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3.25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의 삶에서 혹시 리빌딩(다시 세우는 것)이나 리모델링(다시 바꾸는 것)하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구원으로 인도하는 (찬송가 521장)
●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세워주고 있습니까?
● 본문 : 고린도전서 14:6-12
1) 바울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공중 앞에서 하지 말기를 선호했던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 말해봅시다.
1) 음을 내는 악기의 예 (7절)
2) 나팔 소리의 예 (8절)
3) 공동체 안에서 소통의 예 (9절)  

2) 본문 12절에서 방언을 비롯한 일체의 은사를 사용하는 이유를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세우기 위하여’ : 오이코노모스(청지기)를 적용하여 말해봅시다. 
마태복음 16:16-18절을 참고하십시다.  

3) 적용하기
1) 교회의 바로 서지 못함에 대한 반성:
2) 더 경계해야 할 것:
3)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기 위한 우리 교회의 노력들 나누기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3월 25일(주일) - 28일(수)에 실시될 말씀사경회를 위하여
2) 4월 목회를 위하여
  ① 대심방 ② 4월 29일 창립 주일 행사를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하여
4) 교회학교 재 부흥을 위하여
4)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4월 29일 태신자 초청 예배 사역 짜기
2) 부활절 식탁 공동체 나누기
3) 대 심방 사역 준비
4) 말씀 사경회 인원 동원 및 차량 카풀 나누기
  

 
설교요약 (SUMMARY)
3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8번째 강해)
제목: 세워주고 있습니까?
본문: 고린도전서 14:6-12

    예수께서 십자가에 행하여 주셨던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픈 사랑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나를 다시 세워준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세워줌이라는 기적입니다. 일으켜 세워줌이라는 기적입니다. 다시 세워줌이라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들을 통해 최고의 은사가 사랑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여타 다른 은사들 역시 기본적인 베이스가 공통적인 분모가 있어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세워주는 것입니다. 이 세워짐은 성도나 교회나 하나님의 목적이시자 목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세우심은 기적들을 만드시기 위해 오늘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일하시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하여 바울은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방언은 개인이 하나님께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에 철저하게 개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자기만족의 종교적 수단으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임을 지적했습니다. 반면 예언은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더욱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음도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조금은 냉정하게 방언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이해에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왜 이렇게 소극적이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제일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예언의 은사만을 받아서 방언의 신비로운 영적 희열을 몰랐기에 방언에 대한 경계하며 소극적이었을까?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18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구절을 적용한다면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에 대하여 익숙한 기도를 한 자라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본인의 고백을 통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바울이 방언을 경계한 이유를 설명하는 세 가지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음을 내는 악기를 통한 본 이유입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이해를 돕기 위해 7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가령 풀루트나 하프 같은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조화를 이루며 연주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선율을 알아듣고 음악을 즐기겠습니까?”
악기는 제 각기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각 악기가 치고 들어오는 세션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케스트라의 장점은 부분별로 나오는 각기 악기의 고유한 음색을 가장 조화롭게 만들어 최고의 선율을 창조해 낼 때 청중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화를 무시하고 바이올린이 연주해야 할 때, 바이올린이 아니라 비올라가 치고 들어온다든지, 하프가 치고 들어오면 소리의 극대화된 미를 잃어버리고 도리어 그것이 무슨 악기의 소리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잡음과 소음처럼 변하여 역효과를 내는 것과 같음을 본문 7절이 알려줍니다. 만에 하나 방언을 교회 공동체에서 하는데 이 방언이 지난 주일에 선포한 메시지의 주제처럼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만족의 종교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자기만을 위한 언어의 발산이라면 오케스트라와 같은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기 때문임을 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② 나팔소리를 통해 본 이유입니다. 본문 8절을 읽습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같은 맥락입니다. 주후 53-55년 시대의 나팔은 군사용이었습니다. 적의 침입을 알리고 방어하기 위한 신호였습니다. 이렇게 나팔소리는 공동이 함께 아는 소리를 내야지 그 소리를 듣고 긴장을 할 텐데 나팔소리가 전쟁을 알리는 나팔 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환영하는 팡파르 소리가 된다면 군사들이 헷갈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소리 하나 때문에 군대가 일사분란 한 행동을 하지 못하면 그게 어디 군대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방언을 행함으로 같은 목표를 위하여 달려가는 선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방언이 최고의 방언이라고 서로 우기는 볼썽사나운 일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민낯에 대하여 바울은 방언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경고함과 동시에 고린도교회 공동체에게 경성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을 통해 본 이유입니다. 본문 9절을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듀크 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리처드 헤이스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는 천상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 자신들의 영적 권능과 성숙의 궁극적 사안이라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의 예배 모임은 여러 교인들이 성령의 영감 아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동시에 하면서 무질서의 혼란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방언의 과시 속에서 서로 잘하려고 경쟁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p,384) 리처드 헤이스의 주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말한 바울의 연이은 방언에 대한 통찰 때문입니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방언이라는 성령께서 주시는 유익한 은사가 뜻을 알지 못하는 소리로 전락되는 일에 대하여 바울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감정을 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론적으로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바울은 악기, 나팔, 그리고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 간의 대화라는 실례를 통하여 방언을 하는 자들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피력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 결론을 본문 12절에서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방언의 은사를 포함하여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는 단 한 가지의 경우를 바울은 공격적으로 마지막 절에서 공표합니다.

★ 교회를 세우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세우기 위하여’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인’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원형인 ‘오이코노모스’는 상당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오이코노모스’는 ‘청지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청지기’는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혹은 집을 관리하여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집과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청지기입니다. 은사는 교회의 청지기들인 우리들을 위해 주신 성령의 선물이기에 당연히 교회를 세워가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가는데 사용되는 도구, 바로 이것이 은사인 것입니다. 물론 방언, 예언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은사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건 그 때부터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주어진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는 교회의 사유화인 세습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해서 많이 염려스럽습니다. 동시에 신학적, 성서적 사유함이 없는 공부하지 않는 강단의 취약함도 교회를 나약하게 하고 쓰러지게 하는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 돌이켜야 하고 상식의 선으로 교회가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들보다 더 심각하게 경계하는 것은 이런 일들을 빌미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일체의 사탄적인 행태와 세속화된 공격들입니다. 목사와 성도의 몫이 교회의 교회되지 못함을 바르게 하고 돌이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임은 수없이 강조하고 곱씹어도 과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16-18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도구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한 공동체로 만드는데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역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뉴스프링 교회를 담임하였던 페리노블이 알콜 중독으로 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이유는 심각한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술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 대형교회목사였습니다. 또한 아주 설교를 잘 하는 목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일순간 급전직하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사탄에게 무너졌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 완치되었고 얼마 전부터 스티븐 퍼틱 목사가 시무하는 엘리베이션 교회에서 동사 목사로 다시 서서 설교를 하는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페리 노블을 복기한 이유는 그가 다시 목사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선 것이 마치 그가 이전에 했던 설교의 말과 오버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전에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온갖 추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며, 교회를 세상의 변화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그 분의 계획이다. 교회를 경멸하는 것은 그 분의 신부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과의 관계는 좋아질 수 없다.” (해방, p,197)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교회를 위해 우리들은 성령의 은사를 각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은사는 교회를 사랑하셨던 주님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다시 세우는 도구로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다.은사는 교회와 성도를 다시 세우는 도구임을.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 각양의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