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6.3 지역 셀 사역2024-04-23 16:4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경험했던 가장 감동적인 장례식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경배와 찬양 (WORSHOP)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찬송가 436장)
● 주님 고대가 (복음성가)
1) 부활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이 하나님 때문임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 다윗의 고백을 접목한다면 1번 질문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2) 부활을 믿는 믿음이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삶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1)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 –
2)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망 –  

3) 적용하기
1) 이 땅에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 같은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2)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없을 것 같은 그래서 제거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3) 행하고 제거하기를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 여름 행사 준비에 지지와 지원 중보
2) 환우들을 위하여
3) 6월 사역의 승리를 위해 (장애우 돕기)
4) 지역 셀의 승리를 위하여
5) 새 신자들의 아름다운 정착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지방 선거에 중립 지키기
2) 지역 셀 환우들을 돌보고 중보하기
3) 토요일 청소 사역 함께 협력하기
4) 공 예배 사수하기 – 셀 리더와 인턴들은 솔선수범
5) 지역 셀 피선교지 돌보기   
6) 기도하기에 최선을 다하기   

 
설교요약 (SUMMARY)
2018년 6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7번째 강해)
제목: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2)
본문: 고린도전서 15:25-28

    히브리서 11:1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이 구절을 의역했습니다. “삶의 근본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믿음이야 말로,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든든한 기초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 믿음이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고,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의 상태이지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그의 의역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초대 교부신학자인 어거스틴이 말한 신 존재 증명의 대전제는 “만약에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있는 신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접근한다면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리젠트 칼리지의 교수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p,64.) 종합하면 믿음의 출발점은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이렇게 녹록하지 않은 믿음의 또 다른 담론인 부활 믿음을 상고하기 위해 지난 주에 이어 본문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적어도 부활의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첫째, 산상수훈을 살아냄으로 내 삶을 메시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함을 살폈고, 둘째, 주님은 반드시 이기시는 분이시기에 나도 승리하게 만드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부활의 신앙임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25-26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마지막 날에 주님은 원수를 발아래에 두시며 굴복시키실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수는 누구입니까? 바울은 이 부분도 분명히 정의합니다. 그 원수는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로 이어지는 27-28절을 읽겠습니다.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제가 보고 있는 성경 중에서 상당한 의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해의 폭이 쉬운 구절로 27-28절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신 하나님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모든 것을 그에게 복종시키신 분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만이 만물을 다스리시게 됩니다.” 또 하나는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굴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키셨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킨 분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 굴복할 그때에, 아들이 친히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신 그분 아래에 굴복하시어,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신학적 의도는 ‘죽음’ 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에 포함되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이 죽음이라는 것 역시 통치의 일환으로 삼으셨던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3:19절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보신 것처럼 죽음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며 수단이며 그 죽음을 뛰어넘는 존재는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아들 예수에게도 이 죽음의 틀을 몸소 경험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을 아들 예수께서 이기셨다는 증거를 남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증거는 다름 아닌 예수를 부활하게 하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지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과 부활이 전적인 하나님의 통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믿음인가를 세 번째로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3) 부활을 믿는 믿음이란 살아 있음이 하나님 때문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 25-28절에 연속해서 나오는 같은 의미를 유추하게 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25절의 발아래 둘 때까지, 27절에 발아래에 두셨다,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그리고 28절에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 등등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연상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생사(生死)도 포함되는 인간의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지 않기에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이후, 너무나도 야속하게 사울의 시기를 당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은 항상 죽음이라는 것을 민감하게 생각하며 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살벌한 살해 명령이 떨어진 위기 속에서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 친구 요나단에게 이렇게 자신의 곤비함을 고백한 글이 사무엘상 20: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이때의 심정을 노래했던 다윗은 시편 39:5절에서도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죽음과 삶의 거리가 ONE STEP 이라는 말이 다윗이나 나나 여러분이나 삶과 죽음의 길이는 한발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감사의 조건임을 기억하고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내 생사의 통치가 주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기적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4) 부활의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읽습니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눈여겨볼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이해를 전제해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 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우리들이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해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아야 하는 두 개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①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1:20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임하였느니라’는 헬라어 단어 ‘에프다쎈’입니다. “아직은 임하지 않았는데 매우 가까이 와 있는 상태” 이 해석은 전통적인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대두되었습니다. “∽앞에 오다, 앞서 오다”로 해석하는 경우이고, 또 다른 경우는 “방금 도착했다, 곧 도래하다”등으로 단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인 매우 가까이 와 있다고 해석하는 전자의 경우로 ‘에프다쎈’을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지 않은 것이 되지만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영국이 낳은 걸출한 신약학의 거두인 C.H Dodd 교수는 이 단어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지시한 것으로 해석하여 실현된 종말론의 근거로 삼은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② ‘아직’ 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전통적으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성경적 근거는 너무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유명한 선교사이자 선교신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이 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망의 노래를 부르며 해석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았다면, 그의 은혜를 맛보았다면, 그 맛보기로 말미암아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함께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날, 하나님이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실 날을 뜨겁고 담대하게 소망하는 가운데, 기꺼이 그분과 함께 이 세상을 구속할 때 따르는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죄와 구원’,pp,177-178)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의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성경에 상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건강한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종합하여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나라이다.” (G.E LADD, “신약신학”,p,62)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의 현재적 나라이고, ‘아직’의 미래적인 나라라면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성도임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처럼 살아야 하며,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그 나라의 백성답게 걸맞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결단입니다. 바로 이것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믿는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것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일체의 것이 나에게 느껴지면 그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인 오늘 내 심령 안에 있는 나라에서 그것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행하며 사십시다. 하나님 나라에 이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것들은 제거하며 사십시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며 삶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글을 쓴 찬양을 오늘은 함께 불러보기를 바랍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현실을 도피하는 자들이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이 명령하신 산상수훈의 삶을 실천하며 부활의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산파적인 감정주의로 이 찬양을 부르지 않 바라며 부활의 소망을 갖고 이 찬양을 함께 부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