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이기주의 ‘말의 품격’(황소 북스 간, 2017년)을 읽고2024-06-11 09:29
작성자 Level 10

11d911f93543554758a3918622178ab1.png

 


목사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목사로서 운명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목회 초년병 시절 때,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쉬웠는지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을 위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30년이라는 세월, 목사로 살면서 내심 정말로 두려운 것이 있다. 말하는 것이다. 왜? 말을 위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뒤늦은 후회이겠지만 이 말의 위력을 조금 일찍 깨달았다면 훨씬 다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으련만 무척이다 아쉽다. 그래서 그런지 근래 행하는 것이 있다. 말을 줄이는 것이다. 목사는 말을 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피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설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꾀를 내는 것이 있다. 설교를 합법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새벽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지 않은지 이제 7개월째이다. 새벽 설교를 하지 않는 대신, 성경 강독으로 대치했다.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말로 인한 실수를 대폭 줄였다는 점이다. 새벽 예배 설교도 주일 설교만큼 준비하는 목사가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새벽예배 설교는 인간의 말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실수를 줄인 것은 너무 탁월한 선택이었다.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 저녁예배를 부사역자들에게 위임했다. 윈-윈(win-win)이다. 부사역자들이 주어진 설교 사역을 너무 잘 해 주는 승리, 난 개인적으로 말의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승리가 동시에 주어졌다. 혹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담임목사가 그러면 설교를 너무 안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겠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주일 낮 예배 설교도 법적으로 괜찮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강사들을 초빙하여 설교를 듣고 싶은 마음이 있을 정도이다. 


목사로서 가지고 있는 자괴감은 영적인 영향력의 상실이다. 영적 영향력이 전이되는 영역이 단순히 어느 지점이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것임을 서평자도 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공통분모는 설교 사역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설교 사역이 해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힘에 겹다. 배운 지식의 태부족, 영성의 일천함 등등이 그 요인이리라. 그래서 설교가 두렵다. 이런 이유로 주일이 오는 것이 떨린다. 직업으로 목사의 직을 갖고 있기에 입에 풀칠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교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 목사로 사는 자로서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구처럼 남의 것을 가감하지 않고 베끼는 도둑놈 심보는 더 더욱 내 생리에 맞지 않아 표절은 더 큰 자존감의 적수이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합법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말도 줄이고, 설교도 줄이는 것.
    작가 이기주의 ‘말의 품격’ 을 읽었다. 읽은 뒤의 소회는 이렇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옳다는 확신 말이다. 이기주는 이렇게 이 책의 중요한 핵심 키워드를 제시했다.
“과언무환(寡言無患)”
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는 뜻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인 듯하다. 저자는 분명히 고언(苦言)한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대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p,78)
나는 저자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독일 출신의 의사로서 적지 않은 철학적 글들을 써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한 막스 피카르트도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 분명하다.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p,26)
저자도 생각이 똑같다.
“침묵이라는 ‘비언어의 대화(non verbal communication)’의 힘은 세다. 침묵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함축하고 있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더 무겁고 깊게 받아들여진다. 침묵은 말실수를 줄이는 지름길이다.”(p,84)
그러나 인간이 어찌 그렇다고 침묵만 하고 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차선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 차선을 ‘말의 품격’으로 차용한다. 다시 말해 말을 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격(格)을 품(品)이 있게 하라는 압박을 준다. 말을 할 때 품을 갖추라는 말을 평자는 압박이라고 했다. 그렇다. 분명 압박이다. 왜냐하면 품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품(品)이라는 단어는 주지하다시피 입 口자가 세 개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저자의 말대로 물건을 품평할 때 쓰이는 이 단어는 하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묶어진 어떤 형태를 보고 판단하는 단어이기에 모여진 상태의 격을 보고 무언가를 판단하게 된다. 그 판단의 정황에서 판단의 격을 높으려면 반드시 모여 있는 상태의 온전함이 필요하다. 그 상태의 온전함을 사람들은 품격이 높다고 부른다. 반대로 그 온전함의 상태에 질이 떨어질 때 그것을 천박함이라고 호칭한다.
    월요일마다 목욕탕에 간다. 아내와 취미가 같기 때문이다. 목욕탕에서 하는 일은 책을 읽는 것이다. 아내와 시간을 맞추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별스럽다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런데 목욕탕에서 책을 읽을 때 적지 않게 방해되는 일을 만나면 조금은 당혹스럽고 짜증이 난다. 언젠가 찾아간 목욕탕에 일련의 무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어느 단체에서 함께 온천욕을 찾아온 무리들인데 가만히 들어보니 평자에게 아주 익숙한 단어들이 오고 갔다. 교회 안에서 흔히 쓰는 단어들이니 어찌 내게 들리지 않겠는가? 교회 안에서만 말해지는 가장 익숙한 서열의 단어들이 난무했다. 문제는 그 자리에서 그들이 서로 주고받던 단어들은 공중의 예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들만의 언어와 말잔치들이었다. 듣고 있노라니 그들의 말의 品과 格은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수준 미만의 천박함이었다.
    저자는 책에서 말의 품격을 높이는 다양한 콘텐츠를 소개한다. 크게 4가지로 분류한 저자의 글 솜씨는 군더더기나 나무랄 데가 없는 선명한 이해를 돕는다.

