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승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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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동아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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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8-07-26 16:3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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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간, 2018년)을 읽고
필자는 어떤 의미로 보면 상당히 과격(다른 눈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스펙트럼이지만)해 보이는 여성 학자 정희진 작가의 글 읽기를 좋아한다. 에비의 이런 성향을 아는 아들은 에둘러 필자에게 ‘아버지, 혹시 페미니스트?’라고 비딱한 심정으로 가끔은 도전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필자를 페미니스트라는 선입관으로 보는 것은 과유불급의 오버 센스이다. 그런데도 정희진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의 도전적인 이런 색채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잉여는 구제 대상이 아니라 파국의 주체다.”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간, 2015년, P,296)
곱씹어 보았다. 우리나라의 정서가 잉여라는 부산물을 구제의 대상으로 보는가? 아니면 파국의 주체로 보는가? 쇠똥구리 만 한 양심이 있는 자라면 전자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잉여들은 누구인가? 김승섭은 이렇게 그 범주를 책에서 토해내었다. 사회적인 구조와 정치역학적인 차원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는 자, 차별을 당하는 자, 사회의 乙들, 가난하여 속수무책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자 등등으로 말이다. 저자가 표한 자들은 소위 말하는 ‘소수자’ (the minority) 들로 정의된다. 김승섭이 이렇게 이 시대의 잉여를 논한 것은 본인이 전공한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 역학(Epidemiology)이란 질병의 원인을 찾는 학문이다. 적인 구도로 이 단어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필자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저자의 일갈에 대하여 동의하고 지지하는 나를 발견했다.
KTX 승무원들이 해고된 지 12년 만에 다시 복직하게 되었다는 뉴스, 삼성 반도체에서 근무하던 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시작된 반올림 반올림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다. 2007년 11월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피해에 대하여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황유미가 사망한 이후 유사한 피해를 당한 반도체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반올림은 2018년 현재까지 삼성의 사과와 배상 그리고 재발 방지 대책 수립을 촉구하며 활동하고 있다.(위키 백과사전에서) 집회가 11년 만에 농성 텐트를 걷었다는 뉴스 등등, 이런 일들이 늦었지만 발표되도록 하는 데에는 사회역학자들의 공이 적지 않다. 물론 저자도 그 중에 한 명이다.
“사회역학은 그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이다.”(P,14)
저자의 서슬이 시퍼런 갈파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들을 예로 든 것일까? 아마도 힘의 논리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자들이 당한 아픔일 것이다. 국가에 의해 당하는 불평등한 대우,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차별, 건강하고 싶으나 건강할 수 없는 사각지대로 내 몰린 빈(貧)자들의 운명적인 삶의 자리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고 했다. 혹자들은 매우 낭만적으로 그래서 아픔이 필요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관악산 기슭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계층에서 살았던 것이 전부였던 혹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불어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 현장에서 부교역자들을 향한 일침으로 ‘열정 페이’를 논하고 있는 교회의 지도적 계층에서 요구하는 논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온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더 숨이 막히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년 여름은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로 살인 더위에 지쳐간다. 필자는 에어컨이 나오는 서재에서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시원한 냉방으로 피신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허름한 매장에서 에어컨이 없이 일해야 하는 큰 형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곧 냉방기를 끄거나 절제한다. 왜냐하면 나만 호사를 누리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살인 더위에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지근에 너무나 많다. 문제는 이런 고통이 불평등의 구조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그걸 막아야 하는데 천박한 자본주의 체계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적 무감각은 그 공동의 선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지역 사회에 있는 소녀들의 생리대 지원을 정기적으로 한다. 뉴스를 통해 그런 소녀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시행하게 된 동기는 그 소녀를 지역에서 소개받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발 깔창으로 생리 혈을 막아야 하는 이제 막 피어나는 소녀 말이다. 그 소녀를 보고 눈물이 범벅이 되어 이 사역은 중단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자본주의라는 체계 안에서 부익부빈익빈의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저자가 책의 서론 부분에서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 (P,22)고 말했듯이 적어도 할 수 있는 것, 같이 나눌 수 있는 것, 조금만 마음을 열면 얼마든지 부분적으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불평등을 평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지성적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 필자가 섬기고 사역하는 교회 공동체는 더 더군다나. 