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4.29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나만의 님비(NOT IN MY YARD), 솔직히 고백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온성과 같은 교회 (찬송가 210장)
●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교회를 교회답게
● 본문 : 사도행전 4:32-35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다운 교회는 32절과 34-35절을 참고해 볼 때 어떤 교회인가?
1) 32절 참고
2) 34-35절 참고
3) 담임목사 설교의 첫 번째 테마를 생각하자.  

2) 본문 33절은 중요하다. 교회다운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1) 33절을 순서대로 말해보자. 
2) ‘갈릴리 예수’로 산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 란 무슨 의미인가?
3) ② 항목을 교회의 본질과 연결시켜보자. (설교의 두 번째 테마와 연관하여)  

3) 적용하기
1) 함께 걸어가는 교회, 안개꽃과 같은 교회에 대하여 나누어보자.
2)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한 우리 셀에서의 지원 내용들 함께 나누어 보기.
3) 이런 성도, 이런 교회되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대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2) 5월의 전 목회 과정이 은혜롭도록
3) 우리 교회 피선교지를 위하여
4) 환우들을 위하여
5) 수요일 욥기 강해 사역의 은혜가 편만해지도록
6) 담임목사의 목양이 승리할 수 있도록

● 셀 사역하기
1) 피선교지 돌보기 (전화하고 격려하기)
2) 5월 가정의 달에 사역하고 도울 결손 가정 파악하기
3) 어린이주일 행사와 어버이 주일 행사 중보하기
4) 태신자 섬기기 지속하기
5) 공 예배 사수하기 – 셀 리더와 인턴들은 솔선수범
6) 지역 셀 환우들 돌보고 격려하기   

 
설교요약 (SUMMARY)
2018년 4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교회 9주년 창립 주일)
제목: 교회를 교회되게
본문: 사도행전 4:32-35

    지난 30년 성상 동안 제 스스로 항상 가슴에 간직하며 달려왔던 목회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다운 교회 만들기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의 교회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전제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고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세속의 가치 속에 있던 사람들 중에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을 불러내 그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가도록 구별하여 모은 공동체라는 의미가 바로 교회입니다. 구별하여 불러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분명히 해야 할 바른 교회론에 입각한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사는 공동체가 교회다운 교회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주제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초대교회는 시작됩니다. 이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 사역은 예루살렘 성전 종교주의자들에게 불을 질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전 종교라는 헛것에서 벗어나 어느 곳이든지 상관이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모여 있는 그룹이 교회임을 선언한 혁명적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2-3장에 걸쳐 강력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전 종교에 식상해 있었던 예루살렘 민중들은 베드로를 비롯한 성령 받은 주의 제자들이 선포하고 있는 주 예수께서 나와 너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고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나고 이로 인하여 예수께서 공생애를 보내실 때 일어났던 밑으로부터의 영적 혁명이 다시 예루살렘 전역을 강타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기득권 성전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금 예수를 증언하고 있는 주의 제자들을 물리적으로, 종교적 공권력으로 그들의 복음 전파를 제어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산헤드린 종교의 지도 그룹이 예수의 제자들을 감금하고 린치하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기사를 누가가 세밀한 필체로 만나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런 협박과 회유에 놀아나거나 타협할 제자들이 이미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 공동체에서 성령 받은 자들로 견고하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헤드린 유대 종교 집행부는 제자들에게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강제적 조항을 일방적으로 적용한 뒤에 그들을 석방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죽음과 불이익을 무릅쓰고 예수를 증언하자 그들이 거하던 공동체에 수많은 기적과 능력들이 나타났음을 누가는 분명히 합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 구절인 사도행전 4:31절을 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에 ‘진동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샬류오’는 어원적으로 가까운 의미로 다시 번역한다면 ‘뒤집다, 전복시키다.’입니다. 당시 제자들이 석방되어 그리스도 예수를 고백하던 공동체의 영적 기상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입니다. 모여 기도하면 상황이 뒤집히는 강력한 공동체 말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항상 같이 오버랩이 되는 구절이 사도행전 17장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성경을 강론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자 그곳에 살던 이방인들은 물론, 귀족 출신들도 회심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런 회심이 일어나는 것을 시기하던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체포하기 위해 야소의 집에 들어갔다가 발견하지 못하고 대신 예수를 믿기로 한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끌어내어 데살로니가 광장에서 다음과 같이 성토합니다. 사도행전 17:6절 하반절입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영어성경 RSV의 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the world upside down” ‘세상을 뒤집는’ 데살로니가 지역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입에서 나온 이 선언을 ‘샬류오’와 같은 성격의 ‘진동시킨다.’는 의미로 저는 해석합니다. 이런 진동의 역사가 나타나고 복음을 능력으로 사람들의 전 인격적인 삶의 내용을 전복시키자 초대교회에 어떤 결과가 결과물들이 도출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하십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저는 오늘 본문에서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성서적 기초를 발견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바람직한 교회 상은 어떤 것일까요? 이제 그 답을 제시할 때가 왔습니다.

