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교회의 리더십을 제게 넘겨주셨던 어른은 흠잡을 곳이 없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이셨습니다. 교단의 선후배 누구도 그 어른을 비난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실로 그 분은 정녕 본받을 만한 선배이셨고, 제게는 큰 어른이셨습니다. 이제는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라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옛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제게 토해 내셨던 웃픈(?) 이야기를 기억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명절이 시작되기 전에 인사차 찾아뵈었을 때였습니다. 어른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제게 이렇게 아픈 추억을 전언해 주었습니다. “이 목사님, 현역으로 있으면서 교단의 일로 외출하였다가 제천으로 복귀할 때, 박달재 터널이 보이면 그때부터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박달재 터널을 통과하는 게 너무 싫었지요. 그런 쉽지 않은 교회를 이 목사님에게 넘겨 부담 지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이 말을 들었을 때가 제천으로 이사 온 지 1년이 채 안 된 터라 어른의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뜻을 백 번, 천 번 이해할 수 있게 된 기억이 생생합니다. 회상해 보면 그래도 어른은 정말로 인격자이신 게 맞습니다. 저는 박달재가 아니라 다릿재 부터 심장이 뛰었으니 말입니다. (ㅎㅎ) 그렇게, 그렇게 살아온 제천에서의 삶이 이제 19년째를 맞이할 태세이니 세월이 참 유수와 같이 빠르게 흘렀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정기 휴가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습니다. 이번 복귀 때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돌아와서 다릿재와 박달재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더듬어 보면 어느 시간부터 제가 갖고 있었던 심정적인 느낌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다시 돌아오기 싫었던 다릿재와 박달재 터널을 통과하던 십 수 년 전의 상황과 많이 바뀌었다는 그런 소회였습니다. 금요일, 교회로 복귀할 때 운전을 하던 아내가 남 원주 IC를 통과하면서 한 마디를 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서니 이제 안정감이 생기네.” 들으면서 제가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익숙한 도로잖아.” 믿거나 말거나지만 제천 IC를 통과해서 교회에 도착하니까 뭔가 안도가 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정국의 연속이기에 후반기 9-12월 사역의 민감함과 두려움이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상의 자리로 들어오니 심리적, 영적 안정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제천이라는 도시가 제 운명의 도식 안에 있는 공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회에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96세 되신 노 권사님이 제가 휴가 마치기를 기다리셨다가 소천하셔서 장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위급한 환우의 상황보고도 받았습니다. 사역이 넘쳐나는 압박감, 민감한 기도제목들의 보고 등등이 스멀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현장이 제게는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도리어 원 자리를 찾은 느낌입니다. 또 일상입니다. 교회에 도착하자 정문에서 맞이하는 전도사님에게 이해할리 만무하겠지만 웃으며 실없이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이 전도사, 쉬는 게 난 더 힘들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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