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압도하시는 하나님(2)2024-03-08 17:03
작성자 Level 10

2020 7 8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84번째 강해)

 

본문 욥기 38:12-30

제목 압도하시는 하나님(2)

 

서론)

 

지난주에 조카에게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작은아빠생신을 축하드립니다늘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라고지금처럼 앞으로도 건강하셔서 만수무강 하세요.”

받고나서 많이 웃었습니다.

만수무강의 대상자가 되고 보니 벌써 내가 이런 단어를 받아야 하는 대상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조카의 축하 메시지에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조카의 인사말에서 중요한 의미를 추출해 보기로 했습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게 한 이 단어에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상상조차하기 싫은 끔찍함이 그려졌습니다.

또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앞으로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역시 상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모아집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내게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셨고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며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시라는 결론 말입니다.

조금만 외연을 확장하십시다.

나만 그렇습니까?

단언컨대 그럴 리 없습니다.

여기에 모여 예배하는 세인 지체들 모두에게도 이 하나님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오늘 이 저녁도 집중해야 하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뒤돌아보고 예측할 때지속적으로 하나님이 내 삶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믿음의 객체인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이끄심 안에 살아야 한다는 당위입니다.

지난주 월요일교단 인준을 위한 목사 코스워크 과정 공부 중에 강의하는 교수가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종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지하게 묻는 그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했습니다.

종교란 믿음의 주체인 하나님에게 믿음의 객체인 내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열망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종교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제한 답변이었습니다.

종교로 번역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라틴어 ‘religare’에서 파생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풀면 이렇습니다.

‘re’ (다시) + ‘ligare’(넥타이로 묶다)

여기에 맞추어 해석하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하나님에게 다시 묶이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정의해야 그 의미를 적용한 해석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께 다시 묶여지기를 원하는 것을 이렇게 적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란 과거에 나를 압도하시며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묶여지기를 바라는 것이며오늘은 압도하시는 하나님께 여전히 내가 묶여지기를 원하는 것이며내일에도 그렇게 묶여져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본론)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압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압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압도하실 것입니다.

왜 이렇게 자신 있게 표현했습니까?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15절을 봅니다.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저는 이 구절에 마주치면서 시편 136편 7-9절이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제일 잊지 못하는 순례지를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시내산을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새벽 1시에 시내산 등정을 합니다.

3-4시 즈음 정상에 오를 때까지 주변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드디어 정상에 오르고 그곳에서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나면 동이 틉니다.

모세 기념 교회 근처에서 일출을 기다리면 태양이 떠오릅니다.

전혀 몰랐던 빨간 바위산으로 되어 있는 그 주변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시내산 일출은 제 생애 잊지 못할 최고의 장관을 연출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 광경에 압도되는 순간우리는 오늘 욥에게 호통 치시는 듯한 다음의 구절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12절 본문)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얻는 첫 번째의 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1) 압도하시는 여명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 의미를 아십니까?

담임목사가 이렇게 말하면 웬 말장난이냐고 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분들이 혹시 있을 수 있기에 부연합니다.

성도에게 아침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의미입니다.

이 아침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오늘 본문에서 역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침에게 명하셨기에 우리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새벽에게 하나님이 일러주었기에 새벽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너무나 당연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침이라는 단어의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아침이 우리에게 오려면 반드시 여명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명을 경험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강하게 선언하십니다.

13-1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저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이 엄청난 선언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 없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에게 명하여 새벽으로 하여금 새벽 자리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고 난 뒤에 아침은 아침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본문이 보고합니다.

철저한 밤과 어둠을 틈타 땅 끝(세속적인 흑암의 권세)을 붙들고 있는 악한 자들을 척결하셨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악인들의 삶과 정체를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에게 빛이 차단되게 하셨고그들의 용맹스러웠던 팔은 꺾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침이라는 영광을 맛보는 자들은 당연히 승리하게 될 것이 자명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아침을 맞이하는 자가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여명 즉 하나님의 조명하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어떻게 느끼고 해석하십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저와 함께 하시려는 의도를 갖고 계실 때 항상 먼저 조명하시는 방법은 그 일에 대한 영적 부담감을 갖게 하십니다.

그런 뒤에 그 영적 부담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실 때말씀으로 조명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조명하게 하신 뒤에 그것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후 사람이든사건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방법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순서가 이렇습니다.

견딜 수 없는 영적 부담 → 말씀으로 조명하심 → 기도하게 하심 → 방법을 주심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게 하심임을 제게 체휼하게 하시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이 방법은 제 개인의 방법이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공통분모는 보입니다.

하나님이 압도하시는 여명으로 저는 움직이게 하신다는 은혜입니다.

여명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인 영적 여명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본문 12-15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악함과는 반대편에 있는 일하심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은혜는 이성을 뛰어 넘는 은혜입니다.

 

본문 16-18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본문에서 하나님은 욥을 이렇게 몰아세웁니다.

네가 바다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보았느냐?

그곳의 땅 넓이를 알 수 있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 지하의 세계를 네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힐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19-21절을 읽습니다.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19-21절은 16-18절의 그 반대 영역에 대한 질문입니다.

즉 천상의 영역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욥에게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욥이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욥은 지하의 세계천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이해할 수 없습니까?

