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지난 1년 10개월 동안의 고린도전서 강해 여행에 동참한 말미의 소감은? | 경배와 찬양 (WORSHOP)● 시온성과 같은 교회 (찬송가 210장) ● 주 안에 우린 하나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이타적인 교회 ● 본문 : 고린도전서 16:1-4 1) 본문 1-2절에서 제시된 연보는 어떤 성격의 돈이었는가? ⓵ 본문 전 텍스트 설교를 참고하라 ⓶ 로마서 15:25-26절 참고, 사도행전 11:27-30절 참고 |
2) 바울이 본문에서 연보를 강력하게 강요한 것처럼 말한 이유를 설교를 참고해서 말해보자. 3) 적용하기 ① 나는 이타적인 그리스도인인가? 특별히 물질 사용과 관련하여 ② 우리 교회는 이타적인 교회인가? ③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의 곱씹기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 여름 사역을 위해 중보 2) 대학입학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해 중보 (장종호, 장종훈) 3) 군 복무 중에 있는 지체를 위해 (최준하, 이장규) 4) 환우들을 위해 5) 피선교지를 위해 6) 7월 표어를 위해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지역 셀 방학 동안에 교회 사역 민감하게 점검하기 2) 피선교지 섬김에 대하여 계획 세우기 3) 교회 학교 여름 사역 지원 계획하기 4) 지역 셀 단체 톡 방 방학동안 민감하게 활용하기 5) 방학 동안 설교 요약지 인턴이 확보하여 지체들에게 주일에 나누어 주기 6) 담임목사 설교 동영상 전도로 활용하기 | 설교요약 (SUMMARY)2018년 7월 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2번째 강해) 제목: 이타적인 교회 본문: 고린도전서 16:1-4
고린도전서 강해의 16장은 마지막 장이기에 이제는 숨고르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16장을 시작하는 첫 단락은 결코 얕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발톱을 내밀고 있었기에 호흡이 더 가빠지는 느낌입니다. 저만의 개인적 소회인지는 모르겠지만 헌금 설교는 강심장이 아닌 이상 모든 목사들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헌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슬픈(?) 본문이라 긴장했습니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강해 설교는 상당히 많은 장점이 있는 설교 방법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상이 있습니다. 본문을 건너 띨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기에 힘들겠지만 본문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권하지 않고 ‘명’(디에탓소)한 내용이 바로 1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강제적인 압력의 모드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4절을 보면 바울은 머지않아 고린도로 넘어 갈 것을 예측하게 합니다.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갈 것처럼 표명하면서 명한 내용이 바로 연보입니다. 1-2절을 다시 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1,2절에 연이어 사용한 단어가 헬라어 ‘로게이아’ 즉 ‘연보’라는 단어입니다. 연보라는 단어는 특이하게 오늘 읽은 이 본문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로게이아’의 가장 적합한 해석은 ‘돕기 위한 헌금 즉 구제금이었다.’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AD 1C 문서인 파피루스 문서에는 세금의 의미로 ‘로게이아’가 사용되었기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말한 것은 일종의 의무금인 세금의 성격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바레트, 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438)
그러나 이에 반해 복음주의 권에 신약학자들은 연보 즉 ‘로게이아’를 세금 성격의 상납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유불급의 해석이고 대체적으로는 돕는 헌금 즉 구제금으로 해석합니다. 저 역시 후자를 지지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1:28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는 AD 41-54년까지 13년 동안을 황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헌데 그가 재위한 시기인 46-48년 사이에 그의 통치 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심한 흉년이 들었음을 역사가 증언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상황은 극도로 피폐해졌는데 이런 고통은 글라우디오가 재위하던 말년의 시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저는 이 편지의 집필 시기를 주후 53-55년 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대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오늘 본문 사역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기근으로 인해 극도로 생활이 피폐해진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바울은 이방 교회들이 함께 힘을 모아 구제의 연보를 드릴 것을 강하게 역설 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저 또한 지지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제 연보의 요청은 바울이 역설했던 다른 여타 사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강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매 주 첫날은 말 할 것도 없이 주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주일마다 구제 연보를 따로 떼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매 주일마다 구제 연보를 따로 떼어 놓으라고 강제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고린도에 혹시 가게 될 때 즉흥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연보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얼마나 구제 연보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것은 이 구절은 경우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헌금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천만의 멘트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렇게 연보를 강조한 바울은 쐐기를 박는 것처럼 보이는 구제 헌금 모금의 압권을 본문 3-4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두 가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3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그렇게 준비된 구제 헌금을 모아두면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가져갈 형제에게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며 말한 대로 이 사람은 아마도 고린도전서의 공동집필자로 대두된 소스데네 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명령의 말미에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정서적 부담을 안깁니다. 바울은 혹시나 내가 그 형제와 함께 고린도에 갈 수도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종합해 보면 분명한 바울의 의도가 보입니다. 초대 이방교회 중에 대형 교회로 정의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보입니다. 