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관계 맺기 한 번 더하기를 확인하고 지역 셀에서 열린 모임 리허설 하기 (자료 참고) | 경배와 찬양 (WORSHOP)● 내 주여 뜻대로 (찬송가 549장) ● 기대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질서가 상식입니다 ● 본문 : 고린도전서 14:26-33(전반절) 1)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교회 공동체에서 사용할 때 전제해야 할 유의 사항은? 1) 방언 : 27-28절 참고 2) 에언 : 29-32절 참고 3) 결론 – |
2) 담임목사의 설교의 핵심이 무엇이었는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자. 3) 적용하기 1) 내 은사를 교회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는 데 사용하고 있는가? 2) 내 사역은 교회공동체의 덕을 위하여 진행되고 있는가? 3) 은사와 사역이 교회 공동체의 유익이 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사순절 기간 동안 기도했던 10가지 기도제목 지속적으로 중보하기 2) 대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3) 4월 29일 창립 주일 행사를 위하여 (태신자 초청 전도주일 승리를 위해) 4) 열린 모임 리허설에 최선 다하기 5) 환우들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4월 목회를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4월 29일 태신자 초청 예배 사역 매뉴얼 나누고 철저하게 진행하기 2) 대 심방 사역 준비 3) 대청소 사역에 대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참석시키기. 더불어 청소할 내용들을 규합해서 사무실로 보고하기 4) 수요 예배 기대감을 갖고 참석하기 | 설교요약 (SUMMARY)4월 15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1번째 강해) 제목: 질서가 상식입니다 본문: 고린도전서 14:26-33(1f)
질서라는 것은 한 공동체의 정신을 담보하는 정서입니다. 창세기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의 상황을 창세기 기자가 ‘혼돈했고 공허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토후-바-보후’라고 합니다. ‘혼돈한 상태’를 가르치는 ‘토후’는 곧잘 성경에서 ‘무질서한 상태’를 의미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보후’는 정치적인 시각으로 말하면 ‘무정부적인 상태’ 즉 가장 극단의 어지러움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없는 상태를 지칭할 때 쓰이는 단어가 바로 ‘보후’입니다. 미국 노던 신학교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있는 스캇 맥나이트 교수가 이 상태를 아주 쉽게 표현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나 다른 이들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토후-바-보후’일 것이다. ‘다 집어치워!’ 이것이 곧 ‘토후-바-보후’의 본질이다.”(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p,167.) 맥나이트 교수의 이 갈파는 참 선명한 통찰처럼 보였습니다. ‘다 집어치워!’ 무질서의 극단입니다. 튼튼한 이론과 타당한 근거와 지성적인 이유와 논리적인 상황 등은 공동체가 무언가의 선을 지켜가는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고 다 집어치워! 라고 말한다면 이 상태야말로 ‘토후-바-보후’의 전형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1:2절의 후반절에 나오는 그 다음 기록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극단의 무질서 가운데에 한 기운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 기운은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된 ‘루하흐’는 제일 많이 사용된 뜻이 바람, 호흡이지만 복음주의 학자들은 1:2절에 기록된 ‘루하흐’를 ‘성령 하나님’의 이미지로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해석을 적용한다면 1:2절 후반절의 해석은 이렇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흑암과 공허와 혼돈 중에 있었던 창조 이전의 시기에 벌써 새로운 피조물들의 창조라는 역사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움직임은 무질서의 상태에서 질서의 상태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일체의 영역은 질서 공동체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통제하는 질서 공동체 중에 하나입니다. 만에 하나 교회 공동체에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교회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6절에서 교회에 존재하는 사역과 은사가 보입니다. 비가시적인 교회인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는 여러 가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찬송하는 자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들로 인하여 말씀과 교육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사역입니다. 반면 지금 14장에서 살펴보고 있는 방언, 에언, 통역의 은사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역과 은사를 다시 들추어내며 확인하고자 했던 의지가 26절 후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입니다. 이 말을 직선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은사와 사역은 폐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은사와 사역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의 진의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질문의 답을 본문 마지막 절에서 찾습니다. 33절 전반절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교회 덕을 세우는 것은 무질서를 넘어 질서가 있는 공동체로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 테제를 위해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동원합니다. 먼저 방언을 예로 들겠습니다. 본문 27-28절입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이 구절에 대한 부연 설명은 지난 설교를 통해 선포했던 내용들로 대신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집고 넘어간다면 한 방(ROOM)에서 방언을 하는 은사자들이 많을 때 반드시 이 기본적인 룰을 지키라고 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단적으로 하지 말라는 룰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두 명 이하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 부득이 한 경우에만 한 명을 더 추가하여 세 명까지를 맥시멈으로 삼는다는 룰이었습니다. 이 수의 원칙도 눈여겨보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세 사람들마저도 단체로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방언을 하고 마치면 그 다음 사람이 하고, 또 그 사람이 방언을 마치면 나머지 한 사람이 하고 하는 식입니다. 여기에 마지막 주의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방언이 끝나면 반드시 그 방언을 통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방언 사용법을 바울은 심할 정도로 엄격하게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예언을 예로 들겠습니다. 본문 29-32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예언의 은사 활용법이나 사용법도 방언의 은사에 대한 룰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수에 대한 지적이나 예언의 순서나 거의 방언과 흡사합니다. 