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여자의 정의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실연당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보다 더 불쌍한 여자는 ‘잊혀 진 여자’라고 책 쓰는 이는 말합니다. 젊은 시절 읽은 글이라 대수롭지 않게 웃고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이런 정의가 나름 의미가 있다는 소회에 젖어 보기도 합니다. 대중에서 잊혀 졌다는 것은 분명히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우울증에 더 잘 걸리는 직업군이라는 조사는 전술했던 이유 때문에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입니다. 적절한 대입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교회의 신자들에게도 잊혀 진 예배가 있습니다. 수요 예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수요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도 하지만 저는 수요 예배라고 정의하니 이렇게 지칭하겠습니다. 주중 삼일에 드려지는 예배, 수요 예배입니다. 학부를 다닐 때,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실천신학 교수님으로 추측되는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주일 이후 삼일에 드리는 수요 예배는 주일 예배의 감동이 희미하게 사라질 즈음에 다시 은혜를 공급하기 위해 드리는 예배다.” 옛날 선생님께서 교훈하셨던 고전적인 가르침이 실천신학적으로 맞든 안 맞든 저는 요즈음 수요예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수요예배에 집중하는 것은 종교를 문화로 삼는 자들은 물론, 명목적인 신자들이 비일비재한 시대이기에 수요 예배는 잊혀 졌지만 이 수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의 조명 때문입니다. 강해 설교를 목숨처럼 지켜왔던 목사로 교회에서 강해 설교를 진행하는 예배가 유일하게 수요 예배이기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철저히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나는 강해 설교 준비가 제목 설교를 준비하는 때보다 배는 더 힘들기에 그만큼 더 연구하고, 기도하는 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근래 진행하는 수요일 창세기 강해는 성령이 조명하시는 은혜가 예상보다 넘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주군께 감사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은 잊은 예배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수요일에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날인지 조차 모르는 무감각한 자들이 수두룩하게 많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수요예배를 사수하는 신실한 교우들과 함께 창세기를 통해 전언하시는 감격으로 인해 더 긴장감을 갖고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주 수요일에 주셨던 ‘자카르’의 레마는 눈물겹게 감사한 조명이었기에 또 어디서 이런 은혜가 임할까 싶을 정도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목회 현장에 서 있는 날까지 잊혀 진 예배인 수요 예배를 잊혀 지지 않는 예배로 섬기기 위해 오늘도 창세기 공부는 제 사역의 일 순위에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 예배가 끝나자, 익산에서 동영상으로 예배를 참여하는 권사님이 제게 용기를 주는 피드백이 이렇게 도착했습니다. “목사님을 통해 전언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자카르 하며 살겠습니다.” 본 교회의 수요 예배를 타 교인이 더 사모하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이런 남은 자들이 있기에 수요 예배 섬기기에 더 최선을 다해 보려 합니다. 해서 이 기도는 저의 매일의 기도 제목 중 하나입니다. “주여, 수요예배에 지성적 기름부음이 그 어느 때보다 차고 넘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