그는 피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며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주권적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이해의 폭을 넓혔으니 조금도 하나님이 욥을 꼼짝 못하게 하신 그 분의 권위를 목도해 보십시다.

22-30절입니다.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욥의 입장에 한 번 서보았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에 1도 대꾸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곳간에 있는 눈과 우박과 열이 어떻게 통제되고 있는지를 말씀합니다.(22-24)

하늘에서 땅으로 공급하시는 물의 통로도 언급하셨습니다.(25-27)

28-30절은 욥기가 성문 서에 들어가는 것을 보란 듯이 밝혀주는 것 같이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으로 묘사했는데 비와 이슬방울은 아버지의 위치로 상징했고얼음과 서리는 어머니의 영역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권에 있는 물의 현상자리를 설명합니다.

21세기의 이성적 이해로는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 이 표현이 주는 실질적인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얄팍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영역과 일하심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분명히 경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며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해되지 않는 존재이기에 하나님이시라는 감동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자존자가 이해되면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성적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존재이십니다.

우리들이 아주 가끔 하나님께 실망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철로에서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 실망합니까?

이성으로 생각되어지는 나의 입장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내 생각에는 분명히 이런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해주시지 않죠?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질문처럼 건방진 질문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내 생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에 즐비한 세속의 가치들성공주의안락함정치적 헤게모니의 점령주류적인 가치에 대한 탐닉 등등으로 똘똘 뭉친 생각을 가진 자가 정말 볼품없는 초라한 행색을 보이는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요단강에 비해 백배나 더 깨끗하기에 그 강물에는 한 번만 들어가면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나아만적인 자기 생각에 물든 자가 어떻게 요단강에 발이나 담글 수 있단 말입니까?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열왕기하 5:11)

이 교만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교만으로는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없을뿐더러 주님의 조명하심은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속의 영향은 바이러스가 인간의 혈류와 컴퓨터의 전자두뇌에 작용하는 것과 같이 똑같이 작용한다침입하여 피해를 입히고아예 시스템 전체를 망가뜨리려 위협한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께 진지하라”, 디모데, P,143.)

저는 정말로 가끔 인간의 교만한 이성적 판단이 세속주의의 극점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이성적인 판단을 무시하는 목사가 아닙니다.

신앙의 여정을 달리면서 이성이라는 도구가 언제든지 귀한 도구가 됨을 인정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이 신앙의 여정을 돕는 도구가 아닌 신앙의 마지노선을 넘어서며 악용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자면 차별금지법과 같은 판단입니다.

지금 정의당 국회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차별금지법(差別禁止法)에 포함되는 차별이 금지되는 대상은 대체적으로 이런 것들입니다.

성별성정체성장애(신체조건), 병력외모나이출신 국가출신민족인종피부색언어출신지역혼인 여부성정체성성지향성임신 또는 출산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종교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범죄 전력보호 처분학력사회적 신분 등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대체적인 항목에 대하여 금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 지지하는 목사입니다.

이것을 지지하는 이유는 너무 당연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 역시 이 차별금지법을 부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요?

이유는 몇 몇 독소조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성적 정체성에 대한 차별의 문제와 종교에 대한 요소 때문입니다.

성적 정체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고 강하게 반발하는 동성애자들이 주장하는 내용 중에 자기들은 성적 정체성을 갖고 피해를 당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번 양보하면 일견 맞는 말입니다.

만에 하나이런 이유로만 이들의 의견을 들으면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본인들이 그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주장하는 것처럼 기독교가 동성애를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하는 자유도 허락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평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종교적 신념을 강조하지 말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만이 갖고 있는 성경적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역차별입니다.

그건 대단히 무서운 세속주의적인 폭력이자 겁박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말하는 권리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차별금지법의 취지라면 마땅히 기독교가 말하는 진리의 권리에 대하여도 압박하거나 물리적인 법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공평한 차별금지의 취지에 맞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것 자체도 인정하지 않는 차별반대법 제정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에 성경이 죄라고 정의한 내용을 법으로 제한하는 일체의 법률제정에 대하여 순교자적인 각오로 싸울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의 요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요 혹은 찬성이요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말하려는 설교의 요는 이성이 악용되는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하나님이 압도하시는 은혜는 이런 이성의 차원을 뛰어 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인인 것이 좋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18세기 미국이라는 캄캄했던 세속의 나라를 영적인 부흥으로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를 보면 이런 담백한 은혜가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조나단 에드워즈 설교선집”, 부흥과 개혁사,p,68.)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압도하시는 은혜의 결정판은 거룩입니다.

그러나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한 거룩은 외형의 거룩이 아니라 삶의 거룩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명령은 오늘도 조명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오늘도 받는 자는 내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욥에게 강하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조명하심이 그래서 왠지 크게 공명되어 들립니다.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로 결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시간부터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설교를 팀 켈러의 말을 인용함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향한 여정에 나서면서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그분한테서 이런저런 것을 얻을 수 있을까하지만 결국엔 어떻게 해야 그분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바꾸어 가야 한다그쪽으로 옮겨가지 못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참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하고 그저 캐리커처 버전쯤 되는 하나님을 믿는데 그칠 것이다.”(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두란노,p349.)

하나님의 은혜는 캐리커처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압도하시는 전인격적인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