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두 번 진행하는 하반기 나눔 사역을 지난 주간에 진행했습니다. 지난 해 추수감사주일에 실시했던 바자회 수익금을 정리해서 관내 10가정을 동사무소에서 추천 받아 이웃들을 섬겼고, 소녀들의 생리대 구입을 지원했습니다. 사무총회 준비와 연계되어 부교역자들의 힘을 덜어주기 위해 기부금을 갖고 다시 동사무소를 찾아 생활복지 담당 직원에게 교회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행 심부름을 해 줄 수 있냐고 부탁했는데 여직원이 제게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세인교회 목사님이시죠? 너무 죄송하지만 저희는 연말이라 업무량이 많아 대행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받는 분들이 교회에서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왔다면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제게 던진 한 마디가 공명되어 제 귓가에 울렸습니다. “목사님, 교회라서 너무 기뻐요!” 지레 짐작하는 것이 실수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여직원은 분명 크리스천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기에 제게 웃는 얼굴로 반응하지 않았겠습니까? 헌데 이 짐작을 뒤로 하고 저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그날 직원의 멘트를 받으며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펜데믹이라는 고통이 점철되고 있는 오늘 이 시대이기에 이것을 무기 삼아 교회가 해야 할 이웃들을 향한 섬김을 포기하는 직무유기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역설적인 충고를 그녀에게서 받았습니다. “목사님, 교회라서 기뻐요!” 라고 말한 자매의 말 속에 이 의미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목사님,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너무 안 해요. 이 일을 남에게 빼앗기면 안 되는 데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아 너무 슬퍼요. 세인교회가 빼앗기고 있는 교회 일을 다시 찾게 해주셔서 너무 기쁘고 좋아요.” 신학교 후배인 김성호 박사가 쓴 양서,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에서 너무 적절한 갈파를 이렇게 남겨 밑줄 그어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본회퍼에게 타자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다가갈 수 없는 대상이다. 그에게 ‘나’(ICH)는 예수를 통해 비로소 타자를 발견하고, 타자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며, 타자 속에 들어가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된다.” (김성호,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 동연 간,p,383.) 정답입니다. 세인교회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교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는 공동체이기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웃을 섬기는 이유는 교회의 머리이시자 믿는 자들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고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눅 10:37) “교회는 타자를 위해서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가 된다.” (Die Kirche ist nur Kirche, wenn sie für andere da ist.) 본회퍼가 옥중에서 쓴 이 문장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마그나 카르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2022년이 밝았습니다. 세인교회는 이타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이름을 세인(世認)교회라고 지은 것입니다. 이것이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이자, 세인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2022년에도 ‘교회라서 너무 기뻐요!’라는 소리를 이웃들에게 듣는 세상이 인정하는 세인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인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