조금은 천박한 표현 같지만 적절한 이해를 돕기 요즈음의 언어로 설명하겠습니다. “큰 교회니까 헌금을 많이 하라” 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바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군말하지 말고 구제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으로 본문 해석의 결론을 맺어야 하는 것일까? 의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들이 주지하는 것처럼 바울은 양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천명한 적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적어도 이 정도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바울이 이율배반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돈이나 많이 내라고 말한 것 정도로 본문을 이해해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제시한 성서적 교훈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이 이타성임을 강력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본문의 신학적 교훈과 맞물려 있는 아주 의미 있는 성경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로마서 15:25-26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바울은 서바나(스페인)로 가기 위해 로마를 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만 막힙니다. 바로 그 와중에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쁘게 연보한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로마에 사는 형제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씀입니다. 헌데 여기에 기록된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보’라는 단어입니다. 분명히 저는 앞에서 ‘연보’라는 단어가 ‘로게이아’라는 단어로 기록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로마서 15:26절에 사용된 연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단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또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11:27-30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저는 앞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때의 기근에 대하여 설명 드렸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예루살렘 모 교회의 지체들 중에 가난한 성도들이 매우 힘들어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힘을 모아 부조를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는 보고입니다. 주목할 단어를 소개합니다. ‘부조를 보내기로’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부조’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놀랍게도 역시 ‘디아코니아’입니다.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대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번역합니까? 잘 아는 것처럼 ‘봉사’입니다. 왜 안디옥의 이방 교회 성도들,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담은 구제 연보를 ‘디아코니아’라고 불렀을까?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봉사와 돈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봉사라는 단어의 대전제는 이타성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봉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내 중심이 아니라 타인의 중심에 서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설 때 그들이 보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삶의 정황이 귀하게 보이면 우리는 마치 그 일이 내 일인 양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겨지는 일에 내 물질이 투여되는 것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연보를 비롯하여 초대 이방교회의 지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함께 힘을 합쳐 모은 연보는 돈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즉 봉사요, 섬김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연보를 강요한 것처럼 보이는 강한 인상이 본문에 있습니까? 이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즉 섬김과 봉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강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들이 이타적인 예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예민하게 물아야 합니다. 만에 하나 우리들이 마음으로 모은 예물들이 디아코니아의 모습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모으고 있는 물질은 디아코니아 즉 연보가 아니라 맘몬 즉 돈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는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그래서 그의 걸작인 ‘돈, 섹스, 권력’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돈이란 우리가 그 분에게로 향하기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하는 우상숭배이다. 맘몬 신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돈은 많은 신적인(deity) 속성을 가지고 있다.”(p,36) 상담신학자인 폴 트립도 ‘돈과 섹스’에서 의미 있는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성경은 돈 문제와 관련해서는 편안한 중립성의 여지를 남겨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돈은 위험하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하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에 들리는 돈은 복이지만, 악하고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는 통로에 들리면 저주가 된다.”(p,205) 세인 지체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에 많은 돈을 헌금하면 복을 많이 받는다고 사기 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여러분이 이타적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드린 예물들을 디아코니아의 섬김의 모습으로 사용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여러 교우들의 범사를 영, 육의 균형으로 복 주신다고 가르치고 또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진짜로 체험하게 하는 바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차제에 다시 한 번 교우들과 이 구절을 되새김질하기를 소망합니다. 신명기 6:4-9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우리들이 매일 되새기고 다짐한 뒤에 또 곱씹어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신이 출발되어야 한 장소의 시작은 바깥문임을 명심하십시다. 바깥문은 이타적인 교회의 출발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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