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3.4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너무 사소한 것에 신경을 써서 낭패를 경험한 일이 있습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찬송가 304장)
●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부분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맙시다
● 본문 : 고린도전서 13:8-12
1) 바울이 말한 부분적인 것이라고 에두른 16가지의 은사에 대하여 열거해 보자.
① 고린도전서 12:8-10 (9가지)
② 고린도전서 12:28 (7가지)
  

2) 왜 이 16가지는 부분적인 은사이고 사랑은 영원한 은사라고 바울은 적시했는가?
① 어린아이의 실례를 통하여 설명해 보자. (본문 11절)  

3) 적용해 보기
① 부분적인 은사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구리거울의 예로 설명해 보자. (12절)
② 오늘 설교의 주제적인 교훈을 은사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여러 가지 측면으로 확대하여 나누어보자.
③ 결론적으로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이 있다면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신앙의 유익을 위해 겸손하게 사용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3월 25일(주일) - 28일(수)에 실시될 말씀사경회를 위하여
2) 주제가 있는 30일 새벽기도회를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하여
4) 3월 목회 계획들을 위하여
5)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체의 승리를 위하여
6) 무너진 한국교회가 본질을 성서의 밑힘이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도록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주제가 있는 30일 기도회 최선 다하기 
2. 말씀사경회에 은혜 받기 위해 환경 미리 만들기
3. 매달 마지막 주에 실시하는 베스트 초청에 최선을 다하기
4. 사순절 기간 영적 피정도 함께 진행해 보기
  1) 말 줄이기
  2) 금식하기
  3) 나누기  

 
설교요약 (SUMMARY)
3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5번째 강해)
제목: 부분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맙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13:8-12

    만에 하나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전체적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것은 순간적인 것이고, 유한한 것이며, 개론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울이 본문에서 제시한 사랑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는 논거는 대단히 큰 울림이 됩니다. 바울은 12장을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에서 앞에서 열거한 16가지의 은사들도 중요하지만 더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사랑의 은사를 다른 여타 은사들에 비해 더 강조한 이유는 본문 8-10절이 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 구절은 사랑이라는 은사 이외의 다른 여타 은사들은 부분적인 은사라는 영적 통찰력을 제공해 줍니다. 반면 사랑이라는 은사는 부분적인 은사가 아니라 영원한 은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폐하여질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방언도 그칠 때가 온다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지식의 은사도 반드시 폐하여질 때가 올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지의 여백 문제로 이 정도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바울은 분명히 사랑을 제외한 본인이 열거한 일체의 은사들도 동일하게 때가 되면 사라지는 은사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 구절에서 바울이 갈파한 내용들을 살피다가 깊이 와 닿은 대목이 ‘부분적’이라는 단어입니다. 부분은 전체에 비해 불완전 도식입니다. 부분은 완성체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분이 완성체인 전체에게 대항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부분적’이라는 단어를 바울은 이어지는 11-12절에서 정말로 탁월한 예로 설명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동시에 깨닫는 것도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바울이 은사 장에서 제시한 16가지의 은사들은 각기 그 때 그때마다 필요한 이해의 폭으로 교회의 질서와 신앙의 유익을 주고자 한 마치 어린아이의 시기에 어린아이들이 이해하는 정도의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이해와 도구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은사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것임을 바울은 11절 하반절에서 역설한 것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본문 실례를 통하여 사랑이라는 은사와 다른 여타 은사의 차이점을 구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에 나오는 거울은 헬라어 ‘에습트론’의 번역입니다. ‘에습트론’은 고린도 지역에서 생산되던 유명한 구리거울입니다. 구리거울은 잘 닦아주어야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나 ‘에습트론’ 은 아무리 잘 닦아도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유리 거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염두 해 두었던 바울이었기에 그는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이것은 사랑의 은사가 아닌 여타 은사들로 설명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대한 지식 등등은 희미할 수밖에 없다는 강조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 예언의 은사를 하는 자들, 지식의 은사를 받고 능력을 행하는 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이지 완전할 수 없다는 강조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알게 되는 것, 하나님을 온전하게 아는 것은 12절에서 말한 그대로 그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은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고 하는 것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혹하지 말아야 함을 바울은 힘 있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 기록된 말씀은 참 은혜가 됩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결국, 그때가 되어야 주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이 역설은 그래서 은사를 갖고 장난질치지 말라는 경종으로도 들립니다. 그때는 주님을 만나는 그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담아야 하겠습니다.

