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5.20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 신앙의 여정 중에 나를 가장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과 약하게 하는 것을 나누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305장)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1%도 흔들리지 마십시다
● 본문 : 고린도전서 15:3-11
1) 바울은 자신의 나약함을 본문에서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1) 육적인 나약함 – 8절 본문 참고, 고린도후서 10:10절 참고
2) 영적인 나약함 – 9절 본문 참고, 로마서 7:22-24, 디모데전서 1:15 참고
  

2) 바울 스스로가 자신의 영,육의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0절을 참고하자.   
1) 전반절 
3) 후반절
  

3) 적용하기
1) 내가 하고 있나? 하나님이 하고 있나?
2) 나의 나 됨이 은혜인가? 내 노력인가? 
3) 가장 위대한 성도의 복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임을 진정으로 믿고 있나? 최근의 경험을 간증하라.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가정의 달 행사들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2) 대심방을 위하여 (직장 3셀)
3) 우리 교회 피선교지를 위하여 (선교주일)
4) 환우들을 위하여
5) 홀몸 노인 섬기기와 북 콘서트를 위하여
6) 담임목사의 5월 목양이 승리할 수 있도록

● 셀 사역하기
1) 지역 셀에서 도와야 할 지체들 돕기
2) 지역 셀 환우들을 돌보고 중보하기
3) 북 콘서트(22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섬기기
4) 공 예배 사수하기 – 셀 리더와 인턴들은 솔선수범
5) 지역 셀 피선교지 돌보기   
  

 
설교요약 (SUMMARY)
5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5번째 강해)
제목: 1%도 흔들리지 마십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15:3-11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다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주군이신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증인들이 있다는 보고를 합니다. 5-6절에서는 베드로, 12제자, 500여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이라고 7절에서 보고합니다. ‘모든 사도들’이라는 표현은 12사도 군이 아닌 제 2 弟子群에 속한 자들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5-7절을 열거한 이유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면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적어도 주후 1세기 초반과 중반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태동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 즉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산증인들이요, 기라성과 같은 주님의 제자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바울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장면을 돋우어 보십시다. 본문 8절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전술했던 주의 제자들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숨기고 싶은 과거지사들만이 바울의 이력이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절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바울의 대적자들 즉 소아시아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비롯한 바울을 싫어하던 자들이 전도여행을 통해 지쳐 있었고 어떤 학자에 의하면 말라리아에 걸려 거의 죽음 직전에 있었던 바울을 공격하면서 쓰던 상용구가 바로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같이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공격했다는 가정이 고린도후서 10:10절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공격에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뒤돌아보는 자기 관리의 거울 같은 말로 바꾸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은 정말로 본받을 만한 바울의 인격입니다. 이어지는 9절을 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는 주님을 핍박하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핍박하던 자 중에 무척이나 열심히 있었던 자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주님을 주군으로 인정한 이후에도 여전히 약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7:22-24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디모데전서 1: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본인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나약함의 대명사였는지 숨기지 않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오늘 본문 8-9절일 것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여기까지만 보면 절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나 나나 도찐개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어찌 내 신앙을 바울의 신앙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한 구절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위로를 줍니다. 그 위로의 메시지를 봅시다. 본문 10절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의 이 고백에서 0,1%의 이견이 없습니다. 100% 동의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회심했을 때는 학자들은 주후 33년경으로 예측합니다. 더불어 바울이 본서인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썼을 때는 그의 마지막 전도여행인 제 3차 전도여행 중이었던 주후 53-55년경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편지를 쓸 때가 그가 다메섹에서 회심한 시기로부터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사람으로 선 이후 20년 동안 1,2차 전도여행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 여행인 3차 전도여행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미 주님의 사람으로 사역하면서 고린도후서 11:23절 후반절-27절의 고난을 당했던 아픔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오늘 본문 10절 중반절에서 바울이 토로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는 이 대목의 진정성을 느끼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여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수고의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했던 바울이 토해낸 선언의 절정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이렇게 더 열심을 다해 사역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요, 언변이 탁월해서도 아니요, 생김새가 준수해서도 아니요, 지식이 엄청나서도 아니요, 단 한 가지 때문임을 그는 고백합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강력한 경험을 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서 이렇게 본문을 매듭짓습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이 은혜 때문에 나나 고린도교회에 올바른 동역자들이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올곧게 전하고 믿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하여 오늘 주일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원 포인트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 1%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심입니다.
    몇 주 전, 역대하 6장을 새벽예배 성서일과로 읽다가 가슴 찡함으로 다가온 구절이 있어 밑줄 그었던 적이 있습니다. 역대하 6:30절입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료하고 봉헌하면서 드린 봉헌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여러 가지의 제목들을 하나님께 간구하던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따뜻하게 다가온 구절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사람 마음을 사람이 안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로 말한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사람 마음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기도가 목회자인 저에게는 그 날 성서일과를 읽다가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주 만이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일까요? 내 마음을 유일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저는 이 음성을 믿고 단 1%의 흔들림도 없이 지난 9년을 달려왔고 또 달려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제천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절)
가슴에, 육비에 새기십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귀한 은혜는 없습니다.
단 1%의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