을 정면으로 거스른 불온한 목사로 정점을 찍은 것이 되고, 오늘 촛불을 든 가장 정상적인 서민들은 정치권력에 항거한 우리나라의 슬픈 언어인 ‘빨갱이’로 덧칠되는 것이며, 말 그대로 항상 불온한 그룹인 종북 좌파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반론을 제시하겠지만 만에 하나, 바울이 말한 로마서 13:1-2절까지의 발언이 저자가 설명한 성경 텍스트 주해에 국한한 해석 이외의 다른 해석이 없다면 평자는 바울의 권언이 신약성경 정경에 있는 텍스트이지만 단호하게 거부할 것이다. 이런 평자의 불편함을 저자는 이해했는지 신약학자로서 최선을 다해 바울의 선언을 재해석한다. 이제 우리는 그의 재해석에 귀를 기울여 보자.
저자는 13:1절의 문자적인 해석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접근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앞서 전술한 1절의 문자적인 해석을 신학적인 통찰로 재해석한다.
Ⓐ 13:1절의 오늘의 상황에 따른 적용하기
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의 가르침을 오늘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려고 할 때 국민이 주권자라는 신념은 매주 중요하다. 현대 정치 환경과 이념은 고대 사회에 다르다. 고대 사회를 염두에 두고 기록된 성경 본문을 억지로 끌고 와 오늘날의 통치 권력을 절대화하고 복종의 논리로 이념화하려는 것은 위험한 시대착오다. (중략) 고대의 왕들은 ‘왕건 신수설’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국민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사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하나님의 주권은 더 이상 왕 개인에게 위임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은 한 나라 국민 모두에게 동일하게 위임된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권리를 소수의 통치자에게 다시 위임한다.”(pp,56-57)
    저자의 이 신학적 해석을 접하면서 적어도 평자는 이런 면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없는 성경적 해석이 가능한가? 에 대한 제질문(題質問) 말이다. 평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 거의 대부분의 프레임을 이렇게 설정한다. 제일의 순위는 성경 텍스트에 대한 일차적 자료를 통한 본문 이해이다. 이어 이차적 자료(콘텍스트에 대한 자료)들을 통한 오늘 본문이 주는 신학적 이해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본문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갖고 어떻게 살아내기를 할까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적용하기이다. 본문 텍스트를 가지고 21세기의 콘텍스트를 대입하여 가장 근접한 살아내기가 평자의 설교 준비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톺아보려고 했던 로마서 13:1절과 2절에 담겨 있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의 긴장관계를 오늘의 관점으로 승화시켜 신학화한 작업에 대하여 평자는 높이 평가한다. 내 설교 준비와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 복종에 대한 탁월한 해석하기
저자는 ‘복종하라’라는 ‘휘포타소’를 하나님의 정하신 ‘order’ 즉 ‘질서’라는 개념으로 적용하여 해석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질서’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질서인 신적 질서를 전제한 일체의 것에 대한 복종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탁월하고 신선했다. 저자는 이렇게 평한다.
“권력과 국민의 관계는 통치의 필요에 의해 생겨나는 공적, 기능적 관계다. 이 관계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과장해서는 안 된다. 국민으로서 우리가 정부와 맺는 관계는 역할과 권한으로 규정되는 것이기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격적 관계와는 다르다. 그래서 정부 권력에 우리가 보여야 태도는 인격적 순종(obedience)이 아니라 기능적 복종(submission)이다.”(p,59)
    저자의 이 갈파에 평자 역시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왜? 적어도 이런 신학적 통찰을 견지할 때 작금에 벌어진 이 땅의 어처구니없는 정권의 일탈에 대하여 로마서 13:1-2절을 빌미로 비판하지 않고 기득권 유지의 차원에서 정치권력과 기생하려는 수구적 기독교 세력의 성서 빗댐이 얼마나 그들이 목숨 걸고 외치는 성경적(?)이라는 해석과 동떨어져 있는 이율배반임을 고발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저자가 밝힌 흥미로운 해석의 한 일례를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 말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로마서 13:1-2절의 해석으로는 과유불급이라고 저자도 정의하면서 그냥 아쉬움으로 달랜 사례 하나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위에 있는 권세’를 국민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접근 방법이 이렇다.
