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무덤에 머물러 (찬송가 160장) ● 문들아 머리 들어라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1) ● 본문 : 고린도전서 15:20-28 1) 부활을 통하여 성도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고 본문 22절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은혜의 주인공인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부활 신앙의 첫 번째 테마는 무엇인가 설명해 봅시다. 1) 마태복음 5-7장을 예를 들어 말해봅시다. 2) ①번 질문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 |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두 번째 테마는 무엇이라고 담임목사는 말하였습니까? 본문 24-26절을 참고하여 말해 봅시다. 1) 두 번째 테마 곱씹기 3) 두 번째 테마 곱씹기를 통해 본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
3) 적용하기 1) 산상수훈 살아내기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전체를 아우르지 말고 부분이라도 실천하기를 다짐하자. 2) 신학자 불트만의 말처럼 나는 내 삶에서 케리그마를 통하여 부활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지역 셀 사역이 교회를 든든히 하는 기초가 되도록 2) 영상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TV 팟 케스트 선교 방 송을 위해 3) 전반기 피선교지 돌보기(전화하여 안부 전하기)와 중보하기 4) 교회학교 여름 행사 준비에 지지와 지원을 위하여 5) 환우들을 위하여 6) 소그룹의 저변 확대를 위하여 (하반기 1개 반 개강 예정) 7) 담임목사의 목양이 승리할 수 있도록
● 셀 사역하기 1) 지역 셀에서 도와야 할 지체들 돕기 2) 지역 셀 환우들을 돌보고 중보하기 3) 월삭예배 참석하도록 독려하기 4) 공 예배 사수하기 – 셀 리더와 인턴들은 솔선수범 5) 지역 셀 피선교지 돌보기 6) 담임목사 두 번째 책 읽고 나누기 | 설교요약 (SUMMARY)2018년 5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6번째 강해) 제목: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1) 본문: 고린도전서 15:20-28
임종을 앞 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목사가 드릴 수 있는 기도는 본문 23절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또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는 표현을 빗대어 그들은 내가 그날에 다시 이 땅에 임할 때에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을 예고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다시 일어나게 될 소위 말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될 자들인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이라는 이들의 속성은 과연 어떤 자들일까요? 그 답을 우리는 부활주일에 살펴보았던 고린도전서 15:17-19절에서 답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이 구절을 역으로 접근하면 이런 해석이 가능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예수의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자라는 해석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1) 삶을 메시지로 기록하는 믿음입니다. 본문 22절을 읽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강복하심의 결과물입니다. 삶을 얻는다는 표현은 교리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아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삶’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조오포이에쎈폰타이’는 영적인 삶을 말할 때는 쓰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고린도후서 5:17절을 인용해 보십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부활을 믿는 자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 부활을 믿는 자들입니다. 역으로 부활을 믿는 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팁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은 단순히 새로운 삶을 받게 되는 수동의 피조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역개정판에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라고 번역한 구절을 영어성경 NLT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Everyone who belongs to Christ will be given new life.” (예수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분명히 새로운 삶을 받는 자들은 본인이 노력하여 그 삶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시는 분에 의해 수동적으로 그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주신 주체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을 믿는 신앙인은 단순히 부활을 인지적으로 믿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한 가지의 목표가 생겼다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 이 삶은 바로 산상수훈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까지의 영역에서 주군이신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너무 과격한 목표 설정이라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주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자라면 마땅히 산상수훈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물론 저도 무리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더 리얼하게 고백하지요. 저도 버거운 이 107절을 어떻게 교우들에게 지키라고 감히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유연성을 가져 보십시다. 부활을 믿는 자들이라면 예수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본문을 추적하며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입장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행동 강령 세 번째로 정리하겠습니다.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연결시키도록 최선을 다하십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김기석 목사가 ‘삶이 메시지다.’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들이 진정으로 부활신앙을 믿는 자라면 산상수훈을 살아내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 정신의 알짬이다.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삶의 강령으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살아낼 엄두를 내지 않는다. 지금 산상수훈은 액자에 걸려 있을 뿐 우리들의 비근한 삶에 녹아 있지 못하고 있다 ”(p,9) 그렇습니다. 산상수훈이라는 말씀의 앎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부활신앙을 믿는 자들이 반드시 살아내야 하는 예수 정신의 알짬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기독교인들이 삶의 강령으로 살아내야 하는 실천적 목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산상수훈의 시작을 알리는 첫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본회퍼는 그의 걸작인 ‘나를 따르라’에서 소름끼치는 감동으로 해석했습니다. “언덕 위의 예수와 무리와 제자들이 있다. 제자들이 예수 옆으로 다가서는 장면을 무리가 본다. 