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8주 동안 진행되었던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장’ 강해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메시지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하나님은 외아들을 (찬송가 294장) ●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1) 믿음과 소망이 주는 신학적 이해의 결론이 무엇이라고 설교자가 말했는가? ★ 믿음 : 사도신경의 일부와 고린도전서 15:3-4절을 근거하여 말해 보자. ★ 소망 : 사도신경의 일부와 베드로전서 1:3-4절을 근거하여 말해 보자. |
2) 사랑이 주는 신학적 이해의 결론은 무엇이었나? ★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와 주님의 대화, 그리고 ‘지금 바로 여기(now and here)’와 관련하여 말해보자. |
3) 적용하기 ★ 미투(me too) 운동에 대하여 설교가 말하고 있는 연관성을 나누어보자. ★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 아가페 사랑이든 여타 다른 사랑이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며 나누어 보자.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3월 25일(주일) - 28일(수)에 실시될 말씀사경회를 위하여 2) 주제가 있는 30일 새벽기도회를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하여 4) 3월 목회 계획들을 위하여 5)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체의 승리를 위하여 6) 한국교회가 본질을 성서의 밑힘이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도록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주제가 있는 30일 기도회 최선 다하기 2. 말씀사경회에 은혜 받기 위해 환경 미리 만들기 3. 매달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베스트 초청에 최선을 다하기 4. 사순절 기간 영적 피정도 함께 진행해 보기 1) 말 줄이기 2) 금식하기 3) 나누기 | 설교요약 (SUMMARY)3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6번째 강해) 제목: 왜 사랑이 제일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3:13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의 주제는 주님이 행하신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정말로 아름답고 위대한 선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양인들이 높은 가치로 인정하는 명심보감 같은 보석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암송해 보십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데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조금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던져야 하는 질문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의 순위 문제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근을 할 때 사실은 신앙인으로 제일 먼저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믿음’ 이라는 단어에 더 많은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믿음보다 더 중요한 PRIORITY가 있으면 그것은 문제라고 말할 정도로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 이런 관점으로 접근해 보면 ‘소망’도 결코 뒤쳐져서 안 되는 개념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만드는 귀한 요소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제치고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바울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며 사랑을 우선으로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들이 사랑 장을 마무리하면서 찾아내야 하는 교훈입니다.
1) ‘믿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고린도전서 15: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본인이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면서 굳게 지키며 전하고 있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언합니다. 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 ②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
바울의 선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의 케리그마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사사로운 죽음이 아니었다는 선포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사사로운 부활이 아니었다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성경대로’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인 케리그마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창세기 3:15절을 필두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부활의 상징적 메시지는 역사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출애굽의 역사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의 거대한 그림자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사의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실 대속적인 죽음의 모델이었습니다.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수난 받는 종의 메시지를 비롯한 수많은 상징의 신탁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주목해야 할 은혜는 우리들이 믿고 있는 믿음의 본질은 성경의 약속이라는 절대적인 실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믿고 따르고 고백하는 일체의 것들이 믿음의 내용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선명합니다. 바로 이 고찰을 통해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첫째 개념인 ‘믿음’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가능해집니다. ‘믿음’은 신앙인들이 동의한 과거 시제의 산물을 토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하며 생명을 걸었던 성경에 기록된 과거적인 실체들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문 중에 2/3의 해당되는 고백의 내용이 과거적인 사건들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것, 성령으로 잉태된 것,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 하늘에 오르신 것,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적 사건들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과거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구속사적인 케리그마를 믿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소망’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여기에 번역된 소망의 원어가 ‘엘피스’인데 이 단어는 좋은 기대를 걸 때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본문으로 살폈던 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지금은 우리들의 지식, 지혜를 가지고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의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하면 구리거울을 보는 것 같은 희미함이 있어 유감스러운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은 그렇지만 이 답답함, 이 이해하지 못함, 이 애석함, 이 갑갑함은 한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믿음으로의 접근이 엘피스 즉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AD 64 년경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네로의 박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사자들의 밥이 되는 참담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 하루를 자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공포의 시절에 베드로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 안에 있던 형제와 자매들을 향하여 이렇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가 지금과 같은 공포 속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이 좌절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결코 썩지 않을 것이며, 쇠하지 않을 것이고 분명히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인 산 소망이라고 베드로가 강조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를 영어성경 NLT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Now we live with great expectation.” 해석하면, “위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게 하셨다.” 위대한 기대감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실체를 앞에서 설명한 사도신경의 메시지로 말하면 바로 이것일 것이 분명합니다. 주께서 심판의 주로 오실 것, 그 나라에서 서로 교통하게 될 것, 우리가 지은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실 것, 우리들의 몸이 부활체로 완전하게 다시 살게 될 것, 그리고 주님과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두 번째로 말한 소망의 신학적 이해 소망은 미래적 사건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완전히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의 완성이라는 그림자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미래에 완벽히 이루실 구원에 대한 소망임을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다. 3) ‘사랑’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자기를 부인한 베드로를 만나신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차례에 걸쳐서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래되어서 그 출처를 알지 못해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제가 읽은 글에서 이렇게 해석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야, 너는 어제 나를 사랑했니? 를 물으신 것이고, 두 번째 물음은 베드로야, 너는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있니? 를 물으신 것이며, 세 번째 물음은 베드로야, 너를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겠니? 를 물으신 것이다.” 이 글을 동의하면서 저는 설교자로로 개인적인 적용을 조금은 색다르게 해 보았습니다. “어제 주님을 사랑한 것이 믿음의 기초가 된 것이고, 내일도 주님을 사랑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소망의 기초이며,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의 사랑의 기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현재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실체라는 교훈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뛰어 넘고, 미래를 뛰어넘어 ‘지금 바로 여기’ (now and here)에서 주님의 일하심과 주님과의 관계 맺기를 현재적으로 믿고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현재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즉 사랑을 바울은 가장 감격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그는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 제목의 답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제치고 사랑이 제일 중요한 이유는 사랑이 바로 내가 지금 바로 여기라는 현재의 삶의 정황에서 주님과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기본적 태도입니다. 소망은 성도들이 오늘을 이기는 또 하나의 무기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소망을 유지하게 만드는 지금의 영적 무기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숨 쉬고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은 내 맥박을 고동치게 하는 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투 운동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성을 폭력으로 짓누르는 악마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가해자의 가족들이 당해야 하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런 비극의 쳇바퀴가 돌고 도는 이유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닮아가는 이타적 사랑의 상실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란 현재적으로 내가 주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증언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니 정답 중의 정답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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