1)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면 교회의 님비를 척결해야 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이 구절에서 저와 여러분이 정말로 주목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더라’입니다. 누가가 조명해 준 ‘자기 것’이라는 단어는 엄밀히 말하면 사유재산권을 말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십계명의 내용 중에 사람에 대한 계명들은 5계명 시작이 됩니다. 출애굽기 20:12-17절을 함께 묵상해 보십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5계명부터 10계명의 기록입니다. 5가지의 계명을 예수 믿는 자가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각 계명의 마디에 담겨 있는 10계명 신학의 세부적인 이해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갑니다. 이 중에서 8계명에 집중해 주십시오, ‘도둑질하지 말라’ 이 계명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명료함을 저는 연대 신과대학장을 역임한 박준서 박사에게서 배웠습니다. 박준서 박사는 8계명을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이 일하는 것은 창조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에덴 낙원에서도 인간은 땅을 경작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고 불로소득 하는 절도는 단순히 경제 질서나 사회 질서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창조 질서의 위반이다.”(성서와 기독교, P,65) 저는 8계명의 신학적인 담론으로 박준서 박사의 주장을 수용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 안에는 수고한 자가 수고한 분량의 몫을 차지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타당성을 하나님도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사적 재산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서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제하면서 담임목사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개인의 사적이고도 소중한 재산 중에 일부이든 전부이든 하나님께 드려졌다면 그때부터는 그 재산권에 대한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일체의 재산권은 공공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자기의 것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가 주장하는 자기의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것이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을 우리는 교회의 ‘님비’ 라고 정의합니다. 님비(NIMBY가 무슨 뜻입니까? Not in my backyard.입니다. 내 땅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영역에 침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내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존재하는 영역은 오직 주님의 영역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대형교회의 목회자 세습이 교회답지 못한 행태입니까? 목사가 교회의 한 영역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의 직분자들을 돈으로 세우면 안 됩니까? 그렇게 세움 받은 사람들은 분명히 교회의 한 영역을 자기 것으로 분명히 우기는 자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나눔에 인색한 교회가 되면 안 됩니까? 나눔에 인색한 교회는 자기 것에 대하여 포기하지 않는 교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가 선교를 지속해야 합니까? 선교는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교회가 하나님의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의 사역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어서는 안 됩니까? 교회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우리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님비를 척결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내 것이라고, 손대지 말하고 악쓰는 자들이 단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누가는 이렇게 보고한 것입니다. 34-35절입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2) 교회가 교회답게 되려면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33절을 다시 읽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이 구절에서 저는 세 단어에 집중하고 합니다. ① 사도들이 받은 큰 권능 ② 주 예수의 부활하심 증언 ③ 무리가 큰 은혜를 받음. 초대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순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먼저 큰 권능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권능’은 성령이 임할 때 받는 ‘뒤나미스’의 권능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권능의 사람들은 증언의 메시지가 선명하다는 점입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증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케리그마였습니다. 그랬더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본문에는 무리라고 의역이 되어 있지만 원문에 의하면 이 번역이 더 적확합니다.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 다시 말해 예루살렘 신앙공동체 안에 있었던 긴가민가하던 무리와 같은 존재들 전부입니다. 본문 33절의 이 공식을 대입하겠습니다. 담임목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사역 즉 케리그마라는 본질에서 빗겨나가지 않아 항상 주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무장하고 공동체 안에 있는 무리들에게 쓸데없는 신변잡화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구주임을 날마다 강단에서 담대하고 선포함으로 단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리시는 강력한 은혜를 받도록 하는 교회가 될 때 그 교회는 교회답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첫 번째 단락과 맞물려 적용하면 이렇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지 않는 나눔은 교회 아닌 곳에서도 합니다. 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하지 않는 이타적인 사역은 일반기관이나 사화사업단체도 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제하지 않는 님비 탈출은 세속적 가치에 있는 사람들도 마음만 먹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식과는 달리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베풀어야 하고, 왜 나누어야 하고, 왜 구제해야하고, 왜 이타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의해야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예수와 상관없이 행하라는 것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원주 심방을 다녀오는 길에 차 안에서 고승우 전도사에게 지난 주간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기록한 글을 다시 곱씹으면서 다음과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 “고전도사님, ‘역사적 예수’ 를 알되 ‘역사적 예수’ 에서 결코 머물지 말고 갈릴리에서 공생애의 거의 전부를 보내셨던 ‘갈릴리 예수’로서의 삶을 살았던 ‘신앙적 예수 그리스도’에게 목회의 승부수를 던지세요.” 제 당부는 결코 가벼운 당부가 아니었습니다. 21세기 작금, 신학도, 교회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하셨던 사람으로서의 예수입니다. 많은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선하게 보이는 예수가 역사적 예수입니다. 역사적 예수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은 갈릴리에서 그의 전 인생을 봉사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갈릴리 예수에 대한 삶을 존중하며 관심을 갖습니다. 교회가 갈릴리 예수에게 집중해야 하는 이유 역시 교회는 예루살렘 중심적이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갈릴리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천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숨을 거는 것은 갈릴리 예수가 아닙니다. ‘갈릴리 예수’로 사신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갈릴리 예수’로 사신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은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강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갈릴리 예수를 소홀히 하여 지금의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맞습니다. 갈릴리 예수에게 집중했다면 작금의 교회 꼴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강력하게 선포하며 물러서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를 첨언하여 선언합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며 교회가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갈릴리 예수에서 머물지 않고 갈릴리에서 사셨던 신앙적 예수 그리스도를 잃지 않는 것임을.

    오늘은 교회창립 9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인 ‘처음처럼’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랑의 방법을 한 가지로 한정하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장미’가 아니라 ‘안개꽃’입니다.”(p,47) 9주년 창립주일을 맞이하여 오늘부터 우리 교회는 이제 10년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정말로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교회는 혼자만 열심히 달려가는 교회다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만 돋보이게 피는 장미가 아니라 함께 다 아름답게 보이는 안개꽃의 한 가닥이기를 기대합니다. 정말로 교회가 교회다웠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