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무덤에 머물러 (찬송가 160장) ●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부활이 없다면 ● 본문 : 고린도전서 15:12-19 1)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강력하게 선포한 배경은? 2) 1)번 해석을 전제로 오늘 설교의 주제를 우리들의 언어로 나누어 보자. 3) 적용하기 1) 나는 부활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2) 부활절 이후, 부활의 삶을 살아내기를 결단하고 기도하기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사순절 기간 동인 기도했던 10가지 기도제목 지속적으로 중보하기 2) 대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3) 4월 29일 창립 주일 행사를 위하여 (태신자 초청 전도주일 승리를 위해) 4) 셀에서 진행되는 열린 모임에 주의 기름 부으심이 있도록 5) 환우들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4월 목회를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4월 29일 태신자 초청 예배 사역 짜고 숙지하기 (한 주 더) : 특별히 열린 모임 준비하기 2) 대 심방 사역 준비 | 설교요약 (SUMMARY)2018년 4월 1일 부활주일 설교 제목: 부활이 없다면 본문: 고린도전서 15:12-19
우리 인간의 육체는 아무리 치장을 하고 또 치장을 해도 반드시 썩어질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그래서 육체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표현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4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은 읽을 때마다 다시금 나를 경성하게 합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히브리어 ‘에난’은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이며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기막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음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성경적인 가르침은 단순히 죽음이라는 명제를 통해 인간이 겸손해야 하며, 살아 있는 동안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가르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르침은 기독교는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종교가 아니라 부활이라는 그 다음의 단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법정이 쓴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면 책의 말미에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이 사족이 있습니다. “덧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언젠가 자신의 일몰 앞에 설 때가 반드시 온다. 그 일몰 앞에서 내 삶의 대차대조표가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때는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그때는 이미 내 것이 없기 때문이다.”(p,215) 그의 말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맞는 것은 일몰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틀리는 것은 내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불교적 영성과 기독교적 영성의 차이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대차대조표의 성적은 그대로 남아 하나님 앞에서 계수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 이후, 부활의 시대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에 담론을 치열하게 논하던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있던 자들에게 날린 직격탄은 우리가 믿고 따라가는 믿음의 결국이 이 세상의 삶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영생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이 주님으로부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미션을 거부하여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선물로 받지 못했다는 새드 엔딩(sad ending) 기사를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 기사를 소개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교훈을 남겼습니다. 재물이 많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순간 멘붕에 빠진 제자들이 볼멘소리를 대표하여 베드로가 주님께 던졌던 질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28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천박한 질문이 아니라 대단히 현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랬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베드로의 이 질문을 세속적 가치에 근거한 얄팍한 질문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진성성이 있는 무게를 갖고 베드로에게 답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29-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만에 하나, 예수께서 나에게 다시 오실 신앙적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즉 역사적 예수만이 예수의 전부였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와의 연대나 그들과 함께 하는 낮은 모습으로의 삶은 예수 없이도 도덕적, 윤리적 학습으로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는 저에게는 적어도 성서가 증언한 예수는 다시 오실 나의 구주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30절의 증언 그대로입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독교의 절대적 사실을 목도합니다. 내세에 영생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런 약속을 성취하게 하는 시금석입니다. 결국 주님의 부활하심은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구원사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 전 단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말하면 만에 하나 주님의 부활하심이 없다면 기독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됩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바울은 본문에서 장황하리라 만큼 주님의 부활하심에 대하여 강력하게 선포하며 역설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부활 회의론자들에 대한 강력한 성토이기도 한 메시지입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 구절을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 중에 부활을 부인한 자들이 있었는가? CK. 바레트 교수는 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없고 그들의 영혼은 죽는 순간에 하늘로 들려졌다고 믿었다.”(P,397)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신자들 중에는 부활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가졌던 자들이 팽배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왜 이들은 부활사상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리처드 헤이스 교수가 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인 사람들은 아마도 문화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 철학을 상당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묵시론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바울을 세련되지 못한 문자주의적인 유대 설교가로 생각했던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을 가능성이 많다.”(리처드 헤이스 고린도전서 주석, 현대성서주석, p,422)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신자들 중에는 유대적인 사상 중에 하나인 부활사상이 아니라 헬라적인 철학 사상인 영혼 불멸 사상을 갖고 있었던 헬라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도리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아니라 죽는 순간, 영혼이 멸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헬라적인 신앙에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해서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부활도 인정하지 않는 고린도교회의 분파들이 존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에 대하여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 부활신앙에 대하여 바울은 교회가 가져야 할 복음의 정수이자 신앙의 핵심적 요체임을 강력하게 밀고 나간 것입니다. 본문 13-18절까지의 면면은 단호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바울의 심리를 엿보게 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이 강력한 천명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9절입니다.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이 없다면 가장 불쌍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 명제 앞에서 2018년 부활주일은 맞은 저와 여러분의 부활신앙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이 부활해야 합니다. 지난 주간 고난주간 성서일과를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3-14절입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주님이 비유로 하신 혼인잔치의 성격을 규정한 가르침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끝자리에 앉으라, 네가 친한 자들만 잔치에 초청하지 말라는 기득권자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고도 강력한 메시지를 주님이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하시는 주님은 비유의 가장 강력한 압권으로 소개한 13-14절을 선포하시기에 이릅니다. 저를 소스라칠 정도도 놀라게 한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라’ 만에 하나 너희들이 도무지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을 잔치에 청하여 그들을 돌보고 섬기면 그들은 너에게 갚을 길이 없지만 내가 대신 너희들에게 복을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더불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분을 믿는 자 역시 부활할 때 그 때에 복으로 갚겠다는 메시지가 누가복은 14장의 혼인 잔치의 비유 속에 담겨 있는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활의 날까지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을 선대하고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사랑하라는 이 메시지가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부활을 믿는 자가 선택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교훈이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교우들과 나누었던 이 말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성도가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그러자 목사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도님,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법한 것들을 찾아내어 실천하며 살아가십시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있으면 그것들은 삭제해 나아가며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부활을 운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산상수훈의 몇 가지만 들쳐 내 보십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9-10) 가난한 자의 삶을 어디에서 살아야 합니까? 마음을 청결하게 살아가야 할 장소가 어디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삶을 구가해야 할 장소가 어디입니까? 하늘입니까? 바로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저는 오늘 다음과 같이 정의하며 교훈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이 부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연구원에서 강의하는 김근주 교수가 쓴 ‘구약으로 읽는 부활신앙’을 보면 이런 갈파가 눈에 띱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험이 아니다. 미리 불입금을 잔뜩 부어두면 화려한 집에서 염려 없이 영원토록 살 수 있는 보험 상품이 아니다. 우리가 내세 얻도록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왕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내세를 얻고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내세를 얻고 누리는 방법이다.”(P,197) 김 교수의 갈파에서 주목할 단어가 보이십니까? ‘지금 이 땅에서’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는 없을 것 같은 것은 내 삶에서도 삭제하며 사는 것과 하나님 나라에 있을 법한 것들은 지금 이 땅에서 만들어 살아내는 것입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은 오늘 대한민국 제천이라는 이 땅에서 지금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그리스도인답게 삶을 살아내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렇게 실천해 가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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