하나 상이한 점은 방언은 통역자에 의해 통제를 받아야 한다면 예언은 또 다른 예언자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 다르면 다를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방언이나 예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에서 사용할 때 그 활용법과 사용법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우리들이 품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엄격한 잣대를 바울이 제정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리처드 헤이스 교수의 자문을 받아보십시다. “확실한 것은 고린도교회는 고정된 예배도 없었고, 예배자들을 위한 인쇄된 주보도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모임의 사회를 보는 리더도 없었다.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든 교인들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모임 전체의 유익을 위해 순서대로 각자의 은사들을 사용하면서 서로를 기다리고 배우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현대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395) 바로 이 대목에서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빙자한 은사 자랑과 뽐내기였습니다. 노래방에 가면 마이크를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변질되면 교회 공동체는 와해됩니다. 무질서의 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처럼 리더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염려했습니다. 해서 마지노적인 선을 만들어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통제되어야 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 즉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3절 전반절) 여기까지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주일 설교의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 은사도 상식의 선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말씀 중에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하는 구절들이 보입니다. 26절 하반절입니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8절 전반절입니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32절을 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세 구절에서 느끼는 뉘앙스는 질서 유지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개념이 나오면 우리 민족의 정서로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공권력과 물리력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입니다. 저는 이 점에 있어서 대단히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는 편인데 바로 이것입니다. 공동체에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힘은 물리력이나 공권력이나 힘이 아니라 상식의 선이 무너지지 않는 보편타당함입니다. 상식이라는 것은 공감한다는 선입니다. 공감의 선이 무너지지 않으면 질서는 자연적으로 유지됩니다. 왜 질서가 무너집니까? 상식적으로 공감하는 선이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사는 모두가 대등한 성령님의 선물이라는 인식이 상식의 선입니다. 만에 하나 이런 교회 공동체의 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받은 은사만이 은사이고 최고라고 고집하는 것은 상식의 선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 결과 교회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무질서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반드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식의 선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바울의 선언과 담임목사의 신학적 담론에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 인쇄판을 위해 담임목사의 사사기 연재 글을 크리스천 연합신문에 26번째로 송고했습니다. 헌데 특별히 지난 주 텍스트를 통해 독자들과 나눈 글은 저에게도 역시 대단한 감동을 주었기에 우리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19:3-6절을 주목하여 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셔서 직접 십계명을 제정하시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대언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온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 그러기에 내 말을 잘 듣겠느냐? 내 언약을 잘 지키겠느냐?”를 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430년 동안 계속해서 명령만을 받았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백성들은 명령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보다 명령을 듣는 것이 오히려 더 익숙한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명령하시면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십계명을 제정하시기에 앞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고지하셨습니다. “내 백성들이 내 말을 따라 주겠는가?” 이것을 물으라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근성으로 굳어져 있었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동의를 구하시는 하나님, 감동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물음을 직시하면서 단순히 감동으로만 끝낼 수 없는 또 다른 은혜와 도전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너희들은 나를 따르겠느냐? 를 모세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 대목을 또 이렇게 해석하며 감동의 감동을 받습니다. 이게 원래 상식이요 공동체의 질서라는 것이라는 감동입니다. 430년 간, 무조건 명령을 내렸던 애굽 공동체는 상식의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하나님의 고발이 담보되어 질문이었습니다. 오히려 강제와 압력과 폭력이 기반이 된 무력의 나라였고, 비상식의 나라였다는 역발상의 고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상식적인 나라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던 주체이신 하나님은 도리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상식의 선에 서서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는 그래서 질서의 나라요, 상식의 선이 운행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흑암과 깊음과 혼돈의 나라였던 애굽과는 달리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미리 맛보는 교회 공동체야 말로 상식의 선이 통하는 공동체이어야 하고, 질서가 운행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식의 선을 유지하면 질서를 반드시 유지됩니다. 상식의 선을 넘거나 지워버리려 하기에 무질서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하는 도전과 교훈을 받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성경에서 증언한 각종 은사들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정말로 소망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팁 하나를 제시합니다. 은사가 충만하기를 바라지만 상식의 선에서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덕을 세우는 도구로만 사용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서 질서 공동체를 원하시는 주군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상식이 기적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아름다운 상식의 선으로 도구화 된 은사들이 교우들 모두에게 공감되기를 바랍니다. 해서 서로의 은사를 격려하고 또 박수쳐 주는 세인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