“바울의 권면에서 성도들이 복종해야 할 ‘위에 있는 권세’ 곧 통치 권력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나 정권 혹은 정부에 해당된다. 물론 우리나라의 수반은 대통령이다. 그래서 정치적 보수를 지향하는 설교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은 권력을 잡고 통치하는 현재의 정권 및 그 장권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구절을 인용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기계적 적용에는 정치지형의 변화를 무시한 시대착오적 오류가 숨어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1세기 로마제국과 같은 전제적 왕권 국가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 사람의 왕이 권력의 정점에 서 있고, 모든 권력이 그 왕으로부터 내려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치 이념은 민주주의요, 공화국이다. (중략) 이렇게 보면 사실상 ‘위에 있는 권세들’은 실제로 통치하는 권력이 아니라 그들에게 권력을 위임해 준 국민이다.”(pp,53-54)
생각해 볼수록 참 그럴듯한 신학적 접근이다. 또 이렇게 로마서 13:1-2절을 해석하면 불편한 해석들이 모두 사라지는 듯한 감동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넓은 의미에서 이 해석은 의미를 줄 수는 있지만 로마서 본문 자체를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근거는 이렇다.
ⓐ 만에 하나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국민이라면 반대로 복종의 주체인 ‘각 사람’은 국민들에게 복종해야 할 국가권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팔을 비틀어도 ‘각 사람’이라는 표현을 국가권력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 바울은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을 하나님께 둔다. 그런데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국민이라면 국민이 가진 이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셈이 된다. 우리의 정치철학으로는 자연스럽지만 황제의 통치 시기였던 1세기의 상황으로 바울의 주장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모한 시대착오일 것이다.(p,55)
저자의 통찰을 통해 배우는 또 하나의 도전과 교훈은 아무리 나에게 유리한 상황으로의 해석이라고 해도 그것이 텍스트의 내용을 인위적으로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 올바름이 아니라는 배움이었다. 저자의 균형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에리히 프롬은 조지 오웰의 ‘1984’의 평하는 글에서 아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평을 다음과 같이 논했다.
“‘1984’가 본질적으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인간이 미래에 어떤 형태로 변질될 것인가 하는 점과 역사적 모순성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이 과연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즉 자유, 존엄성, 성실성, 사랑 들을 갈망하는 마음을 상실할 만큼 인간성은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을 경종하는 것이었다.”(조지 오웰, “1984”, 강연호역, 삼연사, 1984, pp,283-284)
평자가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오후 3시이다. 앞으로 20시간 후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론이 발표된다. 기각이든, 각하든, 인용이든 말이다. 헌데 평자는 현직 대통령의 탄핵 사건이라는 한국 현대사를 또 한 번 수놓을 초미의 대형 관심사를 앞에 두고 더 두렵고 떨리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2017년 오늘, 내 나라 내 조국이라는 이 아름다운 강산이 자꾸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로 인해 빅브라더의 체계로 편입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두려움과 떨림이다.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고 했던가! 뭇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힘이 있는 논리가 법이 되는 비극이 일상화된 통제의 시대, 그래서 오늘 내가 사는 내 땅이 가장 상식적인 것조차 비상식으로 몰리는 형극이 되어 버린 빅브라더의 통치 시대를 방불 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기막힌 비극을 막아야 하는 일부 교회들이 도리어 ‘1984’의 절대적, 기계적 통치를 옹호하는 바람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참담하기 그지없다.       
    저자의 본 책 전체를 평자는 논하지 않았다. 13장 너머에 있는 저자의 혜안, 그가 전공한 요한계시록과 접목한 로마서 13장의 연계적 이해 등등을 공부하고픈 이들은 이 책을 손에 잡으시라. 다만 평자가 논하고 싶었던 것은 탄핵 정국의 결론을 앞둔 소개한 글로 저자가 말한 전술한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평자는 믿는다. 다만 차제에 평자가 간곡히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올바른 신학적 통찰과 성서신학적인 집요한 고민과 성찰을 배제한 로마서 13:1-2절의 해석을 시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적어도 그것이 정권의 시녀가 되는 해석이라면 더 더욱 그렇다. 얼마 전, 아내와 아들과 함께 본 ‘더 킹’이라는 영화에서 오늘날 우◯◯를 연상케 하는 정치 검찰의 수두 역할을 한 주인공의 대사가 귓가에 쟁쟁히 남아 있다.
“권력 옆에 있어. 유별 떨지 말고!”
패러디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평자는 이렇게 권력 근처에 있기를 원하는 종교인들에게 외치고 싶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실 된 말씀 옆에 있어, 유별 떨지 말고!”
 

사순절 9번째 날, 오후 3시 45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