제자들도 얼마 전까지는 완전한 무리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의 부름을 듣자,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이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살며, 예수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간다. (중략) 이제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이 무리에게서 나와 자신에게로 나아오는 것을 바라본다.”(pp,114-115) 이 구절이 저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무리에게서 나와’입니다. 성경은 ‘무리’를 ‘오클로스’라고 기록합니다. 이들은 ‘오합지졸’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오클로스’의 멤버들이었던 ‘제자’들이 예수께로 나아오자 마태는 그들의 이름을 ‘마쎄테스’라는 단어로 구별하여 기록합니다. ‘마쎄테스’ 즉 ‘제자’는 ‘오합지졸’이 아니라 ‘훈련을 받고 있는 구별된 자’들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메시지로 기록하려는 제자들은 부활의 신앙과는 상관없는 무리들과 같이 살지 않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백성들은 반드시 산상수훈의 앎을 삶으로 실천하기 위해 무리들에게서 빠져 나와 주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앎의 자리에서 삶의 자리로 걸어 나와 산상수훈을 살아내는 부활을 믿는 제자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산상수훈의 삶을 살려면 반드시 무리들의 삶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무리에게서 빠져 나와 제자의 자리에 설 때부터 저와 여러분의 삶은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2) 승리가 주님에게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24-26절) 본문 24-26절을 읽습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반드시 주님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시는 주군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 했던 운명을 주 예수께서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남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는 감동입니다. 후에 다시 살피겠지만 그래서 바울은 이 감격을 이렇게 본서인 고린도전서 15:53-58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로부터 세상의 모든 통치, 권세, 능력과도 같은 죽음의 일체를 멸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휘두르던 존재를 발아래에 굴복시켰다는 이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원수를 사망하게 하는 이김의 선포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신앙인들도 그렇게 승리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진실에서 0.1%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견주어 절대로 축소시키지 않는 또 하나의 부활 사건을 믿는 목사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주님은 부활하신다는 또 다른 부활사건입니다.신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신학자 중에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불트만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의 케리그마 신학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부활을 케리그마 신학으로 풀던 것에 상당한 관심이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케리그마 속에서 부활했다.” (원시 기독교 케리그마와 역사적 예수, P,42) 성도들이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운 말이지만 풀면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케리그마 속에서 부활했다는 말은 예수의 부활은 처음 신자들의 신앙 속에서 날마다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내 신앙의 현장과 삶의 언저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곱씹고 살아가면 그 현장에서 주님의 부활은 나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신학적 가르침 말입니다. 저는 목양의 현장에서 불트만의 이 부활 신학을 가슴에 담고 가르쳐왔고 저 또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있었던 북 콘서트 시간에 저자와 함께 하는 간담의 내용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자리에 참석한 감리교회 목회자 한 분이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보면 어떤 책에서는 지성도 강조하고 또 어떤 책에서는 고지식한 종교적 감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합니까?” 답을 제가 해야 하는 데 그때 우리 교회 신자 중에 유일하게 논찬자로 사역해 주었던 이영미 권사께서 제가 답변해야 할 내용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본인의 체험을 토대로 진정성 있게 답변해 주었습니다. 해석하여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한쪽의 책에서 말한 지성의 강조는 신앙의 경륜이 있어 이미 습득되어 있는 신앙 중에 무조건적인 신앙에 함몰되어 있는 교우들에게는 질문하고, 공부하고, 성찰하여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 또 한편에서 종교적 감성을 말한 것은 계속 질문하고, 성찰하고, 심지어는 불온하기까지 한 지성적 그리스도인의 반열에 있는 젊은 층의 신자들에게 머리로 아는 냉철함을 거기에서 만족하지 말고 가슴으로 끌어내리는 감성적 뜨거움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저자가 책에서 말하고 싶어 했던 목적이었습니다.” 듣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발언한 이영미 권사를 보면서 지난 9년 동안의 신앙의 여정 중에서 그래도 균형의 모습으로 영적 성장을 경험하고 있구나! 의 감회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이 자라나고 있다는 설명에 국한되지 않고 권사님의 삶이 예수의 케리그마 안에서 다시 부활하신 주님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는 은혜의 발견이기도 하였기에 무지하게 기뻤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의 케리그마 안에서 부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궁극적으로 우리도 승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신앙은 승리하신 주님이 또한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가 이 승리의 신앙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의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두 가지를 다시 점검하십시다. 나는 산상수훈의 앎을 삶으로 연결시키고 있는지를. 동시에 말씀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말씀하시는 그 케리그마의 능력으로 인해 여러분은 삶에서 승리하고 있는지를. Capernwray Bible School 학장인 챨스 프라이스 박사는 이렇게 일찍이 갈파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순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초호화판’ 선택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기본사항’이다.” (아, 살아계신 그리스도!, pp,185-186.) 이 글을 읽다가 생뚱맞게 고스란히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현장에서 부활신앙을 살아내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초호화판’ 선택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기본사항’이다.” (아, 살아계신 그리스도!, pp,185-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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