※ 내가 알고 있는 부분적인 앎을 고집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특별히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적용하고 말할 때는 더 더욱 철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유일하게 간직하게 될 은사는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가지고 전부를 다 아는 것처럼 고집하고 주장하려는 자세는 대단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진정성이 있는 기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적인 앎을 전부의 앎이라고 착각하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가 내가 하는 예언만이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내가 무식한 자라는 것을 천명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은사는 최고임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없다고 치부한다면 그는 정말로 교회 공동체에서 사라져 주어야 할 암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교회의 유익을 주며, 성도 공동체를 든든하게 만들기 위해 선물로 주신 한시적이고도 부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의 한 방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헌데 이런 일들이 어디 은사에만 국한되겠습니까? 교회 공동체에서나 가지고 있는 일체의 획일적이고도 설익은 지식들도 매일반입니다.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아주 민감하게 경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성공주의’입니다. 우리는 십여 년 전에 한국교회에 불어 닥친 야베스 신드롬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역대상 4:10절을 읽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의 주류적인 해석은 나의 지역을 넓히시는 복은 곧 물질적인 축복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가 드려지기 직전의 성경 텍스트인 역대상 4: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에 기록된 히브리어 ‘야베쯔’는 ‘슬픔’ 혹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9절의 기록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고통 가운데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슬픔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어머니가 이렇게 나를 힘들게 낳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야베스는 본인의 출생 비밀에 담겨 있는 고통을 거울삼아 본인의 삶을 역전시키며 살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10절의 기도문 때문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임해도, 나에게 이런 슬픔이 임해도 이런 고통과 슬픔에 좌절하지 않고 그 슬픔과 고통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는 은혜의 복을, 믿음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야베스의 기도는 물질적인 복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야베스의 기도는 내 삶을 주님께 의탁하겠다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내가 이런 고통 속에 태어난 자이지만 하나님께 내 인생과 삶을 맡기겠사오니 내 신앙의 지경과 지평과 성숙의 정도가 넓어지는 은혜를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야베스의 기도가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쏟아부어주신다는 것으로 둔갑하여 성공주의의 잣대가 되는 기도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면 성경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은혜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결코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구절이 아니라고 가르치면 심정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는 적반하장을 경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적인 성공에 대한 지식이 전부인 것인 양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바른 교회 아카데미세미나에 주 강사로 오셨던 분 중에 한 명이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우종학 교수입니다. 우 교수는 크리스천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과학적 진화를 인정하는 유신론적인 과학자입니다. 우 교수의 강의를 제가 아주 은혜롭게(?) 들은 이유는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7일간의 창조 기사는 과학적 증명을 위해 기록한 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창조의 기사를 과학적인 증명의 데이터로 사용한다면 엄청난 오류들과 허점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모순에 대하여 우 교수의 자문에 의한 자담이 저는 참 은혜롭게 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태도라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는 과학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창조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기사는 창조의 주권적인 역사는 철저한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하는 초자연적인 영역임을 선포하는 글이라는 것이 우 교수의 지론이었습니다. 제가 우 교수의 이론에 나름 동의한 대목은 이것이었습니다.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의 영역은 상당수가 해석적 담론의 영역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을 오늘의 설교에 대입하여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이나 성경적 지식은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얄팍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날마다 배우기에 힘써야 한다는 교훈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욥기 38:4-5절에서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노출되어 주저하고 있는 그리고 한편으로는 암묵적으로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는 욥에게 하셨던 일침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욥에게 하셨던 일침은 이론적 설명의 담론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담론입니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아, 욥’에서 이렇게 설파하였는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작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p,376.)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은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은사를 제외한 일체의 은사들은 폐기되고 사라지고 떨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부분적인 것의 대명사들인 은사에 목숨을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도리어 사랑만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 교회 지체들에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본문 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