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4.8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태신자들을 확인하고 관계 맺기 확인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멀리 멀리 갔더니 (찬송가 387장)
● 하늘의 문을 여소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뭣이 중헌디?
● 본문 : 고린도전서 14:20-25
1) 본문에서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변을 말해보자.
본문 22-23절 참고 
1) 긍정적인 측면
2) 부정적인 측면  

2) 바울이 24-25절에서 말한 예언의 긍정성과 담임목사가 말한 21세기 적용의 한계에 대하여 논해보자.
1) 예언의 긍정성 -
2) 담임목사가 해석한 현대적 적용의 한계   

3) 적용하기
1) 주일 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
2) 나는 1) 항목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 하고 있지 않다면 반드시 해야 하겠다고 결단할 내용들을 말해 보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사순절 기간 동인 기도했던 10가지 기도제목 지속적으로 중보하기
2) 대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3) 4월 29일 창립 주일 행사를 위하여 (태신자 초청 전도주일 승리를 위해)
4) 셀에서 진행되는 열린 모임에 주의 기름 부으심이 있도록
5) 환우들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4월 목회를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4월 29일 태신자 초청 예배 사역 매뉴얼 나누고 철저하게 진행하기 
2) 대 심방 사역 준비
3) 대청소 사역에 대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참석시키기
    더불어 청소할 내용들을 규합해서 사무실로 보고하기
4) 새벽예배 직분자들 핑계대지 말고 참여하기  

 
설교요약 (SUMMARY)
4월 8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0번째 강해)
제목: 뭣이 중헌디?
본문: 고린도전서 14:20-25

    전라도 사투리인 ‘뭣이 중헌디!’ 는 ‘무엇이 중요한데?’ 라는 표준어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여정 안에서 무엇이 중요할까요? 아이든 토저가 쓴 ‘말씀이 힘이다’ 에 나오는 한 대목을 교우들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설교단은 설교자의 탁월한 지적 능력을 과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선포하는 자리이다. 많은 이들이 걸려드는 덫은 ‘성경을’ 전하지 않고 ‘성경에 대하여 전하는 것’이다.” (P,90) 지난 수요일 저녁에 인용했던 뉴욕 타임 스퀘어 처치의 담임목사인 카터 콜론이 9,11테러 이후 신자들에게 선포한 메시지 중에 저의 눈에 강력하게 임했던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번영, 부, 성공에 집중하는 복음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중략) 그리스도가 아닌 인간이 영광을 받는 교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십자가가 없는 신학에서, 죄로부터 회개함이 없는 곳에서 벗어나십시오. 보혈이 선포되지 않는 곳에서 벗어나십시오. 모든 부정으로부터 벗어나십시오. 죄가 편하게 느껴지는 교회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전술한 아이든 토저는 앞에서 말한 성경과 성경에 관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갈파한 뒤에 결정적인 그로기 펀치를 날렸습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성경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 황금 송아지를 전하는 것입니다.”(같은 페이지)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읽었던 말씀이 벼락처럼 다가왔습니다. 사무엘하 16:23절입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압살롬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은 아버지에게 반역하여 나라를 빼앗은 패륜아 압살롬에게 아버지를 죽이기에 앞서서 아버지의 나라를 능욕하는 방법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을 동침하며 능욕하는 것이라고 자문한 것입니다. 그러자 압살롬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겨 후궁들을 옥상에 데리고 올라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동침하는 패역의 극치를 자행합니다. 저는 이 장면은 끔찍하기는 했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패륜자식이니까 충분히 그럴 만한 영적 상태라는 것은 생각하면 작위적으로 그냥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율하며 치를 떨었던 장면은 이것입니다. 가장 간사한 모략가인 아히도벨의 이 패륜적인 모사의 내용을 받아들인 자들을 소개한 성경 기사입니다. 다시 사무엘하 16:23절을 이 부연 설명을 전제로 읽어보십시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아히도벨의 이 패륜적인 자문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같이 여겨졌다는 점입니다. 더 기막힌 참담함은 압살롬은 그런 인간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다윗마저도 그렇게 여겼다는 점은 너무나 아프고 쓰립니다. 사탄의 전형적인 모략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았던 시대, 그게 패륜아이든 다윗이든 상관없이 공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시대가 왜 끔찍하게 다가왔을까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고 이 시대와 마치 판을 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짜가 득세하고 있는 이 세대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제한 내용을 또 다른 하나의 관점에서 아주 세밀하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하여 비교 분석한 나름의 신학적 결과물들을 방언의 은사가 최고의 은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불편하지만 지속적으로 쏟아내고 있음을 지난 강해들을 통해 살폈습니다. 바울은 먼저 방언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대단히 민감한 부분을 여지없이 터치하고 있습니다. 본문 22-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바울은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은사가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 즉 은사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말뜻은 긍정의 의미입니다. 방언이라는 은사를 행하는 것을 본 불신자들에 체감되는 긍정의 결과는 신비로운 현상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경외함을 얻게 할 수 있는 은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양면의 칼날처럼 반면 방언의 은사를 행하는 자들에 임하는 아주 부정적인 결과물도 있다는 말입니다. 만에 하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을 할 때 불신자 중에 상당수의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의 이상한 짓이라고 폄훼할 것이라는 진단입니다. 경우에 따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긍정과 부정의 부분이 있는 것이 방언이라면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자들이 택하여야 할 태도는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방언은 공동체 예배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독방에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동시에 만에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없이 방언을 행하려고 한다면 지난 강해에서 역설한 대로 통역의 은사를 같이 사모하여 그 은사를 얻은 뒤에 하든지, 아니면 본인에게 통역의 은사가 없다면 통역의 은사가 있는 자가 공동체 예배에 함께 있을 때에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아니면 골방에서 개인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은 공동체의 예배에서는 선을 도모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보다는 공동체의 예배 질서를 파괴하는 것에 사용되는 역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영적 지침을 잊지 말이야 할 것입니다.

