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언제나 열어두는 것은 분명한 미덕이다. 하지만 머리가 고장 날 정도로 열어 두지는 말아야 한다.” (토머스 키다. “생각의 오류”, 열음사, 2009,p,64.)
이 글을 읽은 지 벌써 오래된 것 같다. 내가 이 문장을 메모한 이유는 이 말을 무신론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버트란트 러셀이 했기 때문이다. 러셀이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근본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독선적 기독교도들을 향하여 연 포문임에 틀림없다. 대단히 예민한 진단이지만 나는 러셀의 이 말을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에게만 강요하는 일방적인 적용이 아닌, 양자 간 상호 관계적인 적용(러셀 자신에게도)으로 해석할 때 지지하고 동의한다. 언젠가 이념에 관한 개인적 성향을 조사하는 심리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설문 조사에 응한 적이 있었다. 모든 항목에 성실하게 답변했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중도적 진보’였다. 결과를 보고서 많이 웃었다. 왜? 진보면 진보이고, 보수면 보수지 중도적 진보라는 결과가 말장난 같았기 때문이다. ‘중도적 진보’라는 말은 좋은 단어의 선택이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색깔이 분명하지 않은 회색주의적인 냄새가 난다는 말이기에.(ㅎㅎ) 이 결과를 보고 썩 기분이 내키지 않았지만, 나름 수용하기로 했다. 내가 보더라도 나는 그렇기 때문이다. 이후 나름 이렇게 자위한다. 현장을 섬기는 목사가 중도이어야지 한쪽으로 치우쳐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자가 되어서야 되겠나! 는 위안으로 말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꼴통보수를 매우 경계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경계하는 필드는 강남 좌파다. 전○○, 안○○에 대해서 차라리 목사 로브를 벗으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근본주의적 폐쇄성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비평하는 대척점에 나는 서 있다. 반면 강남에 한 지역에 보수적인 목회자가 장애우들을 위한 건물과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가장 선두에서서 반대투쟁에 나섰던 소위 말하는 강남 8학군 벨트에 살던 계몽주의라는 허울로 위장한 강남 좌파들에 대해 더 강하게 비난하는 쪽에 있다. 이들의 위선에 학을 띨 정도로 나는 비평적 태도를 취한다. 존경하는 진보적인 지성인으로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신영복 선생의 일침이 귀에 쟁쟁하다. “객관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편당과 야합을 은폐하기 위한 것입니다. 객관을 뒤집으면 관객이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꾼이 되게 합니다. 사람을 관객으로 만드는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2015,p,278) 인간은 본인이 공부하고 성찰한 사상에 대해 주관적 독창성을 갖는 것이 매우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이기도 하다. 물론 이 상식의 도를 나는 공부함에서 나오는 균형이라고 본다. 하지만 조급한 사람들은 그가 꼴통보수든, 강남 좌파든 본인들이 갖고 있는 객관적인 입장이 법이라고 생각하여 균형의 도를 말하는 일체의 것들까지 매도하며 물러서지 않는다. 백번 양보하여 그것까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웃기는 것은 자기들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무지한 일인 줄 아느냐고 다그치며 가르치려 든다는 점이다. 교만의 극치다. 교만한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그것을 반드시 뜯어 고치겠다는 신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진보적 여류 사회학자이자 역사 문화평론가인 레베카 솔닛도 이런 교만한 자들을 향하여 그녀의 독특한 글쓰기로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비아냥이지만 귀에 담아야하는 소리다. “남자들은 자꾸만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레베카 솔닛, “Men explain things to me.”, 창비, 2014,p,15) 로마서 1장의 동성애에 대한 바울의 질타를 성경적 배경이 없이 해석했기에 동성애가 창조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많은 설교자들이 왜곡된 설교를 한다고 가르치려는 자들의 용감함이 무섭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 공부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각설하고 무지로 몰아가는 그 압박이 나는 더 무섭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일체의 목회자들이 소외받는 소수의 힘없는 자들을 도외시한다는 무서운 궤변을 서슴지 않는 일부 극단적 진보주의자들에게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목사들 모두는 동성애자들을 걷어차고 그들의 아픔을 외면 시 하는 수구적인 발상을 갖고 있는 대화가 안 되는 자들이라고 판단하는 그 대화 안 됨에 도리어 삼가 애도를 표한다. 성적 정체성의 선택과 성적 지향의 자유를 포괄이라는 단어로 매도하여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는 목사들은 단 한 명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셨던 주님이 가지셨던 스프랑클니조마이의 심정을 내팽개쳐 버린 전혀 목사답지 못한 자라고 몰아세우는 언어폭력에 참담함을 넘어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도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퀴어 축제에 동참하는 것이 핍박 받는 동성애자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행동하는 그대들과는 다르지만 매일 새벽에 적지 않은 울음으로 동성애자들을 위해 우는 목사다. 내가 그들을 위해 우는 것은 선천적, 태생적 유전 인자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돌이킴을 위해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