1) 이청득심(以聽得心): 들어야 마음을 얻는다.
尊重, 警廳, 共感, 反應, 協商, 兼床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2) 과언무환(寡言無患): 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다.
沈默, 簡潔, 肯定, 鈍感, 視線, 뒷말이라는 해설로 이 콘텐츠를 지지한다.
3) 언위심성(言爲心聲): 말은 마음의 소리이다.
人香, 言行, 本質, 表現, 關係, 騷音이라는 제하로 언위심성을 설명한다.
4) 대언담담(大言淡淡): 큰 말은 힘이 있다.
轉換, 指摘, 質問, 앞날, 連結, 廣場으로 이 내용을 설명했다.
열거한 이유는 독자들이 이 내용을 반드시 섭렵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각 장(章)마다 참 따뜻하지만, 서슬함의 촉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서평에 의지하지 말고 꼭 서(書)를 독(讀)하기를 기대한다.
내용의 진솔함과 유려함에 비해 평이 졸속이면 안 될 것 같아 전체를 주마간산 식으로 개괄했다. 평을 이렇게 마감하면서 평자가 그 동안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저자의 식견에 동의한 것이 있어 소개하고 글을 마치려고 한다. 저자는 말이 적으면 근심이 적다는 것을 강조하는 콘텐츠에서 둔감(鈍感)을 말한다. 둔감의 의미를 이렇게 표했다.
“천천히 반응해야 속도를 따라잡는다.”(p,104)
저자는 이 지론을 피력하게 위해 소설 ‘실낙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와타나베 준이치의 말을 인용한다.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鈍感)에 힘을 뜻하는 ‘력’(力)자는 붙인 鈍感力이 삶의 운동력이 될 수 있다.”(p,107)
나름 생소하게 여겨진 이 글을 곱씹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목사로 살면서 나뿐만이 아니라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에게도 항상 강조한 것이 죄에 대한 민감(敏感)함이다. 너무 무감각한 죗성에 대한 타성이 근자 신앙인들을 잠식하고 있기에 말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저자의 이 지론은 평자가 말하는 지론과 대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말의 영역에 국한하여 둔감함을 말하고 있는 저자의 권언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타인의 말에 너무 좌지우지 하지 말라는 슬로우 스탠스를 교훈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맞다.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말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력이다”(p,108)
이제 현장에서 목회를 할 수 있는 연한이 8년이 남았다. 말로 인해 헤매지 않아야 하겠다고 연일 다짐하는 이유는 결국 목회의 현장은 말의 현장이기 때문인데 그 현장에서 물러 나아가야 할 연륜에 있는 자가 말로 인해 좌지우지하면 되겠나 싶다.
작가로 전향한 유시민이 정치판에서 자기의 본업인 글쟁이로 돌아와 처음으로 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열면서 제일 먼저 내뱉은 테제가 ‘마음 가는 대로 살자’였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p,18)
그가 주장한 것을 목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는 자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살자는 그의 주장을 패러디한다면 이렇게 살면 어떨까 싶다.
‘말하는 대로 살자’
그러려면 전제가 있다. 말의 품격이 있어야 하는 전제이다. 품격 있는 말, 그것은 삶이다. 그래서 목사는 참 어려운 직업이다. 어떤 후배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선배님, 새벽예배만 없어도 목사 할 만할 것 같아요.”
근데 난 그렇지가 않다.
“후배님, 설교만 안 해도 목사는 할 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