    반면 바울은 방언의 예와는 정 반대로 예언에 대한 은사 사용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24-25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바울은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은 물론 믿는 자들까지 포함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하는 도구이기에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① 예언을 통하여 내가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② 공동체 있는 여타 사람들에게 내가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 받음으로 인해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 ③ 마음에 하나님을 향하지 못한 것까지 드러나게 해줌으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엎드리게 해주고 동시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바울의 결론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우리들에게 보고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예언의 은사를 많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후 53-55년 사이 고린도교회라는 지역적인 설정이 분명한 본문의 정황에서 이렇게 예언의 은사를 잘 활용하라고 한 권면을 저는 정서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21세기를 뛰어넘어야 하는 시간적인 갭이 있는 오늘, 바울의 이 예언의 은사 두둔하기는 정황상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불편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추천한 예언의 은사가 오늘 한국교회에서 매우 유감스럽게도 어처구니없이 변질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한국교회의 상당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은 성령을 돈 주고 사려고 했던 에베소 지역에 살고 있었던 마술사 시몬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발락의 뇌물에 눈이 멀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가 하나님의 된 서리를 맞은 발람 예언자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모스 예언자에게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고 네 고향 유다로 돌아가 거기서 입에 풀칠하며 살라고 비난하며 압박했던 전혀 하나님과는 상관없었던 거짓 예언자 아마샤의 말과 똑같은 거짓 예언들을 남발함으로 교회를 팔아먹는 무당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마치 참 예언을 증언하던 여호사밧 시대의 미가야의 뺨을 때리면서 아합의 비유 맞추기에 급급하던 거짓 예언자 시드기야와 같은 정말로 사라져야 할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이뿐 입니까? 앞서서 인용한 카터 콜론 목사의 예언자적인 설교에서 언급된 것처럼 번영, 부, 성공이 복음이라고 외치는 예언이 교회에 홍수처럼 밀려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는 거짓 예언들이 쓰나미처럼 교회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상담이라는 미명으로, 엔터테인먼트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교회 성장의 개발과 쌍을 이루어 인간성 개발이라는 복음으로 무장한 예언들이 고급스럽게 성도들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아를 다른 존재에게 맡기지 말라는 현대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그래서 인간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는 쓰레기 취급을 받게 하는 긍정의 힘으로 무장한 예언들이 우리들을 여지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진리, 십자가가 없는 신학에서, 죄로부터 회개함이 없는 편안함을 주는 거짓 예언들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이 아닌 금송아지를 추앙하는 예언들이 강단을 점령했습니다.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복음으로 둔갑된 경우도 허다합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이 시대의 예언 역시 본문에서 바울이 추천하고 있는 예언의 탁월성으로 적용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편함을 전제하면서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해 설명되고 있는 예언과 방언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교훈의 포괄적인 해석은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으로 다가옵니까?

※ 예배를 통한 은혜를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에 경계하라는 교훈입니다.
    본문 20-2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과 악에게는 아이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공동체 예배에서 자랑하고 고집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롭지 못한 아이들이나 하는 일이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오늘 우리들이 본문을 통해 나누어야 하는 은혜가 무엇이겠습니까?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배를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14장에 들어서면서 계속 강조했지만 바울은 방언 그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정말로 경계한 것은 방언 행함으로 인해 파생되는 예배 질서의 파괴였습니다. 바울은 예언을 강조했습니다. 예언 찬양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언을 통해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드려지던 예배에 주었던 유익이 방언에 비해 훨씬 더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본문의 관점은 예배의 승리였습니다. 저 또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바로 이 태도에 대하여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승리하는 예배, 감동적인 예배는 준비된 예배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언급한 준비된 예배라는 말은 인위적으로 가공된 예배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제가 강조한 준비 된 예배란 오직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일체의 집중력을 쏟는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방언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면 과감히 방언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언이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하는 라인에서 벗어나면 그것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다음 주 설교 텍스트인 14:33절 전반절을 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기에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방해하는 일체의 무질서한 요소들을 경계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한 바울의 선언에 밑줄 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예배를 드릴 때 주객이 전도된 예배를 드릴 때가 있음을 종종 봅니다. 자크 엘륄은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숨어 계신 하나님이시다. 숨어계시기에 말씀으로 현현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어떤 형상도 보존되거나 혹은 상상할 수 없다. 기독교는 숨어계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말씀의 종교이며, 예수 자신은 항상 살아 계심으로 그 분은 절대로 형상화나 의식화되면 안 되는 말씀의 총체이시다.” (P,111: 설교자 주 포함) 예배는 사람을 나타내는 장소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자리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 감동의 자리는 우리 예배자들에게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한 감동은 예배를 방해하는 일체의 것들을 제거할 때 주어지는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방언도, 예언도 예배를 통해 받는 은혜의 도구로 사용될 때만 그것이 성령의 은사이지 예배의 감동을 방해하는 도구가 될 때 그것은 사탄의 은사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공동체 안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배를 감동과 승리입니다. 예언도, 방언도 이 승리로 가는 데 돕는 철저한 도구이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승리입니다. 이렇게 한 주간 되새기십시다. 뭣이 중헌디? 뭣이긴 뭣이여, 예배의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