의학 분야에서 사회역학자들이 이런 모순적인 체계에 건강에 피해를 당하고 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에 응원의 목소리를 던져 본다. 재 강조하지만 이 일은 너나 할 것 없이, 진보, 보수와는 상관이 없이 교회가 더 큰 최선과 몫을 감당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일함에 대하여 많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역학자인 저자와 종교인(목사를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 시대가 아프지만)의 길을 가고 있는 필자와의 유리(流離)되어 있는 간극이 있어 보여서 매우 유감스러웠다. 저자는 낙태에 대한 금지법이 여성 인권에 대한 후진적 차별이기에 반드시 이 금지법은 폐지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더불어 동성애에 대한 차별 역시 다수에 의한 폭력으로 해석했다. 일견 이성적인 동의를 엮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자의 이 발언과 주장에 대해 아쉬운 것은 종교계가 왜 낙태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대하여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아쉽고 유감스러운 부분이었다. 조금 더 귀와 눈을 열어 종교계가 말하고 있는 낙태 금지라는 표현보다는 낙태 반대의 론(論)도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설상가상으로 저자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원인 중에 하나가 에이즈라는 질병을 확산하는 통로로 동성애를 보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무식의 소치라고 항변하고 있는 점에 관해서다. 이 주장을 위해 저자는 의학적인 증거와 자료에 대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저자의 단호한 역설 중에 하나는 비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동성애자들이라는 소수자들의 인권을 말살하고 있다는 논리의 전개였다. “한국사회는 HIV와 AIDS 에 대하여 모두에 대해 비과학적인 혐오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p,213)
만에 하나 한국사회가 저자의 말대로 과학적인 사실을 근거하지도 않으면서 동성애를 위에서 언급한 질병 유발의 원인으로 지적했다면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대하여 손들어 주고 싶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필자가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자처럼 사회역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과학적이지도 않은 것을 덧씌워 반대하는 자들이 동성애를 무조건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나 목회자가 주장하는 일갈에 대하여 필자는 상당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들을 이야기와 상식적인 선에 해당되는 신학적 담론들이 그들에게 많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인 추(錘)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나 목회자가 설파한 동성애에 대한 담론들이 필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극단적 보수 성향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내던지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차원에서 공격하는 동성애에 대한 담론도 필자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너무 자연과학적인 사이언스의 개념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짙은 진보적 해석 역시 필자는 수긍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사이언스의 영역에서 본 동성애 담론을 반대하는 자들을 무지한 자라는 편견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 종교적인 이해를 무시한 심지어는 깔보는 듯한 인상이 깊어 아팠고 유감천만이었다. 이왕 언급했으니 조금은 과격하게 말하자. 저자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지지 성향의 발언들은 또 다른 한편의 스펙트럼으로 비추면 동성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대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으로 필자에게는 비쳐졌기에 저자의 해석이 대단히 유감스러웠다. 저자가 동성애자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 대하여 그것이 사회역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도라고 믿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의 동성애 진단은 필자와 같이 성서가 말하는 밑힘에 기초를 두고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적인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게 여겨져 불편했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품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품으신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은 그들을 품을 수밖에 사랑이 본질이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혹자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믿기에, 그는 반드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에 그 분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방종하며 자행하는 것이야 말로 본말전도를 용인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싶다.
이제 다시 또 저자의 글말로 돌아간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하여 제기한 의학자로서의 일체의 변론들은 그것이 흘러가는 사회적인 구조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국가적인 당위성에 의해 양보하라는 합법적인 폭력에 무방비로 당하고 있는 약자들을 위한 대체들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비를 맞는 그들과 함께 맞아야 하는 것이 옳다는 저자의 식에도 필자는 동의한다. 책 전체의 이야기를 다 담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아픈 자와 함께 하고 싶다면, 무시무시한 권력에 의해 좌초당한 자들과 함께 울고 싶다면 저자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접하기를 천(薦)한다.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오늘의 시대에 참 어렵다. 그러나 복음의 도에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책을 읽을 때마다 스며드니 필자는 고조선 시대를 사는 목사인 것이 분명하다. 키리에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