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2.25 지역 셀 사역2024-04-23 16:3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6주 동안 살핀 사랑하기의 정의를 뒤돌아보며 받은바 은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하나님은 외아들을 (찬송가 294장)
● 다시 일어섭니다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사랑은? (5)
● 본문 : 고린도전서 13:4-7
1) 7절 중반절에서 사랑은 ‘믿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가 주님을 믿기로 한 실례 중에 오순절 성령 감화를 경험한 이후, 실제로 베드로의 신앙 여정 중에 주군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한 사건을 설교를 참고하여 말해보고 믿음과 사랑의 상관관계를 나누어 봅시다.  

2) 7절 후반절에 사랑하기란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된 나병환자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주님이 나병환자에게 희망을 주셨던 멘트를 설교를 참고하여 설명해 봅시다.  

3) 적용해 보기 (성찰해 보기)
① 나는 누군가에게 당한 억울함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② 나는 누군가를 이해타산을 계산하지 않고 믿어주고 있는가?
③ 나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긍정의 사람인가?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를 담당할 교육전도사 청빙을 위해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해
3) 2월 목회 계획들을 위하여
4) 성도들의 가정과 사업체의 승리를 위하여
5) 무너진 한국교회가 본질을 성서의 밑힘이 회복되어 다시 살아나도록 
6) 담임목사의 2018년 목양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공 예배 준수에 최선 다하도록 독려하고 실천하기
2. 주제가 있는 30일 기도회 최선 다하기 
3. 월삭예배 섬기기에 최선을 다하기
4. 지역 셀이 감당해야 하는 일체의 봉사를 자원함과 기쁨으로 감당하기.  

 
설교요약 (SUMMARY)
2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4번째 강해)
제목: 사랑은? (6)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설 명절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는 데 출애굽기 12:36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은혜를 입히게 하사’라는 이 말씀을 접했을 때 강하게 휘몰아친 소회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변질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들에게 이런 보너스를 주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본질의 본질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것은 마땅히 그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내용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이 사랑의 정의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7절을 읽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본문에 4가지 동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참는다. ② 믿는다. ③ 바란다. ④ 견딘다. 먼저 첫 번째 동사와 네 번째 동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참으며’ 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스테게이’는 문자적으로 ‘지붕을 덮는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9장에서 노아가 포도주를 먹은 뒤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을 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며느리들이 볼까 염려하여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고 창세기 9:23절은 보고합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에 기록된 하체를 덮었다는 바로 그 의미가 오늘 바울이 본문 7절에서 언급한 참는다는 단어 ‘스테게이’ 의 의미입니다. 상대의 분명한 잘못과 허물이 보이지만 그것을 까발리지 않고 덮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 가지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아주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이어서 4번째 단어를 해석하겠습니다. ‘견디느니라’ 이 단어는 ‘휘포’+‘메네이’의 결합입니다. ‘휘포’ 는 ‘under’ 즉 ‘밑으로’라는 전치사이고, ‘메네이’는 ‘stay’ 즉 ‘머문다.’ 는 단어입니다. 합쳐서 해석하면 ‘밑에 머문다.’는 의미가 됩니다. 밑에 머무는(서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understand’ 즉 ‘이해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피를 토하고 싶은 일을 당해도 그것을 참아내려면 반드시 그 피해를 입힌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야 가능합니다. 모세는 기가 막힌 억울한 일을 40년 동안 수도 없이 당했습니다. 반란, 누명, 비아냥, 살해위협 등등 그가 광야 40년 동안 당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습니다. 더 힘든 것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중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성정을 가진 모세라고 왜 분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고, 왜 욱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막중한 부담감과 고통이 모세에게 임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참고(스테게이), 견뎌냈습니다.(휘포메네이)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동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런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이스라엘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해석을 통하여 사랑하기란 무엇인가의 12번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 사랑하기란 상대방의 밑에 서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간음하다가 잡혀 온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기사의 압권은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 는 기막힌 주님의 정면 돌파의 수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사의 압권을 다른 구절에서 찾습니다. 요한복음 8:10-11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인이 지은 죄는 당시 율법의 예로는 돌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죄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왜 이 여인을 개인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보호하셨고 돌보셨습니까? 주님은 이 여인의 삶의 밑에 서보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하였다면 이 여인 말고 그 죄에 동참한 남성이 있었을 것인데, 남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얼마나 억지춘향으로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지를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권위주의라는 또 다른 맥락의 폭력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여인의 상황 밑으로 들어가기로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야 주님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덮으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상황 밑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상황 밑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기란 타인의 밑에 서 보는 것입니다. 밑에 서 보지 않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밑에 서 보면 상대방의 무례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밑에 서 보면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란 밑에 서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고 그들의 허물을 덮는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란 상대방의 밑에 서 보는 것입니다.

13) 사랑하기란 믿어주는 것입니다.
    본문 7절 중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하기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단어 ‘피스튜오’는 원래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먼저 12:6-7절입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살해된 야고보처럼 될 가능성이 있는 위기 속에 있었던 베드로의 의외의 상태를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워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뒤의 구절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자고 있는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온 천사의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 12:7절에 기록된 ‘쳐’라는 헬라어 ‘파탓소’는 치명적으로 세게 때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추론할 때 천사가 베드로를 깨운 것은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을 전제한다면 베드로는 아마도 거의 실신 직전의 깊은 잠에 빠졌다는 해석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동역자 야고보처럼 죽임이 기다기고 있음을 베드로가 모를 리 없건만 그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상태에 어떤 해석이 가능하겠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베드로의 영적 상태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이제는 그것이 별로 베드로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베드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조반을 잡수신 뒤에 주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유념하며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경험 이후 사역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의 전 인생을 주군께 맡겼다는 것 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오늘 설교의 테마로 바꾸어 적용한다면 이런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진짜로 믿어주기로 했다. 결코 불손한 표현이 아닙니다. 믿어준다는 것은 맡긴다는 강력한 대체 언어입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주님이 자신에게 어떤 선택을 하셔도 100% 수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믿는 것이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 믿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란 믿어주는 것입니다. 유익이 되든지, 유익이 되지 않든지 주군을 믿는 것처럼 사랑하기란 대상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맡긴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믿는 것임을 잊지 않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14) 사랑하기란 희망을 주는 마음입니다.
    본문 중반절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여기에 기록된 ‘바라며’의 번역인 헬라어 ‘엘피조’는 ‘희망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또한 그에게 희망이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모두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고, 또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것을 전제할 때 가져야 하는 유념입니다. 그것은 앞에 나온 ‘모든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희망은 조건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희망하는 것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멍에이기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고 희망을 갖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도무지 바라보아도 가능성이 안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 그 안 보이는 자에게 뭔가를 희망한다는 것은 차라리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하여 희망을 품고 그 대상이 아름다운 객체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아주 의미 있는 예수님 사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든 환자 한 명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 자기의 몸을 보이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 환자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1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여기에 번역된 ‘내가 원하노니’를 영어성경 대부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I am willing.” “내가 의지가 있다.”, “내 뜻이 그렇다.”입니다. 나병은 당시에 희망이 단절된 저주 받은 절망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내가 의지가 있다. 내 의지다.”저는 주님의 이 선언이 단지 나병환자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 마음은 저와 여러분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고백이라고 믿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사랑하기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14가지로 나누어 본 사랑하기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쪼록 우리 공동체가 이 사랑 행하기 보여주는 살아 있는 실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